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땅의 야수들 - 2024 톨스토이 문학상 수상작
김주혜 지음, 박소현 옮김 / 다산책방 / 2022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인류는 지금 그 당시보다 더 큰 물리적, 윤리적 멸망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이런환멸의 세상에서 어떻게하면 의미 있게 살수 있는지 제시하는게 작가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 p7 한국 독자들에게.

마지막 장을 덮고서야 이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그녀는 자신의 의무에 충실하게 글을 적었다. 아주 매력적인 등장인물들과 극적인 사건 전개로 쉬이 책장을 덮을 수 없었다. 605p를 휘몰아 치듯 격동의 50년을 그렸다. 보는 내내 내 눈앞에서 그려지는 그림과 살아숨쉴 것같은 인물들로 그들의 삶에 공감했고, 희노애락에 함께 심취했다.

"모든 인간은 근복적으로 자신이 고유한 의미를 지닌 존재라고 믿는다. 그러지 않으면 각자의 인생을 버텨내기 어려울 것이다."p117

일제시대 배경에 우리가 존경하고 찬사를 보내는 독립운동의사나 열사가 아닌 그 시대의 일반 사람들의 이야기다. 아니 조금 더 낮은 곳을 향한다. 기생 옥희와 그녀의 친구 연화, 거리의 아이 정호와 인력거꾼 한철이 주요인물이다.

아니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 보면 이명보라는 인물과 김성수 그리고 또 다른 기생 예단이(월향과 연화의 이모,옥희를 키웠다) , 그리고 야마다 겐조와 이토. 흥미로운 점은 살인을 밥먹듯이 하고, 조선인들을 괴롭히는 일본인들을 철저한 악의 축으로 그리지 않았다. 자신의 선택에 의한 삶을 살고 있지만, 그들은 자신이 걷고 있는 길에 대해 자각하고, 잘못 된 것에 대해 느끼고 있었다. 물론 그럼에도 계속 그 길로 걸어 간 것에 대한 점은 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배경은 일제시대부터 해방과 6.25 전쟁을 거쳐 박정희 대통령시대까지 흘러나온다. 1918년, 우리가 기억하는 3월의 시위가 일어나기 한 해 전 산 속에서 호랑이와의 대치로 시작한다. 일제시대, 식민시대라는 한국의 한은 제법 많은 영화와 소설, 드라마의 소재거리이다. 나라를 잃고 많은 압제 속에서 살아간 사람들의 삶은 여전히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가슴 속에 뜨거운 불씨를 남기는 듯 하다. 부잣집 도련님인 성수는 거절하는 독립 자금을 천하다고 멸시받는 기생들은 자신들의 수입의 3/1을 내고 1919년 3월의 거리 시위에 참여했다. 연인 단이 앞에서 면을 세우고자 울며 겨자 먹기로 태극기 1만장을 자신의 출판사에서 찍어준 성수는 후에 이 일덕에 매국노, 친일의 재판 앞에서 면죄부를 받고 당당하게 풀려난다. 극한의 상황에서 선도 명예를 지키는 것이란 어려운 일이다. 이 시대의 난무하는 배신과 타인의 신의를 저버리는 일이 현재에도 흔하게 뉴스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작금의 현실이 살기 팍팍하다는 증거로 보여 입이 쓰다.

실타래처럼 꼬인 관계와 상황 속에서 매 순간 인물들은 선택을 한다. 그리고 그에 알맞는 길을 걸어간다. 시대의 아픔을 품고 때로는 인격을 상실하며 괴물로 변질 되기도 하고, 배신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 모든 순간을 묵묵하게 견디어 낸 이도있다.

어린 기생 옥희가 만난 사랑과 우정, 그리고 우연히 찾게 되는 꿈까지 그녀의 전 생애가 담겨있다. 삶의 구비구비마다 그녀는 견뎌내고, 버티고 넘어섰다. 이 책에 나오는 모든 인물들 하나 하나가 작은 땅 조선의 야수, 호랑이가 아니었을까. 자신만의 속도로 자신의 선택에 의해 바퀴를 굴리며 살아갔다. 그 방향의 끝이 비극으로 끝날 지라도, 그들은 자신의 신념으로 살아갔다. 죽음 앞에서 삶이 완전한 비극, 혹은 희극이 있을까. 각자 삶의 가치대로 살아가다 마지막 순간에 떠오른 것이 삶의 화양연화든 회한이든 각자의 몫이다. 명보와 정호의 끝도


<밑줄긋기>

"아무리 노력해도 상대를 붙잡을 수 없어. 깊이 사랑했던 사람들도 인연이 다하면 한순간에 낯선 이들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가끔은 그 어떤 변수에도 상관없이 영원히 너에게 이어져 있는 사람들이 생기기도 하지. 연화와 나, 우리의 인연은 깊고, 지금의 이 삶을 초월한 전생에서부터 온 것이지."p92

-옥희

"우리가 하는 운동의 목적은 그저 멸종을 피하려는 게 아니라 정의로운 일을 하는 거야. 우리가 서로를 설득할 수 없는 평행선상으로 계속 되돌아오고 있다는 거 알겠나?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를 결정하는 것은 진정으로 논리의 영역 밖에 있어. 내 행동 방식을 이해해 주리라 기대하지는 않겠네. 나는 그저 내 영혼이 시키는 걸 한다고 말할 수 밖에 없겠지." p192

-3월 1일 거사를 앞두고 명보가 동창 성수에게. (아직은 급진적인 공산당이 되기 전)

"극장 밖에서 당신을 처음 봤을 때부터요. 왜냐고요? 그냥, 당신은 당신으로 거기 서 있었고, 나도 거기 함께 서 있었으니까....... 그렇게 단순하고 그렇게 복잡한 거예요.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던 거고요."p351

-인력거를 끄는 한철이 사랑하는 옥희에게

"소수의 몽상가들은 그들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 달, 강, 기차역, 빗소리, 따스란 죽 한 그릇 처럼 평범하고 소박한 것들도, 몽상가들은 여러겹의 의미를 지닌 신비로운 무엇으로 받아들인다. 그들에게 세상은 사진이라기 보단 유화여서, 다른 수많은 사람들이 가장 바깥쪽에 있는 색깔만을 바라볼 때 이들은 영원히 그 아해 감춰진 색깔을 바라본다. 몽상가가 아닌 사람이 유리를 통해 보는 풍경을, 몽상가들은 프리즘을 통해 바라보는 셈이다." p417

"사실 술이나 아편 같은 거라도 없으면 다들 어떻게 버티겠어? 자살하는 사람들이 지금보다 더 늘어날걸." 옥희는 감기처럼 흔해진 증상이 된 죽음에 대해 생각하며 말을 이었다. p428

-옥희가 아편에 중독되어 사라진 연화를 찾다가 정호에게.

"다들 각자의 방식으로 용감한거지." p431

-정호 바닷가 고동카페에서

"그렇지만 이제 와 생각해 보면, 우리 중 가장 강인한 사람은 바로 옥희 너야....... 내가 죽고 이 전쟁이 끝난 뒤에도 너는 꼭 살아남을 거다. "p467

-단이가 죽음을 앞두고 옥희에게

"아무도 믿지 말고, 불필요하게 고통받지도 마. 사람들이 하는 말 뒤에 숨겨진 진실을 깨닫고, 언제나 살아남을 방법을 찾아. 그게 널 위한 내 조언이야."p514

-옥희에게하는 이토의 조언

"인생은 곧 바퀴였다. 영민한 사람이라면 자신에게 주어진 그 바퀴를 잘 굴려 어디로든 갈 수 있었다. 반면 어리석거나 운이 나쁜 사람은 그 바퀴에 잘못 깔려 무참히 짓밟힐 수도 있었다. 그 두 극단 사이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직 그 바퀴를 앞쪽으로 굴러가게 하는 일에 온 힘을 쏟았다. p546

-사랑대신 야망을 택한 한철

-노년의 옥희가 바닷가에서


오랜시간 한 남자를 사랑했으나 배신 당했고, 한 남자의 사랑을 받았으나 끝내 놓친 옥희는 노년에 가장 아름다운 한 때를 기억했다. 그리고 삶이 살아볼 만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오늘의 물질을 하며 제게 맡겨진 업둥이 철수를 기른다. 그녀의 마지막 말은 마치 독자에게 건네는 저자의 위로와 같았다. 일제 시대를 버티고 또 전쟁의 시기를 버텨낸 한 여인의 입을 통해 말했다. 조금 더 견뎌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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