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리카르도 피글리아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무언가를 생각하고 우리가 썼다고 생각하는 책에서 그걸 읽지만, 그것은 우리가 쓴 것이 아니라 다른 나라, 다른 곳, 그리고 과거에 누군가가 아직 생각하지 않은 생각으로 쓴 것이다. 그렇게 우연히, 항상 우연히,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고 혼란스러워 했던 것이 분명하게 표현된 책을 발견한다. 우리 각자를 위한 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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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진아, 미안해. 너보다 우리 자식들을 더 사랑해서 너한테 정말 미안해..."
참말이지, 이모는 그런 사람이었다. 이모는 전화선 저쪽에서 몰랐을 것이었다. 이모의 마지막 말 때문에 내가 그 순간 왈칵 울어 버렸다는 것을. 나는 울음을 감추기 위해서 얼른 전화를 끊었다. 벌써 가득 고여 흐르고 있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 내며 나는 창 밖을 보았다. - P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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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없는 상태‘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숨이 트이는 감각을 공유하는 독서... 세종 기지에 두고 올 책으로 《경애의 마음》을 집어든 것에도 괜스레 안도하는 독자의 마음.













누구도 남극의 주인이 아니며 국경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곳의 빙원은, 빙산은, 유빙은 ‘국가‘라는 제도 안에 들어와 있지 않았다. 마치 우주의 행성처럼. 지구상에 그런 ‘없는 상태‘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숨이 좀 트였다. - P14

세계의 끝,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지구의 가장 먼 곳, 마치 흰빛처럼 아스라이 존재하는 얼음 땅에 내 책이 있다니. 나는 책장 앞에서 고민하다가 《경애의 마음》을 캐리어에 넣었다. - P32

남극에는 부리가 붉은 젠투펭귄과 눈과 부리 아래에 끈 무늬가 있는 턱끈펭귄이 사는데 턱끈펭귄이 좀 더 용감하고 호기심이 많다. 기지에 도착하고 열흘쯤 뒤 실제로 기지를 둘러보러 온 턱끈펭귄과 맞닥뜨리기도 했다. - P51

지구를 한참 돌아 펭귄들 앞에 서 있는 나도 이 순간을 손쉽게 얻은 건 아니었다. 살아남기를 잘했다고 나는 해변에서 생각했다. 그건 반대의 순간들 또한 있었다는 얘기다.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위기들이었을 것이다.

펭귄과 나, 그리고 흰풀마갈매기 사이로 바람이 휘몰아쳤고 나는 그런 우리의 ‘거리‘가 평화롭게 느껴졌다. 몇몇 펭귄들은 미동도 않고 바람을 등지고 있었다. 마치 낮잠이라도 자는 것처럼. 

느리고 작은 존재가 신비롭게 보여주는 태연함 - P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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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걷는 모습을 보면 항상 아주 가버리는 사람, 멀어져가서는 돌아오지 않는 사람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렇지만 그녀는 나타날 때마다 그녀가 나타나는 것을 목격하는 사람의 가슴 한복판으로 와 닿는다. 그녀는 시선과 기억 속에서 거꾸로 전진한다.
그녀를 보고 누군지를 알아차리는 순간 그녀는 벌써 사라지고 없다. - P30

인간의 영혼이 정말이지 더럽고 비에 젖은 개털처럼악취를 풍기던 그런 시절이었다. 그러나 그 시절이 결코 아주 지나가버린 것은 아니다. 그 시절은 존재하기를 결코 그치지 않았다. - P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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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가 책 속으로 들어왔다. 그 여자는 떠돌이가 빈집으로, 버려진 정원으로 들어서듯 책의 페이지 속으로 들어왔다.그 여자가 들어왔다. 문득. 그러나 그녀가 책의 주위를 배회한 지는 벌써 여러 해가 된다. 그녀는 책을 살짝 건드리곤 했다. 하지만 책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녀는 아직 쓰이지 않은 페이지들을 들춰보았고 심지어 어떤 날은 낱말들을 기다리고 있는 백지상태의 페이지들을 소리나지 않게 스르륵 넘겨보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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