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에의 강요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김인순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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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명확한 기준도 없이, 다른 대상에 대해 비평을 하는 사람들, 그리고 상황에 따라 너무도 쉽게 자신의 견해를 바꾸는 세태를 풍자한 소설.

다른 사람, 대상에 대해 자기 생각을 표현하는 것은 전적으로 개인의 자유다. 다만, 깊은 사고 없는 비평, 비난은 비판 대상에게 조언을 주는 것이 아니라 충격과 상처를 줄 뿐이다. 무심코 뱉은 말 한마디가 한 사람의 삶을 부정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말이다. 이를 오늘날에 적용해보면, SNS의 공간에서 사실 여부와 출처가 확인되지 않은 많은 유언비어들을 예로 들수 있다. 정확한 사고 없이 페이스북의 좋아요를 누르고, 트위터의 공유를 누르는 것은 직접적으로 비평을 하지는 않지만, 부작용을 증폭시키는데 일조하는 것이다. 비평 그 자체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상대방을 배려하는 신중하고 기준이 있는 비평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당신 작품은 재능이 있고 마음에 와 닿습니다. 그러나 당신에게는 아직 깊이가 부족합니다"


“소박하게 보이는 그녀의 초기 작품들에세 이미 충격적인 분명이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 사명감을 위해 오직 고집스럽게 조합하는 기교에서, 이리저리 비틀고 집요하게 파고듦과 동시에 지극히 감정적인, 분명 헛될 수밖에 없는 자기 자신에 대한 피조물의 반항을 읽을 수 있지 않은가? 숙명적인, 아니 무자비하다고 말하고 싶은 그 깊이에의 강요를?”




승부



기존 일상적인 방법의 체스 법칙을 파괴하고, 파격적인 방법으로 체스를 두는 젊은이와 그를 응원하는 사람들의 짧은 시간에 대한 이야기.

늙은 체크 고수와 파격적인 수를 두는 젊은이의 체스 경기는 단순 체스경기를 넘어서 인생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반영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익숙한 것에 적응하며, 평범함 속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최고라는 인생 선배들의 조언을 따르며 살아간다. 비록, 때로는 일상으로부터의 일탈과 자신이 진정 원하는 꿈을 찾아떠나고 싶지만, 현실에 순응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도전을 찾아 떠난 사람들에 열광하는 것이다. 기존의 방식을 넘어 도전하는 운동선수, 특이한 전술을 구사하는 게이머, 세계여행을 위해 직장을 때려친 사회인 등 평범하지 않은 도전에 열광하며 마음속으로 그들을 응원한다. 왜 우리는 그들에 열광하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본인이 가지 못한 길에 대한 갈망일 것이다. 본인이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질투와 부러움이 타인의 도전을 보며 응원하는 마음으로 바뀌는 것이다. 나를 포험한 많은 이들은 사회가 만들어 놓은 틀안에서 적응해가며, (도전없이 평범하게 살아가길 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진정 가슴떨리는 삶을 살기 위해서라면 파격적인 방법으로 체스를 두는 젊은이처럼, 인생에서 새로운것에 대한 도전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 얼마나 놀라운 수인가! 그 얼마나 놀라운 돌진인가! 구경하는 사람들 중 그렇게 과감하게 말을 움직이는 사람은 없을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대가는 그렇게 하는 법이다. 진정한 대가는 과감하게 모험적으로 그리고 독창적으로 체스를 둔다. 그것이 평범한 체스꾼들과는 전적으로 다른 점이다.


백의 한수는 이성적이었다. 차근차근 정석대로 두어, 진을 뺄 정도로 진부하기 짝이 없었다. 반대로 흑은 한수 한수를 둘 때마다 기적을 일으켰다.


자네라면 할 수 있네. 자네는 기적을 일으킬 수 있어. 우리는 자네를 믿으리. 기적의 마술사 양반, 기적을 일으키기네 기적을 일으켜 승리하게나!






문학적 건망증


나는 문학적 건망증이 있다. 그리고 언제나 궁금하다. “책은 대체 왜 읽어야 하는가? 과연 어떤 책이 나를 변화시켰는가? 지난 1년간 나름 독서를 많이 했다고 생각하는데, 나의 생각, 행동, 삶은 많은 변화가 있었는가? 이런 질문들에 쉽게 대답하지 못하는 것은 뚜렷한 정의가 없을 뿐더러 가시적인 성과를 발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실제로 리뷰를 남기고, 마인드맵으로 정리, 기록 함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책의 내용조차 기억이 나지 않음에 당황스러울 때가 있다. 문학적 성찰이 뛰어난 저자도 나와 비슷한 고민을 했었던것 같다. 왜 책이 필요한지에 대한 끊임없는 고찰. 그것이 그를 성장시킬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짧은 에세이를 읽으며 나는 나의 독서에 대해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고, 나의 삶의 자양분이 될것이라는 믿음을 굳건히 다질 수 있었다. 독서는 돌연한 변화는 아니지만, 천천히 독자에게 용해되어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도 더욱 찬란한 나의 삶을 위해 용해의 시간을 갖는다.



문이 무엇이었더라? 아 그렇지. 어떤 책이 내게 감명을 주고, 인상에 남아 마음 깊이 아로새겨지고, 송두리째 뒤흔들었는지 하는것이었지


지금 책을 한 권 읽으면, 결말에 이르기도 전에 나는 처음을 잊어버린다. 때로는 기억력이 책 한 페이지를 기억하기에도 부족할 때가 있다.



익숙한 필체는 바로 내 자신의 필체였다. 내가 오래전에 그 책을 읽었던 것이다. 문학의 건망증, 문학적으로 기억력이 완전히 감퇴하는 고질병이 다시 도진 것이다. 그러자 깨달으려는 모든 노력, 아니 모든 노력 그 자체가 헛되다는 데서 오는 체념의 파도가 휘몰아친다. 조금만 시간이 흘러도 기억의 그림자조차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안다면, 도다체 왜 글을 읽는단 말인가?도대체 무엇때문에 지금 들고 있는 것과 같은 책을 한 번 더 읽는단 말인가? 모든 것이 무로 와해되어 버린다면, 대관절 무엇 때문에 무슨 일인가를 한단 말인가? 어쨌든 언젠가는 죽는다면 무엇 때문에 사는 것일까?



그러나 혹시(스스로를 위안하기 위해 이렇게 생각해 본다) 인생에서처럼 책을 읽을 떄에도 인생 항로의 변경이나 돌연한 변화가 그리 멀리 있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보다 독서는 서서히 스며드는 활동일 수도 있다. 의식 깊이 빨려 들긴 하지만 눈에 띄지 않게 서서히 용해되기 때문에 과정을 몸으로 느낄 수 업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문학의 건망증으로 고생하는 독자는 독서를 통해 변화하면서도, 독서하는 동안 자신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줄 수 있는 두뇌의 비판 중추가 함께 변하기 때문에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분명히 허둥지둥 글 속에 빠져 들지 말고, 분명하고 비판적인 의식으로 그 위에 군림해서 발췌하고 메모하고 기억력 훈련을 쌓아야 한다. 한마디로,, ,

"너는 네 삶을 변화시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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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워야 한다, 젠장 재워야 한다 - 아이에겐 절대 읽어줄 수 없는 엄마.아빠만을 위한 그림책
애덤 맨스바크 지음, 고수미 옮김, 리카르도 코르테스 그림 / 21세기북스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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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에겐 절대 읽어줄 수 없는 엄마, 아빠만을 위한 그림책


신선하다.


움직일 수 없을만큼 피곤하거나, 내일아침 이른 출근 앞둔 상황에서 아이들이 잠에 들지 않는다면? 아무리 귀여운 자식이지만, 정말 골치거리가 아닐 수 없다. 이 책은 그런 부모들의 입장에서 아이들에게 하고 싶은 진짜 속마음을 이야기한다. 

"아가야 이제 잠들 시간이야" (제발 좀 자렴!! 나 미치겠다고!!! ㅠㅠ) 


부모들의 심정이 정말 이렇지 않을까? 물론 나는 지금 상상만 할 뿐이지만 말이다.  


출간도 되기 전 아마존 종합1위를 차지했다는 어른들만의 그림책. 

아름다운 그림과는 반대로 부모들의 진짜 속마음을 거짓없이 쓴 책의 내용은 신선했다. 

반면, 만원이라는 책값에 비해 책에 포함된 내용이나 그림은 너무 미약하다.



"아이 고양이는 엄마 옆에 콜콜 잠들었어.

아기 양도 엄마 옆에서 새근새근 자고 있어

아가야, 너도 포근하게 누웠잖니.

그러니까 제발 잠 좀 자라, 이 자식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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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눈이 되어
떼레사 까르데나스 지음, 하정임 옮김 / 다른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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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 상상할 수 없는 고통


삐르로 비에호는 늙은 사냥개라고 불리우는 노예였다. 태어났을 때부터 노예였던 그는 50이 넘는 나이까지 한번도 주인에게 저항조차 하지 않으며 지옥과도 같은 노예로써의 삶을 살았다. 음식, 여가, 사랑, 휴시에 대한 자유는 전혀 보장되어있지 않았으며, 주인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이유를 알지도 모른채 고문당하고, 심지어는 죽을 수도 있다는 상황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그들은 하느님을 믿었지만 그들을 위한 하느님은 존재하지 않는것처럼 느껴졌다. 만약 그랬더라면 그들의 삶을 고통속에서 외면하지 않았을 테니. 신은 존재하지 않느다고 믿었다. 너무도 분명했다.


주인의 아버지는 어떻게 아이가 사람의 냄새를 맡는지 참으로 영리하다고 생각했다. 그 모습이 마치 사냥개가 굶주렸을 때나 도망치는 노예를 쫓을 때 같다고 말하곤 햇다. 그것이 그에게 늙은 개, 뻬르로 비에호라는 이름이 붙은 까닭이었다.


아침 종이 우리면 노예들은 일제히 머리를 숙이고 농가의 한 쪽 벽면에 걸려 있는 십자가에 반쯤 벌거벗은 채 매달려 있는 예수에게 기도를 했다. 그리고 신부의 축복을 받으며 뱀과 전갈이 득실득실한 사탕수수 밭으로 들어갔다.


뻬르로 비에호는 지옥이 두렵지 않았다. 그의 삶 자체가 지옥이었던 것이다. 오히려 늙은 노예는 죽음을 상상하는 것을 좋아했다.


냉큼 꺼져버려!

주인의 목소리가 그를 현실로 내쫓았다. 하지만 그는 아직 과거 속에서 현실로 돌아올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가슴속에 심장이 있다는 확신도 없는데, 어떻게 천국에 누군가 살고 있다고 믿을 수 있을까?



자유, 두려운 그 이름


그토록 갈망하던 자유가 주어졌을 때 삐르로 비에호는 두려움을 느낀다. 자신이 노예로써의 규율을 어겼다는 사실과 처벌을 받게된다는 두려움에 벌벌 떨면서 자신의 행동을 후회한다. 두려움에 떨며 노예의 신분을 인지하며 집으로 돌아오는 모습이 얼마나 처량했을까? '용기'는 '두려움'으로 인해 사라지고, 오로지 공포가 노인에게 남아있을 뿐이다. 오랜 기간 노예라는 삶과 익숙해진 고통은 도망가려는 시도까지도 두려움으로 만들어버렸다. 뜻하지 않은 행동이 혹시나 주인에게 처벌받지는 않을까 하며 자유를 두려워하는 그의 모습은 처량하기까지 하다.

그는 집에 왔다. 그러나 울면서, 자유를 두려워했다는 부끄러움에 울면서.


사랑 & 용기, 위대한 발걸음을 만들어내는 힘


자신의 신분에 대해 인지하며 자유를 위한 시도조차 하지 않는 노인을 변화시킨것은 베이라에 대한 사랑이었다. 그녀가 도망치다가 감독관에 잡혀 고문을 당할 위기에 처하자 그는 한번도 시도하지 않았던, 노예의 신분을 버리고 시대에 저항한다. 감독관의 머리를 나무로 내려치고, 자유의 길을 찾아 떠나는 노인의 모습은 주체적인 인간이 되는 위대한 발걸음이다. 평생동안 자신과 모든 노예들을 억압했던 사회제도에 순응하지 않고, 자유를 향한 첫 발걸음을 시작한다.

자유의 땅, 정글에 어떤 것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들의 행동은 용기있는 행동은 위대하다.


그는 죽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는 숨을 꾹 참고 분노를 억눌렀다. 삶이 그들의 손아귀에 달려 있지만, 죽음마저 그들 손에 맡기고 싶지는 않았다.


뻬르로 비에호는 감독관에게 가까이 다가가 한 마디 말도 없이 그의 머리를 지팡이로 후려쳤다. 그의 얼굴에서 피가 솟구치더니 이내 몸이 축 늘어졌다.


농장 울타리 너머엔 알 수는 없지만 자유의 땅 정글이 있었다. 그러나 처음에는 농장주와 사냥개의 맹렬한 추격을 피해야만 한다. 잡혀서 개들에게 몸이 찢기고 먼지구름 속에서 농장으로 다시 끌려올 수도 있다는 공포를 이겨 내야만 할 것이다. 뻬르로 비에호는 산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몸과 마음이 강해져야 하며 밤의 어두은 그림자나, 밤바람에 바스락거리는 나뭇잎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짜이 밀레가,  주체적 인간 그 첫 발걸음


민주주의의 이념이 확립된 이후 일부 국가를 제외하곤 노예제도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는 범위에서 생활하며, 원치 않는 것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는 사회에서, 즉 민주주의의 기본원칙인 ‘평등’이 보장되는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과연 우리는 정신적으로도 자유로운 진정한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고 있는가? 눈에 보이지 않는 사회가, 또는 개인이 만들어진 굴레를 깨지 못한채 살아가고 있다면 그것은 완전히 자유로운 삶이라고 말할 수 없다. 진정한 자유는 알을 깨고 세상으로 나와야만 얻을 수 있다. 용기없음과 안락함으로 인해 세상에 갇혀진 무사유의 노예의 모습에 위안으로 삼기보다는, 주체적인 첫 발걸음을 내딛어야 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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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를 권리 : 폴 라파르그 글모음 - 필맥 휴대책
폴 라파르그 지음, 차영준 옮김 / 필맥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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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게으름이여, 이 오랜 고통에 자비를 베푸소서! 예술과 고귀한 미덕의 어머니인 게으름이여, 이 인간의 고통에 위안이 되어 주소서!


'왜' 라는 질문의 필요한 시간

기술발전과 노동력 향상으로 인해 우리는 기존에 10시간 걸리는 일을 5시간으로 단축시켰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더욱 여유로워졌는가? 전혀 아니다. 오히려, 남은 5시간에 더욱 생산성을 높이는 방법을 끊임없이 고민하며, 자기 자신의 육체와 정신을 노동으으로 채찍질한다. 자본주의 시대는 생산과 성과에 초점을 맞추며, 근면함을 최고의 가치로 평가하며 게으름을 죄악이라고 치부한다. 과연 이것이 옳은가? 맹목적으로 사회에 만연한 가치를 받아드리기 전에 우리는 다시 한번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야한다. 자기 자신을 노동으로 혹사 시키기 전에 '왜' 라고 스스로에게 질문하며, 기존의 가치를 다시 고려할 때에 비로소 우리는 본질에 다가갈 수 있다. 우리는 '왜’ 노동에 최선을 다하고 있으며, 그것은 언제나 옳은 것인가? 지금으로부터 100년도 지난 과거 게으름의 필요성을 주장하던 철학가 폴 라파르크를 통해 심도깊은 '왜'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보자.



부지런함은 언제나 최고의 가치인가?

부르주아는 자신의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노동자계층의 무사고가 필수적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종교, 사상가 들과 결합한 부르주아층은 '게으름 = 죄악, 부지런함 = 미덕' 이라는 사고를 모든 시민에게 교육한다. 이렇게 세뇌된 가치들은 노동자들을 더 많은 시간 근로에 묶어 놓는 완벽한 방법이었다. 노동의 가치에 세뇌된 노동자 계급들은 게으른 동료를 비난하고, 심지어는 부지런하지 않음에 죄책감을 느끼는 상황까지 만들었다.  이렇듯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가치를 따르는 것이 언제나 옳은지는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한다. 과연 누구를 위한 사상이라는 말인가!



게으름은 죄악이며, 모두를 불행하게 하는가?

노동 시간을 줄인다면 오히려 생산성은 높아질 것이며, 인간의 삶의 질도 향상될 것이다.  게으름은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수단이자, 게으름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쾌락은 삶의 목적이다. 실제로 그리스 로마 시대의 철학자들은 노동 계급이 아닌 게으른 계층이었고, 많은 예술가들 또한 그러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행동이 가장 많은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라는 말처럼 게으름은 무행동의 표상이 아닌, 삶을 윤택하게 만드는 재충전의 시간이다. 하지만, 우리는 노동이라는 가치에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해가며 자신의 체력과 정신을 마모의 소용돌이로 몰아넣고 있다. 노동시간이 줄어든다면 마치 큰 재앙이 일어날것처럼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실제는 어떠한가? 영국에서 하루 10시간 이하로 노동시간을 제한하였을 때 그들의 생산성은 오히려 더 높아졌던 결과는 그들의 주장을 반증한다. 게으름은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무가치한 시간이 절대 아니다.




현대판 게으를 권리

우리 사회는 부지런함이 언제나 최고의 가치가 될 수 밖에 없는 자본주의 경쟁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다. 자기 자신을 마모해가며 자신의 분야에서 경쟁력을 가지기 위해 끊임 없이 경쟁한다. “누구를 위한 경쟁인가? 사회에 만연한 성과주의로 인한 자신을 마모해가며 생활하고 있지는 않은가? “ 라는 대답에 정확한 답변을 하지도 못하면서 끊임없이 자신을 혹사한다. 이런 사유없는 행동은 옳다고 말할 수 없다. 최선을 다해 노력한다는 의미는 여러가지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일에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이 행복해지는 방법에 대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나는 지금부터라도 (이미 어느순간부터 이런 사상은 나의 일부가 되었지만) 내 자신이 행복해지기 위해 위대한 게으름과 친해지는 향유의 시간을 만끽하겠다. 그리고 크게 웃으며 말하겠다. 아 게으름이여, 위대한 게으름이여. 나는 오늘도 웃습니다.



책을 읽으며 버트런트 러셀의 '게으름에 대한 찬양' 이라는 책과 강신주 철학박사의 '강신주 다상담 - 일' 이 오버랩 되었다. 이 리뷰를 읽을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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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단어 - 인생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
박웅현 지음 / 북하우스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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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묵히 자기를 존중하면서, 클래식을 궁굼해 하면서, 본질을 추구하고 권위에 도전하고, 현재를 가치 있게 여기고, 깊이 봐가면서, 지혜롭게 소통하면서 각자의 전인미답의 길을 가자.”

철학하는 광고인, TBWA ECD 박웅현의 8가지 주제에 대한 강의를 담은 이 책은 독자로 하여금 인생의 소중한 가치에 대해 이야기 한다. 자존, 본질, 고전, 견(見), 현재, 권위, 소통의 다양한 주제들을 이야기하며 그것은 마지막의 인생의 행복을 추구하는 방법으로 마무리된다. 심도깊은 본질적인 철학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도 그의 글은 쉽게 읽히지만, 그 여운은 강렬하다. 또한, 청중, 독자를 고려하는 강의의 방법과 많은 예시들은 강의의 이해도와 공감을 높인다. 책을 읽는 중간의 그의 인사이트에 감탄한적이 한두번이 아니었으며, 문장을 곱씹으며 나의 삶의 중요한 가치들을 다시 생각할 수 있었다. 



<다짐, 여덞 단어를 읽고 난 생각>

진정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자.

남과 비교하기 보다는 나만의 목소리를 찾자.

본질에 대한 끊임없는 추구하자.

권위에 굴복하지 않는 사람이 되자.

고전에 대해 관심을 갖자.

지금 이 순간을 살자.

선택을 후회하기 보다는 자신을 믿어주고, 최선을 다하자.


이렇게 살아간다면,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너무 좋았던 책을 회상하며 리뷰를 남기는 지금 나의 행동도 나의 삶을 행복하게 만드는 수단이며, 목적이다. 사실 위와 같은 다짐들은 자기계발서를 통해 쉽게 볼 수 있는 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렇게 인문학책을 읽으며 나만의 생각을 정리하고, 다짐하는 이 순간은 다른 사람이 소화를 마치고 요약한 것을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통해 직접 도출된 과정이기에 더욱 강렬하고, 오래동안 기억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중요한건 실천이다. 책을 읽었는지의 여부와 관계없이 지혜의 정수를 일상에서 적용할 수 있다면 지금 나의 삶이, 삶에 대한 나의 태도가 더욱 빛날 수 있을 것이다. 저자의 말처럼 책 한권으로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지만, 최소한 이 책은 변화의 기회를, 생각의 도끼를 선물했다. (역시 책은 도끼다 ㅎ)  


“해방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선 그자리를 해방의 공간으로 전환시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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