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장각
세종의 집현전이 애민정신과 세종 대왕 자신의 왕성한 지적 호기심에서 생긴 것이라면 정조의 규장각의 시작은 결 핍에서 시작되었다. 실록에서 여러차례 정조대왕은 외척과 환관에 대한 분노를 표출한다. 당시 국사를 어지럽게 하고 아비와 자식의 관계를 원수로 만든 것이 바로 친족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을 비밀리에 소식을 실어나르며 도왔던 환관들의 연결고리를 간파해서 억제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들은 정조의 암살을 계획하게 된다.
- 비수를 품은 자와 통하여 어두운 방에 들어오기도 했고, 혹 점방에서 통해 음모를 꾸며 흉측한 물건을 몰래 땅에 묻어 놓기도 했다. (... ) 무릇 나의 동정과 언어, 음식, 기거 일체를 난보로 만들어 간첩들이 하는 듯이 전해져서, 칼날과 독침의 위급함이 호흡간에 달려 있었다. 이 때에 나는 실로 어디서 안전한 곳을 찾을지 알 수 없었다.
<실록> 정조 6년(1782)5월29일
정조 대왕의 위기에서 시작된 것이 바로 외정의 신하들이었다. 그리하여 규장각을 설립하여 조정 신하들을 선발하는 일에 힘썼던 것이다.
-내가 처음 초계문신을 둔 뜻은 학문을 권면하는 데 있다. 내가 몸소 부지런히 하는 모범을 보이지 않으면 어떻게 여러 문신들을 다 잡을 수 있겠느냐. 나의 버릇 또한 이러기를 좋아하여 종일 초록하는 일을 해도 피곤한 줄 모른다.
<홍재전서> 권 161. <일득록>. 1783년 서용보 기록
일득록: 매일 얻은 바를 기록한다는 의미이다. 18권. 정조가 측근의 신하들(규장각의 관료)과 주고 받은 대화를 정리한 방식
제왕의 학문은 마땅히 경전을 위주로 해야 옳지만, 역사서 또한 급선무로 숙독해야 할 것이다. 성스럽고 어진 제왕의 법도와 정책, 이름난 신하와 훌륭한 보좌관의 위대한 업적과 충절은 어린시절에 학습해서 알아두어야 한다. <전서> 권 165. <일득록> 남공철. 1792
세종 대왕, 정조대왕은 둘 다 책을 특별히 사랑한 군주들이었다. 그래서 정무를 보는 중에도 틈틈히 택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고 한다. 그들의 지식의 풍요와 디테일의 힘은 혹시 그들이 읽었던 책과 강론 중에 체득한 것은 아닐까.
틀을 부수다: 제도 개혁
자신이 그 상황에 처해보지 않으면 온전히 그 아픔을 알 수 없고 억울함을 알 수 없다. 그런데 정조는 적자임에도 서자의 등용에 힘을 싣는다. 실력이 있어도 신분의 한계로 관직을 얻지 못하는 이들을 위한 제도를 마련했다. 조선시대와 같은 신분제도가 지켜지는 나라에서 양반의 최상위 계급이 중인들의 아픔을 이해한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다. 지혜로움과 진짜 지식은 타인을 공감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겪어보지 못한 일을 어찌 공감 할 수 있을까. 정조는 왕의 권위로 할 수 있는 일을 선택한다. 그리고 덕분에 조정에서도 유능한 인재들을 고루 등용할 수 있었다.
- 무릇 일은 평등하고 공평하게 해야 할 것이다. 인사 정책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문, 음, 무에 진출할 길이 오래 막혔던 자들을 넓혀준다고 하여 이미 다들 거두어 썼는데, 이름이 관안에 올라 있어도 적자와 함께 거론 하지 않는다면 어찌 차별 없이 대하는 도리이겠는가. <실록> 정조. 17년. (1793)5월 12일
정조의 업적을 하나하나 적다보니 끝나지 않은 이야기에 실로 놀라웠다. 먼저는 그의 태도에 놀랐고. 생생하게 기록된 실록과 여러 기록들로 그림그리듯이 상황이 그려지는 것이 신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