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테이스트 : 음식으로 본 나의 삶
스탠리 투치 지음, 이리나 옮김 / 이콘 / 2024년 12월
평점 :
마음도 몸도 시린 연말을 보내고 있음에도 참 따뜻한 마음이 들었다. 이토록 포근하고 웃음 지을 수 있었던 책은 오랜만이었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 나이젤이라고 하면 모두 알 것이다. 배우이자 감독, 프로듀서 그리고 작가 스탠리 투치, 그의 책 덕분이다.
스탠리 투치는 어렸을 때부터 다양한 나라에서 자람과 동시에 음식에 조예가 깊은 위 세대들과 함께 지내며 음식과의 관계성을 돈독히 쌓아왔다. 책을 읽어 내려가며 이 사람에게 음식은 중요하다는 것을 넘어 인생 그 자체였다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나는 이 사람만큼 음식에 조예가 깊지는 않고 훨씬 짧은 인생을 살았지만 나에게 녹여져 있던 많은 음식들과 이야기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바로 앞에서 언급했듯이 나는 다양한 나라에 오랜 기간 살아보지도 않았고 음식에 무지한 사람인 쪽에 가까워서 이 책을 읽을 때 수시로 메모하고 검색을 했다. 부이토니, 체폴레, 팀파노, 디제스티보 등등 모르는 것들 천지였지만 신기했고 궁금한 마음이 크게 들었다. 그 와중에서도 인상 깊게 남은 한가지는, 스탠리 투치가 카페 룩셈부르크에서 처음 접한 마티니다. 대학교를 막 졸업한 스탠리 투치는 종종 카페 룩셈부르크에서 시간을 보내며 마티니를 마셨는데, 혼자 사색을 하며 식당에 온 다른 사람들을 보며, 또는 멍하니 많은 생각을 한 것 같았다. 뭐 그런 생각들, 우리가 보통 하는 일상의 고민들. 그렇게 마티니는 그의 삶에서 빠질 수 없게 되었고, 영화 촬영 때 “트레일러-티니”라는 마티니를 좋아하는 모임을 만들고, 휴대용 마티니 키트를 들고 다녔다는 게 신기했다. (나는 그저 물만 많이 마실 뿐인데…) 영화 촬영을 하다 방문하게 된 아이슬란드에 멋진 식당과 음식들이 많다는 것도 기억에 남았다. 처음 듣는 요리 이름이 가득했는데도 맛이 궁금해지고 배가 저절로 고파졌다.
특히 이야기의 초반에는 스탠리 투치가 어렸을 때 가족들과 함께 지낸 이야기들이 나오는데, 그 시절 가족들과의 엄청난 크리스마스 음식들에 눈이 커지지 않을 수 없었다. 크리스마스이브에는 에피타이저와 두 가지 코스, 디저트. 그리고 크리스마스 날에는 무려 12~16인분의 팀파노라는 음식을 만들어 먹는다는 게, 우리나라의 추억이나 다름없었다. 온 가족의 정성이 담긴 음식을 보고 있자니, 초~중학생 때가 생각났다. 그 좁은 집에서 혼자서 가족들을 위한 명절 요리를 잔뜩 만들어 내어주시던 외할머니가. 하나뿐인 손녀가 좋아한다고 직접 담가주시던 간장게장, 하얀 살이 포근하게 입을 가득 채우던 도미 조림. 혼자 고생하셨기에 지금 할머니의 몸은 성치 않지만, 가끔 그때를 상상한다. 거의 20년 전임에도 생생하다. 이야기를 써 내려간 스탠리 투치도 이런 기분이었겠지 하며 생각해 본다.
사실 책을 읽어 내려가며 이 사람의 인생이 참 부러웠다. 많은 나라에서의 삶, 가족과 함께 특별한 음식을 먹은 소중한 기억이 많은 삶 등등. 그런데 책을 다 읽고 찬찬히 생각해 보니, 나에게도 이런 일들은 많았다. 기억 저편으로 넘겨두었던 것을 꺼내지 않았던 것뿐이었다. 비록 나의 이야기를 책 한 권으로 엮어 낼 기회는 없겠지만, 나의 소중한 기억을 오래오래 기억할 수 있는 따스한 책이다. 얼어붙은 공기에 따스한 숨을 불어넣어 주는 책, 다들 한번 펼쳐보시길 바란다.
덧, 책 속 프리타타 레시피를 따라 만들어 먹으면서 이 글을 썼다. 포근하고 맛있었다. 제대로 된 프리타타를 먹어본 적은 없지만 간단한 레시피인데 맛은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