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모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96
세사르 아이라 지음, 권미선 옮김 / 민음사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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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사르 아이라의 <바라모>는 “체계적으로 준비된 삶 따위는 한 순간의 엉뚱한 아수라장 앞에서 아무 힘도 못 쓴다”는 진리를, 시크하고 뻔뻔할 정도의 쿨함으로 입증해 보이는 아방한 코미디이자 철학적인 잔혹극이다. 


1923년 파나마시티, 오늘의 불운아 바라모는 시인이나 예술가는커녕 세상에서 가장 영혼 없는 얼굴로 서류나 철할 것 같은 소심한 하급 공무원이다. 그런 그의 평온하고 지루한 일상에 대형 엿 같은 사건이 터지니, 바로 나라에서 준 한 달 치 월급 봉투 속 돈이 위조지폐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억울함에 분통을 터뜨리기는커녕, 이거 잘못 쓰다가 거대한 비리 음모에 휘말려 철창신세를 지는 건 아닐까..하는 새가슴 특유의 패닉에 빠진 바라모는 그 가짜 돈을 버리지도, 쓰지도 못한 채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축축한 밤거리로 나선다. 그리고 바로 이 황당한 공포가 그를 기이함이 폭발하는 밤의 세계로 떠밀어 버린다. 그날 밤 파나마의 골목길은 정상적인 이성이 마비된 미친 자들의 정모 장소 같다. 바라모는 도무지 앞뒤가 안 맞는 이상한 인물들과 부딪히며, 박제된 골프공의 철학적 가치에 대한 쓸데없이 진지한 대화부터, 마당이 사막으로 변해간다는 해괴망측한 이론까지 들어줘야 하는 서스펜스를 겪는다.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정신과 상담을 예약해야 할 것 같은 이 어처구니없는 우연의 연속 속에서 바라모는 멘탈이 털릴 대로 털린 채 날이 밝아서야 겨우 집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여기서 골 때림 시작... 날이 새고 피곤에 지친 바라모가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펜을 잡더니, 평생 시 한 줄 안 써본 손으로 순식간에 시 한 편을 갈겨쓴 것이다. 그리고 더 웃긴 건, 단 몇 시간 만에 얼렁뚱땅 쓰인 이 시가 훗날 중앙아메리카 현대 시학의 사조를 새로 쓰는 위대한 걸작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현실적인 개연성을 따진다면 꺼지라 하겠지만,,, 세사르 아이라의 문학판에서는 이게 바로 가장 완벽하고 쿨한 예술의 탄생 공식인가! 작가는 계획을 세우거나 머리를 쥐어짜며 글을 다듬는 고상한 예술가 흉내를 비웃는다. 그에게 예술이란 고통스러운 고뇌의 산물이 아니라, 재수 없는 사건과 엉뚱한 우연들이 충돌하면서 멘탈에 균열이 생길 때 픽 하고 터져 나오는 불꽃놀이에 가까운 듯하다.


바라모가 쓴 시가 희대의 걸작이 된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그가 그 뒤로 깔끔하게 펜을 꺾고 다시는 시를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끈질기게 다듬지 않고 단 한 번의 해프닝으로 전설이 되어 사라진 이 일회성이야말로 초현실주의자들이 그토록 원하던 무의식의 한 판 승부이자 거대한 낭만이다. 한편 소설 속 ‘위조지폐’는 문학 그 자체를 비웃는 영리한 메타포로, 종이 쪼가리에 불과한 가짜 돈이 진짜인 척 유통되는 순간 사람들을 패닉에 빠뜨리고 사건을 만들어내듯, 문학 역시 100% 픽션에 불과하지만 현실에 침투해 사람들의 머리통을 깨우는 진짜 힘을 발휘한다. 게다가 평범한 소시민이 밤새 겪은 황당한 헛소동을 가리켜 후대의 비평가들이 “현대 시학의 분기점”이라며 엄근진하게 숭배하는 모습은, 우리가 거창하게 신봉하는 ‘위대한 예술’이라는 타이틀조차 세상이 만든 정교한 위조지폐일 수 있음을 시크한 유머로 꼬집는다. 


결국 <바라모>는 삶을 굳이 치밀하게 계획하거나 의미를 부여하려 애쓸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삶이 건네는 뜻밖의 엿과 황당한 우연을 경쾌하게 받아칠 때, 일상의 지루한 틀 뒤에 숨어 있던 진짜 예술적 순간이 툭 하고 터져 나오기 때문이다. 애 쓰지 말쟈. 위조지폐를 쥐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밤거리로 내몰린 바라모의 심정 그대로 케세라 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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