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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를 삼킨 사물들 - 보이지 않는 것에 닿는 사물의 철학
함돈균 지음 / 세종(세종서적) / 2018년 3월
평점 :
왜 이 책의 제목이 '코끼리를 삼킨 사물들'일까? 이 책은 우리 눈에 보이는 사물의 외형과 쓰임새 뿐만 아니라 사물을 둘러싸고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철학을 알아보는 방법을 일러주는 책이기 때문이다. 마치 '어린 왕자' 작가 생텍쥐페리가 그린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 그림을 보는 것처럼 말이다. 어른들은 모두 생텍쥐페리가 보여준 그림을 보고 모자만을 떠올렸다. 어른들 모두가 생텍쥐페리가 생각했던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볼 만큼 오랜 시간 정성들여 그림을 주의 깊게 보지 않았던 탓이다. 저자 함동균씨는 이 책을 통해 계단, 다이어리, 라디오, 밴드, 빨대, 텀블러와 같이 67가지 익숙한 일상 사물들을 가장 힙하고 낯설게 사유하는 인문적 훈련법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우리의 일상이 고착화될수록, 우리는 더 빠른 속도로 늙어버린다고 한다. 그래서 기계에 기름칠을 해서 '낡음'을 방지하듯 우리도 끊임없이 새로운 경험을 통해 '노화'를 방지해야만 한다. 스트레스를 받은 직장인들은 여행을 통해 단조로운 일상의 탈출을 꿈꾸곤 한다. 물론 여행을 통해 우리는 평소에 먹을 수 없는 음식을 접하고, 길 위에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평소와 다른 하루를 겪게 될 것이다. 새로운 경험을 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나의 일상이 있는 집과 회사 밖으로 벗어나는 '여행'이겠지만, 새로운 경험은 반드시 여행만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이불을 갈고, 출퇴근길에 들어본 적 없는 최신가요 또는 올드팝을 틀어 듣거나, 편의점에서 '신상 먹거리'를 시도해보는 식으로도 우리는 일상의 단조로움을 깨뜨릴 수 있다. 또, 여행은 어느 곳에서나 이루어질 수 있다. 침대 위에 누워서도, 회사 컴퓨터 앞에 앉아서도 가능하다. 평소보다 조금 더 꼼꼼하게 내 주위의 사물을 둘러보거나, 또는 평소에 보지 않는 각도에서 쳐다보거나, 평소에 쓰던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그 사물을 쓸 방법이 없을까 고민해보는 것만으로도 내 주변이 낯설게 느껴지는 경험은 충분히 획득할 수 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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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과 나-어린 왕자가 인식 면에서 갖는 결정적 차이는 '사물'을 대하는 접근 방식에 있다. 어린 왕자가 소행성들을 여행하며 만난 어른들은 자본가, 교수, 왕, 공무원 등이었다. 소설에서 이들은 사람과 사물의 세계를 즉각적인 쓸모의 차원에서만 바라본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쓸모-필요-유용성만으로 사물들을 본다는 것은 그들이 세계 전체를 도구적 가치로만 여긴다는 걸 뜻한다. 우리의 세계, 특히 과학기술이 현저히 발달하여 인공 사물의 즉각적 유용성이 작동하지 않는 곳이 없는 세계에서 이러한 관점은 불가피한 것일지 모르겠으나, 어린 왕자는 이 관점이 인간이 세계와 대면하는 유일한 관점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하고 싶어 한다. 철학자 발터 벤야민은 자신의 사색을 담은 메모에서 '아이들은 늘 폐기물에 이끌린다'는 표현을 쓴 적이 있다. 짓다만 건물, 무너져가는 폐가, 쓰레기더미처럼 어른들은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인공 사물에서 아이들은 천진한 놀이터를 발견한다는 것이다. 늘 수수께끼처럼 말하는 벤야민은 이 표현에 대해서도 충분히 설명을 덧붙이지 않았지만, 어린 왕자의 관점은 벤야민의 생각을 짐작하는 데도 참조가 될 수 있다. 어른들이 인공 사물들의 더미에서 보는 것은 표면의 폐허인 데 비해 아이들의 시선은 표면 너머에 닿는다. 즉각적인 쓸모의 관점으로만 사물들을 쳐다보는 어른들과 달리 아이들은 쓸모를 망각한 채 존재의 다면성과 만나는 일이 많은 것이다. 벤야민의 열렬한 해석자 조르조 아감벤이 이야기한 '유년기 체험' 같은 것을 하나의 해석적 아이디어로 참조해보자. 사람에게 유년기가 있는 것처럼, 사물에도 유년기가 있을 수 있다고 말이다. 모든 사물이 세상에 출현하는 최초의 순간을 떠올려보라. 한 인공 사물의 출현에는 설사 우연에 불과한 것일지라도 그 시각 인류가 당면한 크고 작은 문제들이 얽혀 있으며, 필요-해결-진보를 향한 인류의 꿈이 깃들어 있다. 하나의 필요는 곧 여러 사람의 필요와도 연관되는데, 이는 하나의 필요가 여러 차원의 필요의 연쇄 속에 존재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어떤 도구가 업그레이드되면 이전 버전의 도구는 즉각적인 쓸모만을 따지는 관점에 따라 순식간에 폐기물로 전락해버리지만, 어린이들은 그 자신이 유년기 존재이기에 폐기물이 된 사물들에서조차 그것들이 최초로 등장했던 순간에 지녔던 꿈과 설렘을 지속할 수 있다. (pp.7-8)
관상학에서는 '고난은 같이 할 수 있으나 기쁨은 같이 할 수 없는 상'이 있다고 하는데, 계단이야말로 이런 상에 부합하는 사물이 아닐까.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으로만 존재하기에 행인에게는 머무르는 사물이 아니라 늘 이별하기 위해 만나는 사물인 계단. (계단, p.22)
오늘날 고궁에서 도시인들이 느끼는 '과거'의 향수는 역사적 의미에서도 일탈해 있으며, 그 외형만이 향유된다는 점에서 키치적이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와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E.H.카의 유명한 명제를 상기한다면, 역사적 유물의 외관을 두르고 있는 이 사물은 실은 더 이상 '역사적'이지 않다. (고궁, p.29)
서른 개 또는 서른한 개의 동일한 사각형이 하나의 공간 안에서 격자에 의해 분할된다. 이 분할은 열두 달의 달력으로 포괄됨과 동시에 365개의 방으로 각각 수렴된다. 이 사물은 365개의 노트 뭉치이자 시간의 책이다. (다이어리, p.61)
지금까지 이 사물에서부터 허공으로 퍼져나간 인간의 목소리와 음악 소리는 인간이 지구에서 멸종한 뒤일지도 모를 까마득한 미래 시간에도 지구 어딘가에서, 또 우주 어딘가에서 떠돌 것이다. 빛과 마찬가지로 일단 송출되면 사라지지 않는 것이 전파의 특성이기 때문이다. 지구의 대기권으로부터 해방되어 외계로 나아간 비틀스와 들국화의 음악은 우리가 감각하지 못하는 시간과 공간을 지나 언젠가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어느 먼 별의 미지의 존재에 닿을 것이다. 우리의 10대 시절을 키우고 위로해주었던 그 음악이, 우리가 지구와 우주에서 먼지가 되어 사라진 후에도 말이다. 라디오는 그래서 별, '라디오 스타'다. (라디오, p.80)
이때 문득 이런 질문이 떠오르는 것이다. 우리 몸의 '중심'은 어디일까. 배꼽일까, 심장일까, 얼굴일까, 아니면 허리일까. 혹시 중심은 고정적인 특정 자리가 아니라, 이 작은 사물을 붙여야 하는 그 상황에서 발생한 바로 그 상처의 자리가 아닐까. 상처에 몸 전체의 신경이 집중됨으로써 육체와 정신도 꼼짝없이 그 자리에 구속되기 때문이다. (…) 이런 사고를 확장시켜보자. 사람의 신체뿐만 아니라 사회에도 중심이 있다면? 지금 이 시각 아픔을 호소하는 곳이 있다면, 그런 존재가 있다면 거기가 바로 사회의 중심이요 이 순간 가장 중요한 자리가 아닐까. 그 자리를 돌보는 것은 사회라는 신체 전체를 돌보는 일이기도 하다. 엄마가 붙여준 밴드처럼 그곳에도 밴드가 필요하다. 엄마와 밴드의 그러한 역할은 사회 구성원인 우리도 같이 할 수 있다. (밴드, p.111)
우주의 모든 사물이 중력의 영향을 받는 데 비해 빨대는 중력을 거스르는 수직상승 운동을 보여주는 사물이라는 것이다. 숨을 통해 낙하 법칙을 거스르는 운동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빨대는 생명 현상의 메타포처럼 보인다. (…) 한마디로 무생명의 특징은 주변 환경의 흐름에 내맡겨져 떠내려간다는 것이고, 생명의 특징은 그런 환경에서도 거슬러 오른다는 것이다. (빨대, p.132)
이 사물은 문화-문명이라는 이름의 '사람다움'이 저절로 생기거나 확고부동한 물리적 실체가 아니라, 부단히 관리하고 제어해야 하는 지향적이고 동사적 행위라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일지 모른다. 사람은 사람에게서 났으나 '사람다움'은 사람에게서 오히려 멀리 있다. 그래서 그 멀리 있는 것을 가까이 가져 오기 위한 노력의 이름이 '문화 · 문명'이다. 그냥 두면 사람은 짐승이나 귀신이 되기 십상이다. (손톱깎이, p.143)
시적인 말은 의식의 표층에 떠 있는 명료한 소리, 큰 소리가 아니라 스스로도 분간하지 못하는 소리, 내면의 미묘한 파장, 어둠 속에 묻혀 떠오르지 않는 소리, 존재했으나 망각된 기억, 억압되어 의식의 저 해저에 갇혀 있는 소리들을 시인이 길어 올린 것이다. 조금 다르지만 본질적으로는 다르지 않은 차원에서 정신분석의 창시자인 프로이트는 '이런 말들에 진짜 내 심장이 깃들어 있다'고 누누이 강조했다. 그가 남긴 수수께끼 같은 문장은 "Wo es war, soll ich werden(그것이 있는 곳에 내가 있다 / 그것이 있는 곳에 내가 있어야 한다)"은 이런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잘 들어야 하는 것 중에는 때로 내 안 깊숙이 스민 말들도 있다. 시나 정신분석에서는 이런 말들도 전적으로 '내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타자'라고 부른다. 그것은 내가 주체가 되어 통제할 수 있거나 자기도 잘 인지하지 못하는 나의 타자인데, 진실은 바로 이 타자에 있다. 타자를 존중하는 것은 낮은 자리에서 나오는 나직한 소리에 귀 기울이는 일과 다른 것이 아니다. (스피커, p.160)
텀블러가 보온병 같은 단순한 도구-생필품이 아니라 기호가 된 이유는 이 사물 역시 최근 거의 모든 유행 아이콘이 따르는 두 가지 공식을 좇았기 때문이다. 첫 번째 공식은 해당 사물의 명칭을 낯설고 새로운 것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어떤 사물이 도구로부터 이탈한다는 것은 그 사물을 부르는 명칭에서도 도구적 느낌을 거둬낸다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해 사물의 이름 자체에서부터 그것이 '도구'라는 사실을 망각시켜야 한다는 것인데, 이를 위해서는 모호하거나 이국적이거나 아예 국적이 느껴지지 않는 명칭이 필수적이다. 서양 문화에 대해 상당한 콤플렉스가 있는 우리 사회에서는 동일한 사물의 이름을 외국어로 바꾸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기호적 효과를 만들 수 있다. 그것의 쓸모가 무엇인가와는 상관없이 '서양' '현대'라는 이미지만으로도 본래의 쓸모를 충분히 대체할 수 있기 때문이다. (…) 두 번째 공식은 중장년 세대가 아닌 젊은 세대를 타깃으로 삼는 것이다. 우리 시대에서 늘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유행하는 사물의 이미지는 그것을 누가 사용하는가에 따라 결정적으로 좌우된다. (텀블러, p.2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