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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위의 산책자 ㅣ 나와 잘 지내는 시간 1
양철주 지음 / 구름의시간 / 2022년 7월
평점 :

필사를 사랑해서 연필로 사각사각 써 내려가는종이 위의 산책자. 종이 위의 글자들을 탐험하며 여행을 기록한 기록이다. 본인은 문학에 재능이 없어서 작가가 되는 대신 편집자가 되어 독자에 머물렀고, 절절한 사랑을 담아 여러 책들을 필사했다고 한다. 이미 수년간 손이 저리도록 묵묵하게 필사를 해나간 이의 글은 단단함이 있다. 가볍거나 자극적이지 않다. 짜릿한 카피라이터의 감성이 아닌 묵은지처럼 콤콤한 향이 나는 글이다.
어떤 글을 필사하는 일은 때로 필연적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저자에게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그러했다. 작가에 대한 사랑 고백을 이렇게 필사적으로 하는 독자라니. 책과 종이를 애정하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흠모할 법한 취향을 가졌다.
나의 첫 필사는 성경이었다. 66권을 모두 한 것도 아니고, 이따금 내 영혼의 갈급함을 채우기 위해 우물을 파듯 돌에 새기듯이 천천히 적어 내렸다. 누구의 아들이 누구를 낳고 또 낳고, 계수가 나오고 족보가 나올때는 지루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인내하던 시간이 있다. 그리고 인생에 커다란 벽 앞 에서면 그렇게 새긴 말씀들이 나를 단단하게 붙들었다.
저자는 필사에도 믿음이 필요하다고 했다. 지루한 시간들, 무의미한 짓을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넘어서는 것은 필사의 즐거움 뿐이라고 했다.
오늘도 시필사를 했다. 오늘은 특별히 저자처럼 연필로 필사를 했다. 보통은 제트스트림 볼펜이나 시그노 유니펜으로 필사 후 단상을 연필로 적는다. 그러나 오늘은 그의 글을 읽으며, 나도 연필로 꾸욱꾸욱 눌러적으며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18번을 들었다. 내 안의 소란함이 가라앉았다.
육아로 지친 하루, 서운한 마음과 추석연휴의 스트레스 따위 모두 잊고 현재의 시간에 머물렀다.
-시 필사가 즐거운 것은 시 한 편으로도 짧은 시간에 시의 분위기에 젖어들 수 있기 때문이다.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18번 1악장(D.894)흘러나오는 가운데 카모마일 티백이라도 우리며 시 한 편을 필사하노라면, 나중 일은 어떻게 되어 갈지 염려하는 데서 벗어나 현재의 시간에 오롯이 집중하게 된다 .(p55)
저자는 필사를 하며 텍스트에 머무는 것이 아닌 글자와 글자 사이를 유영했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화양연화를 추억하기도 했다. 괴로운 날에는 절실한 책을 읽은 저자는 릴케의 <말테의 수기>를 두번이나 필사했다고 했다. 온후가 태어나고 얼마 안되 민음사 북클럽에서 <말테의 수기>를 골랐다. 한창 필사에 열을 올리던 터라 마음을 울리는 문장들을 필사하다 결국 노트를 덮었다. 아이를 낳고 얼마되지 않아 허약해진 어깨와 손목, 허리를 탓해보지만 나의 인내심이 부족했던 것은 아닐까. 밑줄을 그으며 마지막 장까지 읽었다. 누군가의 인생책을 읽어본 적이 있을때, 특히나 필사를 시도한 책이었을 때는 뭔가 동류를 만난듯 반가움이 인다.(감히....^^;;;;)
필사를 하면 책의 내용을 더 오래 기억하고 간직하게 되리라는 믿음. 그것이 필사하는 사람의 마음이다. 가ㅏㅈㅇ 먼저 써보고 싶은 책으로 <말테의 수기>를 고른 것은 아주 좋은 선택이었다.(p79)
연필심 끝으로 릴케의 생각을 읽는다. 그의 생각을 따라 우물보다 깊은 곳으로 내려가고 그의 표현을 따라 산만큼 높은 곳을 올랐다. P83
일상의 하찮음이 삶의 생생함으로 되돌아왔으면 좋겠다. 들숨과 날숨, 그 희미한 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으면 좋겠다. 사소해도 하찮지 않은, 누구나 그의 숨소리 들려오는 그의 ‘곁’을 꿈꾸는 것이니.
시 필사가 즐거운 것은 시 한 편으로도 짧은 시간에 시의 분위기에 젖어들 수 있기 때문이다.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18번 1악장(D.894)흘러나오는 가운데 카모마일 티백이라도 우리며 시 한 편을 필사하노라면, 나중 일은 어떻게 되어 갈지 염려하는 데서 벗어나 현재의 시간에 오롯이 집중하게 된다 .(p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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