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아메리카의 비극 상.하 세트 - 전2권 ㅣ 을유세계문학전집
시어도어 드라이저 지음, 김욱동 옮김 / 을유문화사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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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도어 드라이저는 1890년대에 찰스 다윈과 허버트 스펜서, 존 틴들과 토머스 헉슬리의 철학서를 읽기 시작했다. 드라이저는 인간의 행동을 화학이나 물리학의 관점에서 설명하는 이론을 믿고 그것을 '케미즘'이라고 불렀다. 작가의 이런 생각은 《시스터 캐리》(1900) 에서 이미 잘 드러난다."

《아메리카의 비극_상》P.53 각주 중.

시어도어 드라이저의 문학 철학을 관통하는 '케미즘'은 인간의 모든 감정, 욕망, 행동, 윤리적 선택이 영혼이나 고결한 자유의지가 아니라 몸 내부의 생물학적·화학적 작용과 외부 환경의 자극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는 극단적인 결정론이자 자연주의적 시각이라고 한다. 뭔가 사이비 같지만... 여튼 드라이저는 인간을 정교한 생물학적 기계이자 유기체로 바라보았다. 남녀 간의 강렬한 끌림, 부와 명예에 대한 지독한 갈망, 순간적인 범죄 충동 같은 현상은 도덕적 선택의 결과가 아니라 거부할 수 없는 화학적 끌림과 반응의 결과물이었고, 도덕, 종교, 윤리, 법률 같은 사회적 규범은 원초적 본능과 화학 작용을 정당화하거나 포장하기 위한 허울 좋은 겉치레에 불과하다고 보았단다.

이런 시각으로 읽으면 《시스터 캐리》에서 시골 출신의 캐리가 대도시의 물질적 화려함에 이끌려 가는 과정이나, 《아메리카의 비극》에서 클라이드 그리피스가 신분 상승의 욕망과 성적 충동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다 비극적인 사건에 휘말려 파멸하는 서사는, 인물들이 악해서라기보다 사회적 톱니바퀴와 내부의 화학적 충동에 밀려 자연스럽게 이끌려 간 결과라는, 말하자면 자기 합리화 같은 소리가 된다. 클라이드의 죄가 어디까지인지조차 모호하게 그려진다는 점이 오히려 이 해석에 힘을 싣는다.

당연하게도 이 사상은 당대는 물론 현대에 이르기까지 깊은 윤리적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인간의 모든 행동을 화학 반응으로 환원하면 살인이나 아동 학대 같은 극악무도한 범죄마저 "뇌와 몸속의 화학 작용 때문일 뿐"이라며 책임을 회피하고 면죄부를 주는, 지극히 무책임하고 위험한 사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은 분노, 성욕, 탐욕, 이기심 같은 원초적 충동이 밤낮으로 치밀어 올라도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를 억제하며 살아간다. 인간을 그저 자극에 반응하는 약한 기계로 규정하는 것은 그 인내와 도덕적 노력을 무시하는 처사라는 지적을 아니할 수 없다. 자극을 받자마자 본능대로 지체 없이 반응하는 것을 우리는 짐승이라 부르고ㅋ 자극과 행동 사이에 이성과 도덕이라는 브레이크를 걸어 멈춰 서고 참아내는 선택의 공간을 만드는 것이야말로 인간을 짐승과 구분 짓는 존엄성이기 때문이다. 물론 철저한 결정론자라면 그 브레이크마저 화학 작용이라고 맞받겠지만, 그 브레이크가 실제로 작동한다는 사실은 여전히 남는다.

그러나 드라이저의 시선이 책임 회피를 정당화하는 데 있었다기보다는, '개인의 노력과 도덕적 의지만 있다면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다'는 당시 미국 사회의 위선적인 아메리칸드림과 청교도적 도덕주의를 폭로하는 데 있었다는 속사정을 알고 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사회 시스템과 자본주의의 압박 앞에서 개인이 아무리 도덕적 의지를 다져봤자 물질적 자극과 본능 앞에서 얼마나 맥없이 무너질 수 있는지를 보여줌으로써, 개인에게만 도덕적 십자가를 지우고 정작 그를 비극으로 몰아넣은 환경과 본능의 힘은 모른 척하는 사회야말로 진정 무책임한 것 아니냐고 냉소적으로 되물은 것은 아닐까.

게다가 역설적이게도 이 건조한 인간관은 그의 소설을 그 어떤 문학보다 강력하게 빨아들이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작가는 섣불리 도덕적 교훈을 주려 하거나 선악의 잣대로 인물들을 심판하지 않고, 대도시라는 무대 위에서 인간의 속물근성과 솔직한 욕망이 어떻게 타오르고 무너져 내리는지를 생태 다큐멘터리처럼 날것 그대로 세밀하게 스케치한다. 그래서 내가 차마 밖으로 꺼내지 못했던 인간 본연의 약함과 욕망을 목격하며 깊이 빠져들게 된다. 드라이저는 인간을 본능과 환경에 휘둘리는 무력한 존재로 바라보았지만, 그 약한 존재들이 헛된 꿈을 꾸고 갈망하다 현실의 벽에 부딪혀 파멸해 가는 과정만큼은 그 누구보다 뜨겁고 정교하게 그려냈다. 건조한 눈으로 이렇게 뜨거운 이야기를 써낸 셈이다. 나는 이 소설에서 그 정점을 맛봤다고 할 수 있겠다.

소설은 마치 이래야 한다는 듯 그냥 재밌다. 그렇다. 마치 소설은 이런 것이라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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