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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나날
제임스 설터 지음, 박상미 옮김 / 마음산책 / 2026년 8월
평점 :
제임스 설터의 <가벼운 나날>은 한마디로 인스타그램 감성 샷 100장 뒤에 숨겨진 씁쓸한 현실 부부의 종말을 극도로 고급스럽게 그려낸 소설이다. 1960년대 뉴욕 근교, 허드슨 강이 한눈에 보이는 대저택에서 완벽한 비주얼을 자랑하는 비리와 네드라 부부가 등장한다. 남편은 잘나가는 건축가에 아내는 지성과 미모를 겸비한 홈파티의 여왕, 여기에 토끼 같은 두 딸까지 있으니 그야말로 리얼리티 쇼 인생 성공 편 그 자체다. 이들은 매일 밤 분위기 있는 조명 아래 고급 와인을 기울이고 예술을 논하며 완벽한 갓생을 사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필터 빼고 쌩얼로 마주한 이들의 속사정은 참으로 퀴퀴하다. 폭발적인 외도나 막장 드라마급 도자기 파괴 쇼가 터지는 건 아니다. 그저 월요일 아침 출근길처럼 조용하고 무기력하게 권태가 밀려올 뿐이다. "너를 미워하진 않지만, 너랑 있는 내가 너무 지루해"라는 심정으로 각자 몰래 딴짓을 좀 하다가, 결국 "우리 각자 길 가자"라며 아주 우아하고 젠틀하게 갈라선다. 극적인 싸움 하나 없이 물 흐르듯 가정이 파탄 나는 과정이 어찌나 자연스러운지, 읽다 보면 어? 이렇게 스무스하게 망한다고? 싶은 지경이다. 이혼 후 네드라와 비리는 각기 다른 길을 걸으며 늙어가고, 한때 그토록 눈부시게 빛나던 허드슨 강가의 집과 가족이라는 울타리는 오직 과거의 아련한 기억으로만 남게 된다. 제임스 설터의 문체는 매우 시각적이고 시적이어서, 허드슨 강의 빛깔, 계절의 변화, 식탁 위에 놓인 음식의 질감과 공기의 온도까지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묘사된다. 소설은 삶의 비극성을 과장하여 슬퍼하기보다는, 아무리 아름답고 완벽한 순간이라 할지라도 시간이라는 거대한 불가항력 앞에서는 결국 사라질 수밖에 없다는 인생의 무상함을 담담하고 우아한 어조로 말해준다. 삶을 너무 깊이 알고 있는 작가는 세월이 흘러 시들어버린 청춘과 해체된 가정의 쓸쓸함 속에서도, 한때 그들이 나누었던 찬란했던 시간과 빛나던 순간들 그 자체는 결코 부정될 수 없는 가치를 지닌다는 역설적인 아름다움을 전달한다. <가벼운 나날>은 스펙터클한 서사 대신 인간의 내면과 관계의 미세한 균열, 그리고 흘러가는 시간의 자취를 치밀하게 기록한 작품으로, 삶의 찬란함과 상실을 동시에 감상하게 만드는 깊은 울림의 소설이며, 한참을 숨 고르며 읽느라 페이지가 넘어가지 않는 소설. 그렇다. 이 책은 서사를 쫓아가기 위해 책장을 허겁지겁 넘기는 책이 아니라, 문장 하나가 주는 감각에 체해서 한참을 가만히 머물게 만드는 책이다. 빛의 각도나 공기의 결을 묘사한 문장에 턱 막혀서 숨을 고르고, 그 문장을 몇 번이고 다시 읽게 되는 바로 그 경험이야말로 설터가 주는 '읽는 기쁨'의 정수. 다 같이 느껴보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