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르고 고른 말 - 카피라이터·만화가·시인 홍인혜의 언어생활
홍인혜 지음 / 미디어창비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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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10년 전 어느 겨울, 임고생의 길을 걷던 내가 좋아하던 곳은 대형 서점이었다. 거기 있는 책들 표지만 봐도 부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참 좋았다. 임고를 마친 때였는지 어땠는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는다. 그때 내 눈에 들어온 책이 바로 루나파크, 홍인혜 작가님의 런던살이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아서'였다. 2005년 유럽 여행 이후, 런던은 나에게 로망이 되어 버렸다. 임고 붙으면 언니와 꼭 다시 런던을 갈테야 다짐했는데......아무튼 그런 나의 맘을 알고 적은 제목인지 제목도 너무 매력적이었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아서. 꼭 내 맘 같았다. 그녀는 아무것도 아닌 나에 비해 좋은 광고 회사에 다니고 있고, 내가 가고 싶어하던 도시에서 살아보기도 하고......부러웠다. 대리만족도 느꼈다. 그렇게 그녀의 책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이후 나는 학원 강사로 일하고 결혼하고 아기낳고 키우고 시간을 보내다 보니, 기억 속 루나파크를 잊어갔는데, 그녀가 '홍인혜'라는 본인의 이름으로 시인으로 등단을 하고 이번에 에세이집 '고르고 고른 말'을 낸다는 소식을 접했다. 얼마나 반갑던지. 그 시절 나를 떠올리게 하는 루나파크 홍인혜님. 그녀의 에세이가 너무 궁금하고 기대가 됐다.

그녀의 책 속에는 내가 일상에서 느끼는 다양한 감정들이 그녀가 '고르고 고른 말'로 담겨 있었다. 내 이야기같아 공감하다 같이 화내다, 깔깔대고 웃다가 고개를 끄덕이다가 책의 마지막장을 덮었다. 그녀가 고르고 고른 말 중, 내가 고르고 고른 구절을 나눠보고 싶다.

1부. 내게 번진 말-도식적인 말 : 알고리즘은 알고 있다

감정은 문과가 아니라 이과의 영역이었다. 내 영혼이 문학적인 줄 알았는데 그저 통계적일 뿐이었던 것이다.

p.87

나도 전형적인 문과생이라 감정은 문과 영역이라고 지금까지 믿고 있었는데^^; 유튜브 알고리즘의 위대함(?)을 경험한 요즘, 감정은 이과의 영역이라는 걸 믿을 수 밖에 없다.

2부. 우리가 말을 섞을 때-지극한 말 : 아꼬와, 아꼬와

어제까지 없던 3킬로그램짜리 존재가 세상에 등장했고, 우리의 마음은 3킬로그램씩 차올랐다.

p.104

조카가 세상에 태어났을 때, 작가가 느꼈던 마음을 나 역시 우리 아이들이 태어났을 때 느꼈다. 우리의 마음이 '차올랐다'는 표현이 참 좋았다.

우리는 한때 오름이처럼 '아꼬운' 사람이었다.(...) 가끔 세상살이에 지쳐 아무도 나를 아끼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 때면 이 마음을 떠올려야겠다. 분명 누군가는 어린 나를 바라보며 "아꼬와, 아꼬와" 했을 테니까.

p.106

제일 와닿았던 말. 내가 듣고 싶은 말. '아꼬와, 아꼬와'

원래는 제주도 방언으로 귀엽고 사랑스럽다는 의미이지만, 나 역시 작가처럼 '아깝다'라는 말과 맥락이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더 아끼는 마음으로 사랑해주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2부. 우리가 말을 섞을 때-깨닫는 말 : 우리는 모두 입체다

본인을 헤아릴 때 동원했던 입체적인 시각은 사라지고 그의 세계는 관종, 비호감, 무개념 같은 단어 몇 개로 규정된다. 스스로의 행동을 해석할 때의 관용(내 안에 켜켜이 쌓여 온 삶과 피할 수 없는 상황들이 나로 하여금 이런 행동을 하게 만들었다)은 멍청해서 저렇다, 관심받는 걸 좋아한다. 쟤가 무슨 생각이 있겠어 등의 1차원적인 해석만 남는다.

p.144

2부. 우리가 말을 섞을 때-옮기는 말 : 운곡 할아버지

대화와 온기를 나눌 수 있을 때 작별했다면 좋았을텐데, 우리는 침묵 속에 헤어졌다.

p.148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글 속에서 '운곡'이라는 호를 발견하고 불러주는 작가님의 따뜻한 마음과 살아계실 때 불러드리지 못한 안타까운 마음이 느껴졌다. 나도 작년 11월에 세상을 떠난 외할머니 생각에 울컥하기도 했다. 작가님도 마스크 속에서 울음을 숨길 수 밖에 없었음을, 코로나 시대의 슬픔이 전해졌다.

3부. 언어일상사-토닥이는 말 : 운이 좋은 시인

나보다 잘 쓸 수는 있겠지만 나와 똑같이 쓸 수는 없을 것이다. 내 시는 수십 년간 쌓아온 나의 고유성이니까. 나의 역사를 통해 나만이 획득한 시선과 버텨온 감각이니까.

p.243

나에게 큰 자신감을 준 말. 나보다 잘 쓰는 사람은 많겠지만, 나만의 글을 써 봐야지.

4부. 내가 던진 말-습관의 말 : 사람의 말머리

반복적으로 쓰는 말은 그 사람만의 말머리가 되어 이미지를 만든다, 나는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보다는 '옳지'라고 말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p.281

나도 한때 누군가의 말머리로 스트레스를 받았던 적이 있었다. 그게 그 사람의 말머리라고 생각하기에는 내가 너무 예민했던 시절이었다. 이왕이면 나도 '아니'라고 말하기보다는 '옳지'하며 살아야지.

작가님의 에세이를 읽으며, 내가 무심코 지나쳤던 말들에 대해 다시 한 번 떠올릴 수 있었다. 잊고 있던 따뜻함과 배려가 나를 조금은 좋은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다. 거기다 작가님 특유의 유머 감각까지 느껴져 크게 웃기도 했다. 연말, 사람에 지치고 무기력하다면, 홍인혜 작가님의 '고른고 고른 말'과 함께 하길^^ 당신의 일상이 좀더 '반짝'하고 빛날 것이다.


* 이책은 창비 서평단을 통해 만나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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