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롤 에디션 D(desire) 9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지음, 김미정 옮김 / 그책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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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S에서케이트 블란쳇과 루니 마라, 두 여배우의 서로를 쳐다보는 눈빛이 사랑이라는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온다는 극찬이 줄을 이었던 영화 캐롤. 그렇지만 2월에는 어느 영화관을 가도 검사외전(장르: 강동원) 외에는 영화 선택지가 별로 없었고, 나는 고작해야 70명?이 들어가는 작은 관에서 하루에 많아야 서너번 상영되던 캐롤을 보겠다고 CGV앱을 주구장창 들여다봐야만 했다. 내가 회사를 벗어나 있는 시간, 캐롤을 보고 싶다던 내 친구가 나를 만날 수 있는 시간, 그리고 영화관에서 캐롤이 상영하는 시간을 맞추기 위해서. 그렇게 힘들게(?) 티켓팅해서 보게 된 영화 캐롤은 매우, 매--우 기대 이하였다. 레트로카메라처럼 바랜 느낌의 영상 속 색감은 아름다웠지만 SNS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극찬했던 두 여배우의 감정선이 왜 나만 따라잡기 어려운건지 싶었다. 생계를 위해 백화점 장난감 코너에서 무기력하게 일하던 테레즈가 자신의 딸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러나온 캐롤에게 갑작스럽게 전에는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던 사랑의 감정을 느껴 그녀에게 열렬하게 빠져드는 장면까지는(두 주인공이 모두 여자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별 문제 없이 관람했다. 사랑에 빠지는데 무슨 이유가 필요하랴. 그렇지만 테레즈가 캐롤의 집에 놀러갔다가 갑작스런 캐롤의 전 남편 하지의 등장에 그녀에게 내쫓김 당하듯이 지하철 역으로 이동하고, 울고, 또 그러다가도 캐롤의 제안에 모든 것을 놓고 그녀를 따라 자동차 여행을 떠나고……. 그리고 영화 마지막 부분에 가서는 캐롤이 테레즈에게 매우 애틋한 눈빛을 발사한다. 영화 마지막에 이르러서 나는 생각했다. 테레즈의 시선으로 캐롤을 보아서는 절대, 이 영화의 타이틀을 차지하고 있는 그 여자, 캐롤을 이해할 수가 없겠구나. 영화가 끝나고 집에 돌아와 영화 해석을 읽으려고 블로그를 검색하던 나는 이 책에 원작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책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것도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내 머릿속에서 영화 캐롤의 그림자가 지워지기 전에.

영화로 먼저 캐롤을 접했기에, 책을 읽으면서 '어?' 했던 부분이 여럿 있다. 예를 들면 영화 속에서 사진작가 지망생이었던 테레즈가 책속에서는 무대디자이너 지망생이라는 것, 캐롤은 영화와 달리 장난감 기차를 사가지 않았고 장갑을 두고 가는 실수를 저지르지도 않았으며, 딸 린디는 캐롤에 의해 언급만 될 뿐, 테레즈가 캐롤이 린디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본 일은 단 한 번도 없다는 것. 책을 다 읽고 나니까 감독이 원작에 무리가 가지 않는 한도 내에서 각색을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에서 카메라라는 소품이 굉장히 쓰임새가 좋았고, 원작 속 인형보다는 장난감 기차를 두고 나눈 캐롤과 테레즈의 나눈 대사와 분위기가 더 좋았다.

우유부단하고, 소심하고, 본인이 좋아하는 것에 확신이 없던 어린 테레즈가, 처음으로 간절히 원하는 사람이 생겨서 어쩔줄 몰라하는 모습이 책 거의 마지막 부분까지 이어진다. 그래서 책 뒷장에 붙은 여러 언론사의 호평을 읽고 색다른 로맨스, 완벽한 사랑을 기대하고 읽은 사람 중 대다수는 이 책 캐롤이 지루하다거나, 유치하다거나, 답답하다고 느낄 것이다. 왜 나는 이 책을 읽은 다른 사람이 느낀 그 감정을 느끼지 못한걸까 하고 고민할 필요는 없다. 본인이 느낀 그 감정이 이 책을 읽은 다른 독자들이 느낀 그 감정이다. 이 책은 결국 보통 사람들의 사랑 이야기다. 처음 느낀 감정이기에 완벽하지 못하고, 질척이고, 유치하고, 심지어 이기적인. 테레즈는 캐롤을 열망하고 환상하는 힘이 너무 커서 자신도, 자신의 주변 사람도 돌아보지 못 하고 캐롤과 리처드의 말대로 계속 어린애처럼 군다. 그리고 이 모습은 두 사람이 떠난 여행에서 절정으로 치닫는다. 테레즈는 캐롤이 결국 린디를 지키기 위해 자신을 떠나자, 슬퍼하고 캐롤을 원망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눈에 덮여있던 사랑의 콩깍지를 인정하고 벗겨낸다. 그리고 테레즈는 다시 캐롤에게로 간다.
있는 모습 그대로의 캐롤을 사랑하기 위해서.

작가가 백화점에서 잠시 아르바이트를 할 때 만났던 여자를 토대로 그려낸 캐롤. 그녀는 자신에게 레즈비언 작가라는 오명이 붙은 것을 염려해 1952년, 가명으로 이 작품을 발표했는데, 당시 동성애 작품 속 주인공들이 해피엔딩(!)을 맞이하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생각 이상의 주목과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원래 책에 붙였던 제목은 소금의 값The price of salt이었다고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캐롤이 어감도 예쁘고, 독자들이 보기에 더 캐치한 제목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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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롤은 프랑스식으로 '테레즈'라고 발음했다. 테레즈는 자기 이름이 온갖 발음으로 불리는 상황에 인이 박혀 때론 자신도 여러 가지로 발음했다. 테레즈는 캐롤이 자기 이름을 그렇게 발음하는게 마음이 들었다. 여인이 입술을 움직여 그렇게 부르는 것이 좋았다. 전부터 막연히 느끼던 무한한 갈망이 이제 눈에 보이는 소망으로 이루어졌다. 너무나 어이없고 부끄러운 욕망이 테레즈의 마음속에서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p.75)

그 누구보다 행복했다. 행복은 날아가는 기분일거야. 마치 연처럼. 테레즈는 상상했다. 누가 연실을 얼마나 푸느냐에 달려 있었다. (p.144)

캐롤이 입을 열었다. "'난 경쟁조차 할 수 없어.' 이런 말 말이야. 사람들이 고전이라고 말하는데, 이런 대사가 바로 고전이지. 백 명이 똑같은 대사를 읊는 게 바로 고전이야. 엄마가 하는 대사와 딸이 하는 대사가 같고, 남편이 하는 대사와 정부가 하는 대사가 같지. 이를테면 '차라리 내 발 밑에서 네가 죽는 꼴을 보는 게 나아.'라는 대사라든가. 같은 작품이 다른 배우들에 의해 계속 무대에 오르는 게 바로 고전이지. 그럼 하나의 연극이 고전으로 등극하기 위해 사람들이 꼽는 조건이 뭘까, 테레즈?"
"고전이란……." 테레즈의 목소리는 긴장해서 숨이 막힐 듯 했다. "인간의 보편적 상황을 다루는 거죠." (p.251)

"당신에게도 가족이 있다고 상상하니 좀 어색해요."
"그게 왜?"
"나한테 당신은 그냥 당신이거든요. 누구와도 얽히지 않은 독자적인 존재." (p.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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