언어에는 날것이 전혀 없다. 익힘에 너무 가까운 언어. 말해진 것은 모두 익힌 것이다. 언어는 언제나 너무 늦게 우리에게 온다. 우리 안에는 선사시대, 즉 음악의 고어가 있다. 목소리보다 귀가 수개월 앞선다. 지저귐, 흥얼거림, 울음소리, 음성은 거의 분별 있게 분절된 언어보다 몇 달이나 몇 계절 앞서 우리에게 온다. 그것이 첫 번째 허물 벗기였다. - P26

매우 주의 깊게 기다림에 귀 기울이기. 주의 깊게 음악을 듣기. 그것은 긴 시간의 한순간을 운명의 은혜로 만드는 일이다. 일종의 시간 기다림을 통해 시간과 즐기는 일이다. 권태를 즐기는 일이다. - P68

그는 비파를 켜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노랫소리가 입술에서 잦아들 무렵 성련의 모습이 슬며시 물 위에 나타났다. 백아는 성련이 장대로 미는 배에 올라탔다. 백아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음악가가 되었다. - P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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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안에서 스스로를 포식자라고 최면을 거는 소녀와 포식자가 되는 것으로 생존하려는 소년의 모습에 마음이 아프다. 보호자로부터 스스로를 지켜야 하므로 더욱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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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소설을 읽던 초기에는 작가의 인간으로서의 성과나 능력에 경외심이 들었었고, 나도 정신을 차리고 싶었지만 내 정신은 내 안에 있으니 내가 쉬이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채식주의자를 읽으면서는 단지 관능인 삶 또는 관능이 이끄는 삶을 살면서도 스스로를 동물과는 분리된 인간 종으로 상정하고 있는 것이 근원적 오류였다는 자괴감에 괴롭기도 했었다. 그러고는 내 삶의 방식도 조금씩 바뀌었던 것 같다. 이 글을 읽으면서는 작가님의 많은 글들을 통해 만났던 그 지점에 감격하기도 하고, 미쳐 닿지 못했던 곳으로 가볼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벅차기도 했다. 짧은 글들이지만 쉬이 읽을 수 없는, 멀리 뻗어나가 시공간이 가득히 경험되는 읽기였다. 삶을 마주하게 하는 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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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소설을 읽던 초기에는 작가의 인간으로서의 성과나 능력에 경외심이 들었었고, 나도 정신을 차리고 싶었지만 내 정신은 내 안에 있으니 내가 쉬이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채식주의자를 읽으면서는 단지 관능인 삶 또는 관능이 이끄는 삶을 살면서도 스스로를 동물과는 분리된 인간 종으로 상정하고 있는 것이 가장 큰 오류였다는 생각에 몹시 괴롭기도 했다. 그러고는 내 삶의 방식도 조금씩 바뀌었던 것 같다. 이 글을 읽으면서 그렇게 읽어왔던 작가님의 많은 글들이 생각이 났다. 나를 살게 하는 글들.










완성까지 아무리 짧아도 일 년, 길게는 칠 년까지 걸리는 장편소설은 내 개인적 삶의 상당한 기간들과 맞바꿈된다. 바로 그 점이 나는 좋았다. 그렇게 맞바꿔도 좋다고 결심할 만큼 중요하고 절실한 질문들 속으로 들어가 머물 수 있다는 것이. - P12

한 인간이 완전하게 결백한 존재가 되는 것은 가능한가? 우리는 얼마나 깊게 폭력을 거부할수 있는가? 그걸 위해 더 이상 인간이라는 종에 속하기를 거부하는 이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 P12

남쪽으로 비치는 햇빛을 주는 거예요. 거울로 반사시켜서.

*

그렇게 내 정원에는 빛이 있다.
그 빛을 먹고 자라는 나무들이 있다.
잎들이 투명하게 반짝이고 꽃들이 서서히 열린다. - P96

5월 1일

대문을 들어서면 라일락 향이 그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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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에는 방이 네 개 있었다. 내 방, 동생 질의 방, 부모님 방, 그리고 시체들의 방.

벽에는 액자들이 걸려 있었는데 그 속에선 아버지가 사냥총을 들고 죽은 동물을 밟은 채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서 있었다.

어머니의 주된 기능은 식사를 준비하는 것이었다. 아메바답게 창의적이지도 않고 취향도 없었으며 마요네즈를 엄청 많이 쓰곤 했다.

나는 차마 질을 볼 수 없었다. 그 애와 눈이 마주치면, 온 힘을 다해 참고 있던 눈물이 흘러내릴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또한 내가 우는 모습을 질이 보지 않기를 바랐다. 내 비참함이 전염될까 두려운 것이 아니었다. 그 애의 머릿속에서 들끓고 있는 기생충이 내 눈물을 먹고 자랄까 두려웠던 것이다. - P82

나는 삶이 나에게 선사한 그 모든 경이로움을 보았다. 공포를 보았고, 아름다움을 보았다. 그리고 아름다움이 승리했다. 나는 약하지 않았다. 나는 질을 영원히 잃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 아이를 구하기 위해 다시 돌아오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약하지 않았다. 나는 먹잇감이 아니었다. - P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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