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부엉이
사데크 헤다야트 지음, 배수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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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는 마치 나병처럼 고독 속에서 서서히 영혼을 잠식하는 상처가 있다. (P.7)라는 충격적인, 하지만 매혹적인 문장으로 시작하는 <눈먼 부엉이(사데크 헤다야트, 문학과지성사>.   

      

이 첫 문장에 송두리째 마음을 뺏긴 나는, 한 번에 이 소설을 읽어 나갔다. 하지만, 쉽게 읽혀지진 않았다. 소설 전반에 걸쳐, 주인공의 슬픔과 절망, 죽음의 악취가 피어난다. 마치, 장례식장에서 계속 피어나는 향냄새처럼. ‘죽음, 무덤, 고통, 질병, 공포, 창녀, 작가가 계속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단어들은 이 세상의 온갖 슬픔과 좌절을 형상화하고 있다. 때로는 너무 잔혹한 표현이 눈살을 찌푸리게도 한다.

      

필통에 그림을 그리는 화가인 주인공은 자기 자신 안에 갇힌, 철저히 고립된 존재로 그려져 있다. 소설에 묘사된 그의 모습은 꿈과 현실을 오가고, 과거와 현재를 오간다.나는 마치 꿈속에서 이게 꿈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상태로 어서 깨어나기를 원하지만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그런 느낌이었다(P.28). 어쩌면 아편에 취한 주인공이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리라.

      

짧지만, 몽환적이고 계속 반복되는 이야기 구조 탓에 나 역시 이 소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마치 플롯이 엄청 조밀하게 짜여 있는 영화를 보는 것처럼, ‘이 인물이 누구를 지칭하는 것이지?’ 라는 질문을 계속 해야만 했다. 하지만, 이 책을 (무사히) 다 읽고 나서, 이 책의 줄거리를 제대로 이해하고 읊는 것은 무의미함을 깨달았다.

      

<눈먼 부엉이>의 주인공(이름도 없다)은 작가 사데크 헤다야트의 자아였다. 작가는 이란의 대표적인 작가로 페르시아 문학에서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우리에겐 낯선 이름이다.

      

헤다야트는 자신이 직접 남긴 기록을 통해 자신을 이렇게 소개한다. 내 삶에는 그 어떤 눈에 띄는 점도 존재하지 않는다. 특별한 사건을 전혀 일어나지 않으며 흥미로운 요소라고는 어느 구석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높은 지위에 있는 것도 아니며 확실한 학위를 가진 것도 아니다. 학교에서는 늘 성적이 좋지 않은 학생이었고 항상 패배하는 쪽이었다. 일하는 직장에서도 이름 없는 하급 직원에 불과했으며 상사들에게는 불만의 대상이었다. 나를 위해 울어주는 사람도 하나 없었다. 한마디로 나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쉽게 잊히고 마는, 그런 인간이었다.”(p.178, 옮긴이의 말)

      

무력함을 이야기하고 있는 헤다야트. 그는 작가의 예술적 성향을 지지하지 않는 고국의 정치적 현실에 깊이 실망한다. 그는 페르시아 문학을 서구적 형태로 발전시킬 꿈을 갖고 있었지만, 시대는 그의 꿈에 부응하기에 아직 많이 낙후되어 있던 것이다(p.180). 결국. 19514, 체류 비자 연장을 거부당한 뒤, 파리에서 가스를 틀어놓고 자살한다 

      

헤다야트 삶의 팔할이었던 슬픔과 좌절, 무력함이 <눈먼 부엉이> 전반에 걸쳐 흐른다. 하지만, 작가는 단순히 자신의 우울한 모습만을 담진 않았다.

      

'무정하고 냉혹하게 삶은 모든 인간의 얼굴에서 가면을 벗겨버린다. 인간은 누구나 가면을 뒤집어쓴 채 살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시간이 흐를수록 가면은 당연히 더러워지고 주름이 생기지만, 그래도 대부분의 인간은 계속해서 그것을 쓰고 다닌다.(p.136)'   

  

작가는 가면을 대부분의 인간이 쓰고 다닌다고 표현한다. 이 책은 1900년대 초반(1937)에 써졌지만, 지금 이 시대와도 잘 부합된다. 자신을 감추기 위해, 그리고 점점 암울해져 가는 세상을 보지 않기 위해 누구나 가면을 쓰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 가면이 냉혹한 삶에 의해 벗겨질 때, 우리는 얼마나 큰 고통을 맛보게 되는가.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매일 얼굴을 대하면서 함께 어울려 살고 있는 이 인간들과 내가 너무나 다르며, 너무도 멀리 있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또한 동시에, 그들과 내가 외모가 유하하며, 아주 희미하기는 하지만 어쨌든 그들과 연결의 끈을 유지하고 있음도 느낀다(p.94).’

      

어쩌면, 주인공, 아니 작가의 제일 큰 좌절은 이 문장 안에 있지 않을까? 자기가 그토록 혐오하고 구역질나게 했던 타인, 세상이 결국 나의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사실, 그 사실이 더욱 처절한 슬픔이 아니었을까.

주인공에게 슬픔과 고통을 안겨 준 아내(창녀), 노인의 모습이 바로 자기의 모습이었던 것이다.나는 거울 앞으로 가 섰다. 놀라움과 공포에 사로잡힌 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려버리고 말았다. 거울 속의 나는 바로 고물상 노인처럼 보였다(p.171).’

      

이처럼 이 책의 여러 문장에서 현실에 대한 명징한 비판과 죽음에 대한 깊은 성찰을 볼 수 있다. 한편, 소설가 배수아씨의 번역은, 번역했다고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수려하고, 깔끔하다. 그녀의 멋진 번역 덕에 읽는 맛이 더했다. 역시 번역이 중요함을 새삼 깨닫는다 

 

너무 염세적인 작가의 세계관이 아쉽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세계관도 다양한 색깔과 생각의 스펙트럼을 넓혀 주는 귀중한 것이리라. 아울러 영미 소설과 일본 소설에 편중되어 있는 우리나라의 문학 시장에도 이같이 다양하고 수준 높은 3세계 문학들이 소개되고, 읽혀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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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화살표 방향으로 걸었다 - 서영은 산티아고 순례기
서영은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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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살표는 지금 여기 있다>

- 노란 화살표 방향으로 걸었다(서영은/문학동네)를 읽고

 

 

나는 소설가로서 적지 않은 소설들을 발표해왔다. 하지만, 이 책은 이전에 내가 출간한 어떤 책하고도 같지 아니하다. <p.400 작가의 말>

 

이 책은 작가 서영은의 산티아고 순례기이다. 이상문학상까지 탔을 정도로, 한국의 대표적인 소설가라 할 수 있는 서영은. 우리 문단의 거장 김동리의 세 번째 아내이기도 한 그녀가 홀연히 문단을 떠나, 생의 자리를 떠나 순례길에 오르게 된다. 이 책은 순례길을 떠나는 작가의 마음과 순례길의 고된 여정을 가감 없이 보여 준다.

 

처음에는 관찰자의 시점으로 작가를 따라갔다. 아니, 부러운 시선도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산티아고라고? . 스페인! 좋은 곳이지. 역시 소설가는 뭔가 달라!’ 부러움과 동경의 눈빛으로 산티아고를 뒤쫓아 갔다. 하지만, 순례길에 접어들 때부터 유명한 소설가인 서영은의 모습은 거기 없었다. 단지, 지팡이를 짚은 남루한 이의 모습뿐이었다. 끼니와 날씨를 걱정하고, 좀 괜찮은 알베르게(숙소)를 찾고, 어떤 짐을 버려야 할지 숙고하는 순례자.

 

무엇을 버릴까.... 마치 인생의 중요한 결단을 내릴 때만큼 진지해진다. p.124

 

이런 고민은 현대 문명의 촉수가 뻗치는 평소의 생활에선 여간해선 하기 힘든 것이다. 이런 고민들을 양식 삼아, 주위의 자연을 벗 삼아 순례자는 꾸역꾸역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어떤 곁눈질도, 사치, 호사도 여기엔 끼어들 틈 없다.

 

조금씩 책을 읽으며, 나도 순례의 길에 동참하는 기분이었다. 어느 순간, 관찰자에서 참여자의 시선으로 순례자를 따라 갔다. 순례자가 힘든 상황에 처하면, 나 역시 동일한 상황에 맞닥트린 듯 주저하였고, 어려움 이후 회복의 노래를 부를 때면, 나도 모르게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그가 동반자(치타)와 심하게 다툴 때면, 마치 치타가 옆에 있는 듯 치를 떨었으며, 화해했을 때는 치타를 이해하는 듯한 동정의 눈빛도 건넸다. 한편, 그가 경험한 분명한 영적 현현(顯現) 앞에선 지금 내가 책을 읽는 이 곳’-전철, 사무실-이 거룩한 곳이 될 수 있음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천신만고 끝에 순례자는, 그리고 나는 순례지의 끝, 산티아고에 도착한다. ‘그곳엔 어떤 신세계가 펼쳐져 있을까?’ 호흡을 가다듬고, 책장을 넘겼다. 그 곳의 모습은 이러했다.

 

산티아고라는 도시는 가까워질수록 길이 소란스러워지고 세속화되는 느낌을 준다. (p.345)

 

심지어는 자기 팀을 뒤쫓던 사람이 서로 반대 방향에서 오는 다른 사람과 몸을 부딪치고 나서 미안합니다하면서도 자기 가는 방향만 볼 뿐 상대를 쳐다보지 않고 지나간다. 서로가 서로에게 방해가 되는 것조차 관심을 두지 않는다. 참으로 기이한 광경이었다. (p.363)

 

참 아이러니하다. 아니, 그 힘들었던 순례의 열매는 달콤해야지 않나? 보물섬은 아니더라도, 의미 있는 한 가지 보물은 발견해야 옳지 않은가? 하지만, 순례자는 이 글로 순례를 마무리한다.

 

산티아고는 내게 순례의 종착지가 아니다. 산티아고는 내게 새로운 차원을 열어주는 문이자 또 다른 화살표이다. p.367

 

어쩌면 작가의 이 말 속에 책을 관통하는 주제가 보이는 듯했다. 순례자에게 있어 종착지 산티아고는 더 이상 성지(聖地)가 아니었다. 오히려 산티아고를 찾아가는 길 그 자체가 성지였다. 더 확장하자면, 내가 지금 발을 딛고 있는, 이곳이 성지인 것이다.

 

그 순간, 순례자에게 향했던 시선은 이제 나를 돌아본다. 그동안 아름다운 산티아고를 동경하며, 얼마나 많은 작은 산티아고들을 지나쳐 왔을까? ‘내일은 새로운 해가 뜰 거야’, ‘내년엔 분명 새로운 길이 열릴 거야라는 주문을 외우며, 지금 만나는 사람들에겐 얼마나 각박했었나? 막연한 이상향을 꿈꾸며, 나태함과 불평을 옷 입고 살아가고 있었다. 문득 한 시인의 시어도 떠오른다. ‘더 열심히 그 순간을 / 사랑할 것을... // 모든 순간이 다아 / 꽃봉오리인 것을. / 내 열심에 따라 피어날 / 꽃봉오리인 것을!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정현종>

 

그러고 보니, 순례 내내 순례자와 삐걱 대며, 어디로 튈지 가늠치 못할 치타의 모습도 낯설지 않았다. ‘저 사람은 왜 저래? 나 같으면 아예 혼자 다니겠다며 혀를 쯧쯧 차며, 내가 마구 손가락질해댔던 치타. 그런데, 치타의 그런 모습이 어쩌면 내 모습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맞아! 나도 저런 적이 있었지. 혼자 편하려 했던 적도 많았었지.’ 그의 모습이 나와 겹쳐졌다.

 

순례자는 그런 치타와 함께 끝까지 순례를 한다. 순례를 거의 마칠 무렵, 순례자는 치타를 향한 눈빛을 바꾼다.

 

내 안에서 치타와 서로 다른 길을 걸어왔다고 생각했던 것도 나의 도그마였다. 그 도그마는 겸손과 부끄러움으로 위장한 나의 교만이었다. (p.374)

 

순례자의 이 말이 내게 위로를 준다. 순례자와 치타는 결국 같은 순례자였고, 나 역시 같은 길을 걸어가는 순례자라는 사실, 그 사실이 위로와 함께 인생 여정의 동반자를 만난 듯한 반가움을 주었다.

 

'걷거나 탈것을 타고 어느 곳으로 가는 노정(路程).’ 이것은 의 여러 정의중 하나이다. 그동안 길 너머에서 화살표를 찾기에 급급했었다. 그렇기에 잘 보이지 않았고, 찾았어도 이건 아닐 꺼야하며 무시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순례자와 함께 순례의 여정을마친 지금, 화살표가 갑자기 여기저기서 보이기 시작한다. 길거리를 수놓은 아름다운 눈꽃, 군고구마를 파는 상인의 따스한 모습, 고마움을 표현하지 못했던 가족, 부담으로만 다가왔던 업무.... 오늘은 또 어떤 화살표가 나를 인도할까? 화살표는 바로 지금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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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봤어 - 김려령 장편소설
김려령 지음 / 창비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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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기묘한 소설이다. TV 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의 미해결 살인 사건을 연상시킨다. <사랑과 전쟁>에 단골로 나오는 위험한 연애사 같기도 하다. 시사 프로에 나옴직한 약육강식 사회에 대한 비판도 보인다. 화룡정점은 '심령물'도 있다는 것. 심령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가슴속까지 오싹해지는 심령물. 이 다양한 장르의 내용이 짧은(200p) 한 권의 책에 담겨 있다니….

'막장 드라마'적인 요소들이 마구 뒤범벅된 정체불명의 요리를 작가가 들고 왔다. 이 요리 앞에 독자들은 허를 찔린 듯 멈칫한다. 마치 작품 속 인물 '영재'가 만든 형편없이 맛없는 음식처럼 보인다.

그런데 어쩌지? 이거 새로운 맛이다. 이전에 못 보던 맛이다. 비록 요리의 비주얼은 좀 그래 보여도, 들어간 재료는 과해 보여도 그 맛은 괜찮다. 맛있고 잊히지 않는다. 오래 잔상이 남는다. 이 책은 내게 그랬다. <너를 봤어>

'사랑'을 봤어!

이 책이 궁극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의외로(?) '사랑'이다.

어느 언어 천재가 조어 하나 만들었으면 싶을 정도로 진부한 저 사랑이라는 말이 내 글로 들어왔다. 때로는 터무니없고 미련하고 살벌한 사랑마저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수많은 당신을 죽이며 갈망했던 것이 결국 사랑이었나보다. 지리멸렬한 삶일지라도 끝내 버릴 수 없는, 그러면 안되는 사랑, 그것으로 이제 독자를 만난다. (p.203, 작가의 말 중에서)

주인공 '수현'은 문학계에서 좀 알아주는 소설가이자, 베테랑 편집자이다. '영재'는 이제 막 문학계에 발을 디뎠다. 전도유망한 신예이기도 하다. '도하'는 수현의 후배 작가로 이 셋은 잘 붙어 다니며, 문학과 삶의 이야기를 나눈다.

이 중심인물 곁에 수현의 가족들과 여러 문학계 인사들이 있다. 수현의 가족은 온전한 모습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실패한 인물들의 전범, 표본이겠다. 자식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던 아버지는 결국 폭력이 부메랑 되어 죽음의 강물로 이끌린다. 아버지의 폭력을 이어받아 폭력을 행사하던 형 역시, 폭력으로 죽음의 강물을 건넌다. 과거의 불미스러운 일을 갖고 있는 어머니 역시 현재의 쓸쓸한 강을 건너고 있다. 당최 속을 알 수 없던, 타인에게 좋은 평을 듣지 못했던 아내도 스스로 자신을 죽음에 내던진다. 이런 가정사는 수현의 삶을 짓눌러 온다. 조금이라도 방심할 수 없는 문학계, 편집계의 탁한 공기 역시 수현을 목 죄어 온다. 결국 수현이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일까? 결국 '사랑'뿐이었을 게다.   

사랑은 잘 놀고 있는 고무줄 끊고 도망가는 게 아니라, 무거운 쓰레기통을 살짝 들어주는 거거든. 좋아하는 건지 싫어하는 건지 헛갈리게 굴지 않는다고. 고무줄 끊는 건 진짜 나쁜 놈도 하잖아. 사랑은 앞뒤 잴 것 없이 명확한 거야. (p.117)

하지만, 이 사랑의 모습이 우리가 흔히 생각하고, 상상하는 그런 종류와 모습의 사랑은 아니었다. 지고지순하고 아름다운 장밋빛 같은 그런 사랑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사회에서 통용하지 않는, '결혼 밖의 사랑'이었고, 심지어 '폭력으로 이어지는 사랑'이었다. '도덕'의 잣대로만 이 작품을 비추어 보자면, '쓰레기'소설과 다름없다. '사랑'과 '폭력'이 어떻게 동전의 양면이란 말인가?

그런 명확한 의문이 존재하기에 이 작품을 제대로 해석하는 데는 또 다른 프리즘이 필요하다. '시점'의 변화, 관찰자가 아닌 '참여자'의 시점 말이다.

작품속 문학계 인사들처럼 멀리 떨어져서 관찰하는 것이 아닌, 한잔 술을 걸치며 쉬고 있는 수현 바로 옆에서 그를 지켜본다면 그의 사랑이 조금이나마 이해된다. 영재와 도하의 눈을 가진다면 더 정확하겠다. 완전 비틀린 가정에서 자라난, 갑갑한 갑과 을의 사회에서 버텨온 그에게 이 '사랑'이라는 것. 이놈은 최소한의 숨 쉴 구멍이지 않았을까.   

수현의 이런 사랑에 결국 영채도 비합리적으로 반응한다.

사랑은 매우 비합리적인 감정이었어. 대책 없이 몸과 마음이 막 달려가는 미친 현상이야. 이거다 하고 정의할 수 없는 게 사랑이더라고. (p.193)

이 소설은 이제 어떻게 전개될까? "둘은 사랑에 빠져 결혼했고, 문학계의 아름다운 커플이 되었고, 많은 독자와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었더라"라고 끝나면 좋으련만. 이 작품은 끝까지 독자들의 기대를 배반한다. 일반 드라마 공식을 따르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소설의 표현대로 하자면, 수현은 카론의 배를 타고, 스틱스강을 건넌다. 끝까지 막장드라마 공식이다. 평이하게 소설을 마무리하면 되지 '왜' 죽여? "왜?"라는 질문이 자연스레 따라온다.

'영재를 지키기 위해서였겠지'라는 어정쩡한 대답을 나름 내리고, 마저 책을 읽어 갔다. 영재와 도하가 수현과 같이 작업해 온 책을 저 세상의 수현에게 소개한다. 그 책의 제목 역시 <너를 봤어>. 숨 가쁘게 읽어온 이 소설을 겨우 닫는다. 휴~ 내 안에 묵혀 왔던 깊은 한숨이 비로소 터져 나왔다.

'문장'을 봤어!

이 정체불명의 소설을 쓴 이는 김려령이다. 성장 소설의 전범인 <완득이>를 쓴 사람, 김려령이 이런 작품을 쓰다니. 우리가 알고 있던 김려령은 주로 청소년 소설을 써 오지 않았나. 놀랍다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명배우는 어떤 역할을 맡든지 그 역할을 자신의 것으로 소화한다더니 김려령의 얘기 아닌가? 어떤 한 장르를 잘 쓰면, 작가는 그 장르에만 전념하기 쉽다. 그러면 그 장르 외에는 부진하기 마련일 터. 김려령은 지혜롭게 그 실수를 비껴 간 듯하다.

또 하나 돋보이는 건 이것이다. 문장력! 다양한 장르의 이야기를 한 권에 잘 넣을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그녀의 문장력이 아닐까? 그중에서도 더 칭찬할 것은  '단문'의 올바른 사용이다. 마치 권투의 잽을 치듯이 독자들의 허를 마구마구 찔러 온다. 잘 벼려진 문장의 매서움을 제대로 맛보았다. 많은 대화 장면에도 이 단문은 유용했다.

혹여 단문이라 무게가 떨어진다 생각할 수 있지만, 오산이다. 잠언처럼 곱씹을 수 있는 명문(名文)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 마치 보석처럼 박혀 있어 "나를 좀 읽어 줘요"라며 빛을 낸다. 독자들은 보석들을 캐내며 희열을 발견한다. 그것이 이 책이 주는 덤이다.

-나는 공소시효라는 게 참 그래요. 그동안 안 잡히고 버텼어? 대단한 놈이구나. 집에 가라! 죽은 사람의 원한이 풀리지 않으면 억년이 흘러도 진행 중인 거예요. (p.113)

-아내는 어떤 외상으로 거짓말이 습관화된 게 아니라 그것을 태초의 언어로 가지고 태어난 사람 같았다고. (p.151)

-몸에 오한이 일었다. 습하고 더운 밤, 나는 추웠다. (p.169)

-어머니와 나의 세상은 무서운 게 아니라 무거운 것이었다. (p.186)

성과 폭력 수위 높은 미국드라마에 어울림직한 소재를 잘 버물려서 작가는 기어코 '사랑'이라는 단어를 수면 위에 올려놓았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그 단어를 발견하기 힘들다. 아무도 찾지 않는 저수지에 이리저리 뒤엉켜진 폭력, 죽음, 간음의 쓰레기만 보일 뿐. 하지만, 그 사랑이라는 조각을 찾는다면, 비로소 이 작품의 진가를 발견한 것이다.

아내의 죽음 앞에서 차분히 '사랑'을 읊조리는 수현, 그의 말이 처연하다.

목숨으로 흥정하는 사랑은 죽어서도 그것을 얻지 못한다. 사랑은 흥정이 아닌 삶의 모습으로 얻는 것이다. (p.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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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 놀이가 먼 훗날 역사가 된단다 - 한국 민속학의 개척자, 월산 임동권 샘터 솔방울 인물 14
남찬숙 지음, 최지은 그림 / 샘터사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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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민속학의 개척자, 월산 임동권

오늘 우리 놀이가 먼 훗날 역사가 된단다(남찬숙 글, 최지은 그림 / 샘터)읽고

 

요즘 아이들은 무엇으로 즐거움을 얻을까? 대부분이 인터넷과 스마트폰으로 즐거워하고, 많은 시간을 보낸다. 예전에는 어땠을까? 그 스마트한 기기들이 아닌 책이었다. 책을 보며 즐거운 한때를 보내며, 상상력을 키우곤 했다.

 

종류도 다양했다. 동화책부터 자연, 전래동화 등의 다채로운 책들이 아이들을 상상의 나라로 초대했다. 그중, 위인전을 빼놓을 수는 없었다. 이순신을 책을 통해 만나고, 책에서 소개하는 세종대왕, 김구, 황희 등을 만나 보며, ‘나도 저런 사람이 되어야 겠다는 푸르른 꿈을 꾸어 갔다.

 

여기, 낯설지만 꼭 알아야 할 사람이 있다. 바로 한국 민속학의 개척자라 말할 수 있는 월산 임동권 선생. <오늘 우리 놀이가 먼 훗날 역사가 된단다>라는 책은 임동권 선생의 일대기이다. 특히, 동화작가 남찬숙의 쉬운 대화체의 글과 일러스트레이터 최지은의 따뜻한 그림은 어린이뿐 아니라, 어른들도 쉽게 다가가게 한다.

 

 

지금은 민속학이 낯익고, 많은 대학과 단체에서 연구하고 있다. 그렇지만, 불과 3~40년 전만 해도 민속학이라는 단어조차 없었고, 그것을 연구하는 사람은 거의 전무했다. 그런 민속학을 당당한 학문으로 발전시키고, 우리나라 최초로 대학에 민속학과를 만든 이가 임동권 선생이다.

 

임동권 선생의 노력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냥 지방의 한 놀이로만 여겼던 강강술래은산 별신제’, 그리고 강릉 단오제를 문화재로 지정한 것에도 그의 힘이 컸다. 강강술래와 강릉 단오제는 이후, 유네스코 세계 무형 문화유산으로까지 등재되어 그의 혜안을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쇠고 있는 구정’, 그 설을 다시 공휴일로 지정하게 된 것도 임동권 선생의 땀흘린 노력의 결과였다. 그는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우리 민요들을 찾아서, 그 지방에까지 가서 힘들게 녹음하기도 했다. 그의 노력이 없었다면 아름다운 우리 민요들은 이미 다 사장되어 버렸을 것이다.

 

 

노년에 임 선생은 평생 연구해 온 자료들과 책들을 후손들을 위해 기증한다. 우리 민속, 민요에 대한 그의 애정을 짐작할 수 있다. 그의 후배 민속학자들에 대한 당부이다.

 

서구 사람들은 오랜 시간에 걸쳐 변화를 겪었기 때문에 자기네 것을 잘 정리했어요. 그러나 우리는 일본이 와서 덮치고, 뒤이어 급속한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남겨 두고 기록할 여유도 없이 다 버려졌습니다. 그래서 지속적인 민속학 연구가 필요한 거예요. p.132

 

우리 전통의 중요성이 더욱 대두되는 요즘이다. 우리 것을 지키고 계승시키기 위해 애쓴 임동권 선생 같은 분들의 노력과 애정이 더욱 빛나 보인다.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임동권 선생을 많은 이에게 알리고 있는 이 책이 반갑다. 초등학교 교과서 속의 중요한 민속학의 내용들도 책 중간중간에서 만날 수 있어 좋은 정보가 된다. 그것이 이 책이 주는 또 하나의 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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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서둘러라 - 샘터와 함께하는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김재순 지음 / 샘터사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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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 숙성된 글을 읽고 싶다면

<천천히 서둘러라(김재순 / 샘터)>를 읽고

 

대형서점, 그달의 잡지들이 쭉 널려 있는 코너에서 잡지 뒷면을 자세히 본 적 있는가? 대개 잡지를 선택하는 기준은 내용과 함께, 화려한 앞면인 경우가 많다. 뒷면은 광고나 간단한 잡지 홍보문구로 고정되기 마련. 그렇기에 잡지 뒷면을 살펴보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하지만, 뒷면을 찬찬히 살펴보아야 하는 잡지가 있다. 바로 <샘터>.

 

43년간 샘터 뒷면에는 뒤표지글이 실린다. 그 달에 맞는, 그 당시 정세를 담은 다양하고도 정갈한 글이다. 더 놀라운 것은 그것을 한 사람이 쭉 써 왔다는 것. 바로 샘터의 창간자 우암 김재순 선생의 솜씨다.

 

 

 

김재순 선생의 뒤표지글을 모은 책이 이번에 샘터에서 출간되었다. 천천히 서둘러라. 제목부터가 심상치 않다. ‘천천히서두르다는 결코 같이 쓸 수 없는 단어 아닌가. 쭉 읽어가다 보면, ‘천천히 서둘러라라는 제목의 의미를 발견할수 있을 것이다. 빼곡히 담긴 주옥같은 65편의 글, 이 글들은 한 번에 쉽게 읽어 내려갈 수도 있지만, 나중에 그 의미를 곱씹어 가면서 되새김질해야만 하는 깊이 숙성된 종류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천천히 읽어야 하고, 서둘러 읽어야 하는 책이다.

 

무엇보다 이 책의 장점은 깊이 묵상해 봄직한 이라 할 것이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으로 점차 짧고, 경박해진 글이 생산되기 쉽다. 그 속에서 김재순 선생의 글은 한두 번 읽을 때와 나중에 다시 읽어볼 때의 느낌이 확연히 달라지는, 더 깊어지는 맛이 있다. 시간이 갈수록 더욱 진해지는 장맛으로 굳이 비교를 할 수 있겠다. 명문(名文)을 몇 문장 살펴보자.

 

-어린아이를 키우는 데 있어 애정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좋은 말, 좋은 버릇을 익히게 해야 한다. p.35

 

-젊음은 아름답지만, 젊음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습니다. 인생무상(人生無常)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조용히 감수하는 것, 이런 태도가 인간을 강하게 만듭니다. p.73

 

-친구를 갖는다는 것은 또 하나의 인생을 갖는 것이다. p.92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마음속으로 알고 있으면서도 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게으름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리라. p.94

 

-어린이의 마음은 흐르는 강물과 같아서 이쪽저쪽으로 쉽게 방향이 달라진다. p.212

 

 

김재순 선생은 이외에도 위인들의 명언을 군데군데 잘 인용했다. 그 명언으로 인해 글이 더욱 풍성해지고, 단단해질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스티브 잡스를 기리며>, <철의 여인 서거>, <새 대통령 탄생에 부쳐> 등 국내외의 주요 뉴스의 단상을 기록한 글들도 눈에 뜨인다. 이런 글은 자체로 역사가 되어 나중에 후손들이 뉴스를 바라볼 때, 생각해 볼 수 있는 작은 단초들이 될 것이다.

 

43년 전, 첫 뒤표지글을 정성스럽게 썼을 김재순 선생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 글이 40여 년 이어져 이렇게 아름다운 모음집이 탄생되리라고 누가 생각할 수 있었을까?

 

뜬 눈으로 현실(現實)을 보고, 감은 눈으로는 이상(理想)을 보라.” 월간 <샘터> 창간 때 장리욱 박사가 김재순 선생에게 준 글월이란다. 이 글을 평생 간직했던 김재순 선생의 통찰력 있는 글이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지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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