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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義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
리 호이나키 지음, 김종철 옮김 / 녹색평론사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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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란 무엇인가' 라는 마이클 샌델의 책이 작년 한 해 유명세를 탔습니다.  

이웃 블로그에서 마이클 샌델의 책과 함께 소개된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는

샌델의 책을 읽고도 뭔가 석연치 않았던 부분을 채워줄 것 같다는 느낌으로 다가왔어요.

'Stumbling Toward Justice' 라는 제목이 주는 뉘앙스를 한참을 생각했습니다.

리 호이나키의 책을 끝까지 읽고나서야 책의 제목이 전해주는 의미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어요.

정의는 비틀거리면서 갈 수밖에 없는 길이며, 비틀거리면서도 가야만 하는 길이라는 것을....

 

리 호이나키는 자신이 걸어온 삶의 궤적을 담담히 풀어 설명하지요.

그가 생의 분기점마다 겪고 느낀 일들을 세밀하게 산문체로 적어놓은 책입니다.

처음엔 읽기 쉬운듯 보였지만 저자가 선택한 인생의 갈림길마다 고뇌했던 내용들을 풀어놓고

결국 생의 행로를 바꾸도록 결단하게 한 의식과 사유의 흐름을 상세히 표현했기에

읽어나가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는 않았습니다. 

매끄럽지 않은 번역 탓인지 아님 너무 빼곡하게 활자가 가득한 책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대로 행하는 일은 쉬운 일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신념이 옳은지를 끊임없이 묻고 고민하며 되짚어 보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예요.

치열한 자기 점검은 무엇보다 유연한 사고를 필요로 하지요.

자신이 처한 좌표를 끊임없이 확인하고 자신이 보고 느끼는 것을 편견없이 수용하며

자신에게 정직하게 그리고 엄격하게 살아가는 사람을 지성인, 혹은 지식인이라고 한다면

리 호이나키는 누구보다도 실천적 지식인, 실천적 지성인의 삶을 구현한 사람입니다.

'좋은 삶'이 어떤 것인가를 끊임없이 고민하고 찾아내어 실행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아다닌

그의 생애는 비틀거린듯 보여집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 도도히 흐르는 리 호이나키 개인의 진실을 향한 의지는 조금도 휘거나 굽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저자는 도미니크 수도회에 들어가 맨해튼의 빈민구역에서 사목 활동을 했으며

푸에르토리코에서는 이반 일리치를 만나 평생의 벗으로 삼았습니다.  

남미에서 주로 일하고 연구했던 그는 미국으로 돌아와 박사 학위 논문을 준비하는 도중

베트남 전쟁으로 인한 조국에 실망하고  베네수엘라로 자발적 망명을 하지요. 

후에 망명지에서 다시 미국의 대학 교단으로 돌아온 그는 정년보장 교수직을 앞두고

시골로 가서 농부가 됩니다.  그리고 한 때는 대학의 청소부가 되기도 하지요.  

 

삶의 순간마다  혼란 속에서 비틀거리고, 실수를 하고, 도덕적 일탈을 하면서도 나는 하나의 목적을 향해서 가는 오디세우스적인 여행만이 뜻이 있으며, 의미를 추구하는 사람의 갈증을 식혀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목적지는 여행의 의미를 밝혀줄 뿐만 아니라, 또한 사람으로 하여금 실패의 부끄러움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한다............나의 주된 관심사는 하나의 근원적인 통찰을 예시하려는 것이다.   즉 ' 진보'에 대한 약속은 거짓이며 끔찍하고 잔인한 덫이라는 것이다.    

나의 이야기는 오직 한 가지 점 - 의문이라는 씨앗을 뿌리고 있다는 점에서 정당화될 수 있다.

- 저자 서문에서 -

 

헬렌과 스코트 니어링 부부, 웬델 베리, 시몬느 베이유 그리고 도로시 데이 등의 영향을 받은 그는

사람은 정신과 육체 모두를 써서 살아야 하되, 자신이 살고 있는 역사적 순간에 적합한 태도로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대학 강단에 있을 때나, 농부로 있을 때,  혹은 지역 사회에서

바닥의 삶을 경험하며 살아가는 때에도 그는 자신에게 끊임없이 질문하며 역사의 순간 순간

자아와 사회에 대한 성찰을 행하고 있습니다.

 

현대 산업사회가 가져온 풍요가 어떤 후유증을 가져왔는지,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이룬 기술 영농의 결과로 나타난 농산물의 잉여가

무엇을 담보로 행해졌는지,

소비사회가 조장하는 탐욕이 인간 관계를 어떻게 왜곡하는지에 대해 그리고

현대 의료 시스템이 인간의 존엄과 품위를 앗아가며 어떤 방식으로 인간을 소외시키는지에 대해

예리한 지적을 하지요.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은 가난한 사람들을 치유하거나 그들을 주류에 합류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은 프로그램을 만들고, 사람들을 개종시키고, 기금을 모으거나 큰 건물을 세우기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그리고 가난한 이들에게 불가피하게 고통을 주는 상처들을 폭로하기 위해서 여기에 있다.  우리는 우리의 심장을 돌에서 살로 바꾸어주는 래디컬한 수술을 받기 위해서 여기에 있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자기확대의 욕망을 드러내는 것이거나 뻔뻔스러운 사회사업 전문가주의로 떨어질 것이다. 

(56쪽 - LA 카톨릭노동자센터의 제프 디트리치-)

 

리 호이나키는 월든 호숫가의 소로우나 기독교 아나키스트인 애먼 헤너시의 생애에 많은 공감을 합니다.   세상은 이런 '거룩한 바보'들의 저항에 의해 그나마 숨쉴 수 있는 곳이라고요.

 

나는 가능한 한 깊이 아나키스트 전통 속으로 내 몸을 던져, 자유주의 경제학의 풍요에 대해 깊고 크게 울리는 소리로 '아니오'라고 말할 필요가 있다.   나는 내가 당연히 '아니오'라고 해야 할 장소를 모조리 찾아내고, 외설적인 기관, 관행, 이미지에 대해 '아니오'라고 해야 한다....이것은 산업, 관료체제에 대한 전면적인 비협력으로 나아가기 위한 것이며, 수많은 희생자들의 고통을 나누면서 현대적 신화가 주는 안락, 특권, 안전을 거부하는 길을 찾기 위한 것이다.  (335쪽)

 

국가적 차원, 사회적 차원의 정의가 아니라 개인 안에서의 정의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생각하게 한 책이었습니다.

끊임없이 고민하고 치열하게 사유하는 과정에서 돌로 변한 우리의 심장이 다시 살로 회복되는

길이 '정의'라고 말하는 책이었어요.

너무 똑똑한 사람들이 이끌고 가는 지금의 세상은 우리를 너무 무디게 만들어버렸다는 생각이

듭니다.   부패와 타락이 만연한 세상에도, 타인의 고통에도 별반 충격이 없는 우리의 심장은

언제 다시 섬세한 감각을 회복할런지 모르겠지만 리 호이나키의 이 책이 무디어진 우리의

의식과 감성에 신선한 충격을 주기에 충분하다 느꼈습니다.  

책장을 덮는 순간 쏟아지는 빗줄기 속 한진중공업 크레인 위의 김진숙씨가 떠오르네요.

우리는 무엇을 '정의'라고 부르는지....

머리 좋은 철학자들에게 신세지지 않아도 우리 마음 속의 '정의'는 어딘가에 밑그림이 있겠지요.

 

품위있게 사는 삶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한 책이었어요.   

정말 좋은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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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의 배신 - 긍정적 사고는 어떻게 우리의 발등을 찍는가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배신 시리즈
바버라 에런라이크 지음, 전미영 옮김 / 부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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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넘쳐나는 '긍정적'이라는 단어에 피로감을 느낀적 있으신가요?

그렇다면 이 책이 피로회복에 확실한 도움을 줄 것입니다.

 

사실 수 년간 '긍정적'이란 말은 어떤 상황에서도 최선의 찬사였습니다.  

긍정적이지 못한 모든 것은 부정적인 것이고 부정적인 것은 나쁜 것이었죠.

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현실을 치밀하게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무비판적으로 막연히

'긍정'에 의지하는 건 결국 자기 최면이고  나아가 유사 종교 행위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요즘 '맹목적 긍정'과 '병적인 낙관'은 사회를 뒤덮은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되어버렸고

긍정 이데올로기는 사회 전반에서 하나의 산업으로 나날이 발전하고 있습니다.

각종 자기계발서의 범람과 여러 종류의 코칭 산업 그리고  동기유발 프로그램은

주로 기업의 고용주들에 의해 더욱 확산되고 있지요.  

심지어는 대학 강단에서도 이런 종류의 강의가 등장했습니다.

 

얼마 전 베스트셀러가 된 <시크릿>에 보면 '끌어당김의 법칙'이 나옵니다.

내가 원하기만 하면 나에게 모든 것은 온다...는 거죠.  

이는 원시 부족사회에서의 전통적인 공감주술 방식과 유사합니다.

이 정도면 긍정적 사고가 아니라  최면이고 자기 기만입니다.

결국 긍정주의가 문제가 있는게 아니라 긍정을 만병통치약으로 팔아먹다 못해 주술로 인용하는

그릇된 사고방식이 문제가 있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의 긍정의 왜곡이죠.  

이런 부적절한 '긍정'의 사용은 돌다리도 두들기고 건너는 지혜를 무시하게 됩니다.  

<시크릿>의 끌어당김의 마법은 '밀어붙임' 이기도 하거든요.  

마치 발걸음을 떼놓는 순간 없던 돌다리가 생길 것을 주문하는 것이죠.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 혹은 <시크릿> 같은 책들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휩쓰는 긍정의 열풍은

비판을 불허하고 불평을 잠재우는 이데올로기로 우뚝 섰습니다.

 

올바른 긍정적 의식을 넘어 무분별하게 퍼진 긍정주의.  그 폐해에 대해 신랄하게 파헤친

바바라 에런라이크의 이 책은 자신이 유방암 환자로 겪은 경험으로 시작합니다.

살아남은 사람은 모든 찬사를 받는 반면 병을 이기지 못한 사람은 자신의 병뿐 아니라

의지박약에 대한 책임까지 떠안아야 하는 모순이 저자의 경험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조금만 깊숙히 들여보면 긍정이라는 가면을 쓰고 행해지는 폭력과 위선과 기만을 저자는 눈치챘어요.

그리고 그녀는 충분히 조사하여 차근히 대항합니다.  

 

서점가를 휩쓰는 '긍정'이라는 단어는 어떻게 보면 요즘 기독교의 '믿음'과 비슷해 보입니다.

저자는 대형화된 교회의 성장 메커니즘을 차근차근 살펴봅니다.

교회는 기업식으로 접근해 교회 마케팅을 했고 여기서 '긍정'의 힘은 놀랍게 발휘됩니다.

 

 하나님은 나의 속도위반 딱지를 해결해 주고, 식당에서는 좋은 자리를 찾아 주고, 내가 책 계약을 딸 수 있도록  해 준다.(189쪽)

 

사실 내가 아는 대부분의 교인들도 저런 경우에 감사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부자가 되기를 원하시고, 좋은 것을 가지기를 원하신다는 거죠.

제가 알고 있는 성경은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는 정직함과 헐벗은 자에게 자신의

단벌 겉옷을 벗어주는 자비를 말하고 있습니다만...

 

기업과 대형교회 사이의 유사성은 그들이 성장의 메커니즘을 공유한 데서 나타납니다.

교회는 기업을 닮아 '죄'와 '구원'의 메시지는 뒤로한 채 긍정 마케팅으로 솜사탕 복음을 전파합니다.

기업은 교회의 신비주의를 차용하여 CEO의 카리스마와 직관적 리더쉽에 무조건적으로 의지하며

직원에게는 어떤 역경도 긍정의 힘으로 헤쳐나갈것이라는 긍정메시지를 심어주고 있지요.

다운사이징 국면에서 '긍정'의 힘은 해고된 노동자에게는 다시 회생할 수 있는 자기 최면의 역할을

하고 조직에 남은 직원에게는 동기유발의 아드레날린을 주입해주고 있거든요.

 

긍정적 사고는 시장경제의 잔인함을 변호한다.   낙천성이 물질적 성공의 열쇠이고 긍정적 사고 훈련을 통해 누구나 갖출 수 있는 덕목이라면, 실패한 사람에게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개인의 책임을 가혹하게 강요하는 것이 긍정의 이면이다.   (28쪽)

 

결국 신자유주의 시장경제에서 경쟁에 이긴 자는 긍정적 사고의 소유자로 찬사를 받지만

패배자는 그의 실패를 사회 시스템에 돌릴 여지 없이 실패한 당사자의 몫으로 돌립니다.

이렇듯 세속적 이익과 무분별한 긍정의 야합은 모든 책임을 개인에게 돌리는 부작용을 낳고 있어요.

마치 기도의 응답이 없음을 개인의 '믿음'이 없는 걸로 떠넘기는 것처럼요.

 

긍정적 사고의 핵심에는 불안이 놓여 있다....긍정적 사고를 위한 훈련은 수많은 모순적인 증거에 직면한 상황에서 믿음을 주입하기 위한 것이다....이런 훈련에 '자기 최면', '마인드 컨트롤' '생각 조절' 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이는 불쾌한 가능성과 부정적인 생각을 억누르고 차단하려는 쉼없는 노력, 곧 고의적인 자기 기만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참으로 자신감이 있는 사람들, 이 세상과 화해하고 자신의 운명과 화해한 사람들은 자기 생각을 통제하거나 검열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긍정적 사고와 실체적 용기 사이에는 아주 넓은 간격이 존재한다.   (25쪽)

 

저자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흔해빠진 긍정의 환상과 주술에서 벗어나 우리 앞에 놓인 현실이라는 벽과

정면으로 맞서 싸워야 한다고 말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는 긍정적 사고가 매우 유용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건 각 개인이 처한

독특한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겠지요.   긍정적 사고는 분명 개인을 행복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전체의 범위에서 일반화 한다면 부작용이 클거라 생각됩니다.  

대부분의 발전은 의심과 회의를 통해 한 계단 올라간다는 진리를 간과해선 안되겠죠.

꿈은 이루어진다......꿈만 꾸고 그 생각을 명확히 표현하며 속으로 되뇌이고  있으면 이루어진다는

것이 요즘 막장 긍정주의의 흐름입니다.   I can do it! 을 몇 번씩 외치면 된다는 거죠.

꿈이 현실이 되기까지에는 수많은 시행착오와 실패와 반성과 회의 그리고  좌절의 극복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시크릿>의 추종자들은 무시하고 있습니다.

 

긍정적 사고는 불안한 사람을 위한 진정제, 심리적인 문제를 겪는 사람을 위한 치료제에 머무르지 않는다.   긍정적 사고는 모든 사람에게 부과된 의무가 되었다. (140쪽)  

 

결국 왜곡된 긍정, 과잉의 긍정은 종교에 가까운 신념 체계가 되었습니다.

순수한 '긍정'의 모습은 이제 시장에서 이익을 창출하는 소비재로 변모했구요.

이제 넘쳐나는 긍정의 결과는 부정적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우리들이 슬슬 눈치챌 때가 된거죠.

 

저자의 결론은 비판하고 분석하고 사유하고 그리고 성찰하라 입니다.  

문제는 그 원인을 파악하고 문제가 되는 시스템을 고쳐가는 과정에서 해결됩니다.  

진정한 긍정은 문제의 원인을 따져보는데서 출발하는게 아닐까요?   하늘에 원망하지 않구요.

긍정적인 성격과는 좀 거리가 있는지라 이 책을 읽고나니 그간 우리 사회를 휩쓸고 있던

'긍정'의 압박에서 자유로와진 느낌이 듭니다.   주위에 넘쳐나는 긍정의 에너지를 가진 사람들 옆에 있으면 덩달아 긍정적으로 되기보다는 더 회의적이 되는 소심한 A 형인 저로서는요...ㅋ

 

요즘 긍정심리학은 정치적 보수주의자들이 주장하듯 기혼에 신앙심이 깊은 종교적 원리주의자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더 행복하다는 증거를 제시해 보수주의자들을 흐뭇하게 만들고 있다.  결국에 행복이란 것은 자신의 삶에서 느끼는  만족감으로 측정되는 만큼 아무래도 유복한 사람들, 사회 규범에 순응하는 사람들, 신앙을 위해 판단을 삼간 사람들, 사회의 불의에 크게 개의치 않은 사람들이 그럼 심리상태에 근접하기 더 쉽다.(236쪽)

 

건전하고 상식적인 긍정주의는 삶에 활력을 주는 게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저자가 문제삼고 있는 것은 과잉으로 넘쳐나는 긍정의 남용과 오용입니다.

저자는 낙천주의와 희망이 동일한 것이 아님을 지적합니다.  

건강한 낙관을 희망의 근거로 삼는 비약이, 그 심란한 간극이 결국엔 우리의 등 뒤에서 부메랑으로

돌아온다는 것을 요즘의 긍정주의는 절대로 말해주지 않거든요.

우리가 무분별한 긍정주의에 쉽게 현혹되어서는 안되는 이유입니다.

긍정주의자들은 자칭 진보주의자라 말하고 있지만 결국 긍정주의는 보수주의자들이 기대기 좋은

쉽고 편한 이데올로기가 되어버린 게 현실이지요.

긍정적 사고로 이득을 본 사람들은 부자들과 대형 교회같은 긍정사고 사업자들 뿐이죠.  

서점가를 휩쓴 '긍정' 시리즈에 제대로 한 방 먹인 책입니다.

 

요즘 어디든 넘쳐나는 '긍정'의 힘은 그 모든 포커스가 개인의 건강과 부를 통한 성공에 있습니다.

건강한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여기서 그 수상쩍음을 감지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순교자의 신앙을 현세의 복으로 바꿔버린 기업적 교회들이 어딘지 미심쩍은 것처럼요. 

함께 하는 삶, 더불어 사는 삶이 아니라 개인의 이기심이 극한까지 증폭되면서 차마 그 노골적인

모습을 그대로 드러낼 수 없어 슬쩍 모습을 바꿔버린 것이 요즘의 긍정주의가 아닐까...라는

개인적인 생각도 들었습니다.  

 

너무 부정적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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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받지 않을 권리 - 욕망에 흔들리는 삶을 위한 인문학적 보고서
강신주 지음 / 프로네시스(웅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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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에 흔들리는 삶을 위한 인문학적 보고서....라는 부제를 달고 있습니다.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물결에 몸을 맡기고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게 하는 책이예요.

자본주의는 이제 우리의 삶과 너무나 밀접하고, 친숙합니다. 

이 친숙함이 자본주의에 의해 받는 치명적인 상처를 의식하지 못하게 한다고 말합니다.

자본주의에서의 자유는 돈에 의한 자유, 다시 말해 소비의 자유일 뿐이지요.

그러니 돈이 없을 때에 박탈당한 자유는 우리에게 상처를 줄 수 밖에 없습니다.

이 '돈'은 은근히 마약같은 중독성이 있어서 떨어지면 불편하고 당황스럽지요.

때론 돈이란 게 우리의 일상을 파괴할 정도로 삶에 치명적인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에 즉, 돈에 상처받지 않고 살아가는 법이 가능할까요?

아마도 삼성 이건희 회장이나 법정 스님이라면 가능할까요?

하지만 울트라 재벌이 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고

법정 스님처럼 자본주의의 물살을 거스르는 일도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요.

그건 우리의 본성을 제한하고 절제하는 일이기도 하거든요.

 

'허영'은 인간의 본성이라고 합니다.

우리 안에서  대책 없이 그리고 한없이 증식하는 이 허영 덩어리가

자본주의 사회를 돌아가게 하는 동력이라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었어요.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라는 라캉의 말처럼 허영은 끝없는 욕망으로 소비를 창출하여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거대한 축이 되고 있습니다.

 

암튼, 저자는 문학자 네 사람과 철학자 네 사람을 짝을 지어 우리의 무디어진 의식을 깨우고 있어요.

자본주의와 도시, 그리고 소비가 일상에서 우리에게 어떤 상처를 입히고 있는가에 대해서요.

이상과 짐멜/보들레르와 벤야민/투르니에와 부르디외/유하와 보드리야르...저자의 메뉴판입니다.

이상과 보들레르 그리고 투르니에, 유하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상처의 아픔을

짐멜과 벤야민, 부르디외 그리고 보드리야르를 통해 이론적으로 검증해 나갑니다.

 

이상의 '날개'에 등장하는 인물은 '돈'이 주는 '위력'을 알아가지요.

아내가 매춘으로 번 돈을 받는 남편은 늘 골방에서 잡니다.   하지만 그가 아내에게 돈을 쥐어주던

어느 날 밤 그는 아내의 방에서 자게 되지요.   여기서 돈의 거래는 곧 심리의 거래인 것이예요. 

부도덕함을 상쇄하려는 아내가 내미는 돈,  어느 날 돈을 내밀고 아내에게 당당한 남편.

이상은 사람 사이의 관계를 돈이 결정하는 순간을 포착해서 돈의 논리를 성찰한 작가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모든 것' 이 되고 말지요.   돈은 곧 신이고, 신앙입니다.

이렇듯 화폐경제는 개인과 개인의 인격적인 관계를 와해시키고 화폐를 통해서만 연결되도록 한

시스템입니다.   그런 이유로 짐멜은 화폐경제가 결국 개인주의를 가져왔다고 말하고 있어요. 

짐멜은 또한 우리 자신의 내면 세계가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특정한 공간에 따라 구성되어졌다고

말합니다.    산업자본주의가 가져온 '도시화'는 개인의 의식을 변모시키기도 하지요.

 

공간은 단순히 우리가 살아가는 물리적 배경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공간에는 인간을 길들여서 그에 맞는 인간형을 만들어내는 힘이 있습니다. (77쪽)

 

우리의 노동은 소비를 위한 노동이 되었습니다.  

노동의 댓가로 소비를 한다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지만 이 책에 등장하는 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얘기하는 것은 자본주의가 소비를 조장한다는 거죠.    끊임없는 소비가 있어야 새로운 상품을

만들 수 있고, 필요 이상의 소비가 있어야 계속적으로 생산이 가능한 시스템이 돌아간다는 것이죠.

결국 이 사회는 소비가 아니라 낭비를 조장하는 사회입니다.

 

휘황찬란한 불빛이 번쩍이는 백화점은 소비 사회의 정점에서 인간의 욕망과 허영을 낚아채는

각축장이 되고 있습니다.     상품은 필요의 대상이 아니라 욕망의 대상으로 소비를 창출합니다.

유행과 트렌드는 자본주의가 만든 소비 시스템이죠.

산업 자본주의는 허영이라는 인간의 치명적 약점을 집요하게 파고들어가거든요. 

화폐경제는 돈에게 거의 절대적인 권력을 주었고  사람들은 그 권력에 저항없이 복종합니다.

 

화폐의 가치를 절대시하는 자본주의는 누구에게나 다양한 형태의 트라우마를 남깁니다.   자본주의는 우리 본성에 저절로 맞는 것이 아니라 고통스럽게 배워야만 하는 경제 규칙이기 때문입니다.  (29쪽)

 

보드리야르는 산업자본주의 발달의 핵심에 기술 개발에 따른 생산력의 비약적 발전이 있던 것이 아니라, 인간의 허영과 욕망을 부추기는 유혹적인 소비사회의 논리가 있다고 선언합니다.  (334쪽)

 

산업자본주의의 폐해와 상처를 날카롭게 해부하고 그 대안을 끊임없이 모색한

작가들과 철학가들의 노고를 알기 쉽게 잘 버무려 준 책입니다.  

상처받지 않는 방법은 숙제로 남겨두었어요.   이 책은 상처받지 않을 권리에 대해 쓴 글이거든요.

저자는 책 말미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적 욕망들은 그 힘이 너무도 강해서 하루아침에 종식시킬 수 있는 것들이 결코 아니라구요.

하지만 우리의 삶이 얼마나 자본주의에 의해 상처받고 있는지를 절실히 느끼기 시작한다면 문제는

달라질 것이라 얘기합니다.   자신이 품은 상처의 심각성을 뼈저리게 자각하면 실천도 그만큼

집요하고 치열할 것이라구요...

 

우리에게 친숙한 자본주의를 낯설게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을 마련한 저자의 글솜씨는 탁월합니다.  

무거운 주제를 경쾌하게 풀어주고 있거든요.    

물고기가 물 속에서 살아가듯...우리는 자본주의에서 살면서 자본주의에 맞는 인간형으로  만들어집니다.    

묵자의 묵비사염이라는 말처럼요... 

자신에게 물든 그것이 무엇인지....이제는 허물을 벗고 돌아보아야 할 시간이 온듯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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