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만나는 대만사 수업 - 누구나 쉽고 재미있게 이해하는 400년 대만의 역사 드디어 시리즈 2
우이룽 지음, 박소정 옮김 / 현대지성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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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역사 교사이지, 역사학자가 아닙니다. 역사학자는 관심 있는 분야를 세밀하고 전문적으로 연구하지만, 역사 교사는 사람들에게 역사에 대한 흥미를 불러일으키고 역사를 쉽게 배울 수 있도록 가르치는 일을 합니다.”
- p.15 ‘머리말’中

이 책은 제목에서 예상할 수 있듯, 역사학자의 집요하고 깊이 있는 특정 시기나 분야, 인물에 대해 톺아보는 역사서 라기 보다는, 현직 중학교 역사 교사가 독자들에게 교실에서 제자들에게 수업하듯 대만의 400년을 훑어내는 모양을 취하고 있습니다. 물론 독자의 선험적 데이터에 따라 지루하고 삭막한 국사 수업시간의 추억을 보유하고 있다면 모르겠지만, 비교적 흥미롭고 즐겁게 국사 수업을 경험한 저는 이 책의 이런 태도가 무척 흥미로웠고 읽어내는 내내 정말 교실의 한구석에 자리하고 앉아서 완전 집중해서 수업을 듣는 기분으로 거의 단숨에 완독했습니다.

수업의 시작은 훨씬 옛날 옛적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다우족, 베이난족, 쩌우족의 신화를 통해 대만이 발딛고 있는 땅의 시작부터 들려주는데 이게 꽤 흥미진진합니다. 황당무계하지만 이게 또 데자뷰도 느껴지고 그 땅만이 지니는 고유성을 생각하게도 해주니 제법 괜찮은 시작인 셈입니다.

책은 시기별로 선사시대부터 반청항쟁기까지, 청나라 통치 시대, 일본 통치 시대, 중화민국 시대, 이렇게 4부로 구성되어있고, 이슈별로 장으로 묶어내고 있습니다.

“핑푸족은 청나라의 글과 법을 몰라 한족에게 완전히 놀아나고 있습니다. 한족의 관리, 투기꾼, 상인 들이 순진무구한 사람들을 상대로 벌이는 이런 악랄한 사기 행각에 분노를 금할 수 없습니다!”
- p.119, 원주민 핑푸족에 대한 청의 약탈과 사기에 대한 조지 레슬리 맥케이 선교사의 분노

한반도의 상황과 다르지 않게, 대만의 역사도 주변 열강들이 넘보는 대상이었고, 당연하게도 청나라와 일본에 의한 통치시대를 거치게 됩니다. 이는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들의 삶의 터전을 침범하고 무자비로 약탈하고 각자의 이익대로 나눠가진 열강들의 역사와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이런 역사적 사실들을 바라보는 현재의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는 서있는 지평에 따라 또 다르게 보여지기도 합니다. 대만에 경우도 다르지 않고, 여전히 내부적으로 논쟁의 소지가 있는 듯합니다. 우리나라의 일제 강점기를 바라보는 뉴라이트적 시각이 득세(?)하는 작금의 상황이 떠올라 씁쓸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쯤 원주민의 시선으로 이 사건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을까요? 개산이 아닌 침략, 무번이 아닌 토벌, 번해나 번란이 아니라 원주민이 자기 땅을 지키려고 벌인 신성한 전쟁이었다고 말입니다. 역사를 공부할 때 다양한 민족의 다원화된 역사관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부디 대만의 역사를 공부하면서, 다양한 민족이 겪었던 고통을 이해하려고 노력해보길 바랍니다.”
- p.126

개인적으로는 중학생 시절, 금기시 되고 이야기되길 쉬쉬하던 이야기들을 조심스레 들려주던 국사 선생님을 기억합니다. 제주4.3과 광주항쟁, 베트남전에서 저지른 한국 군인들의 만행 등. 지금은 정리되거나 진행 중인, 사과가 이루어지기도 했던 역사적 아픔과 어두운 부분들에 대한 인사이트를 열어주려 했던 그 선생님을 자연스레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지정학적 위태로운 위치와 한때 수출대국의 명성이 지금은 시들해진 듯도 하지만, 여전히 TSMC의 반도체 그리고 대만에 뿌리를 두고 있는 엔비디아는 다시금 대만의 힘을 기억하게 하는 현재진행형의 증거다 싶습니다. 그리고 냉전시대를 지나 작금의 신냉전 시대를 통과하며 외교정책과 유연하고 막강한 문화선점으로 세계 선진국 진입을 노려왔고 여전히 노력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현위치를 돌아보기 위해서, 대만의 역사를 바라보는 것은 유의미하다 싶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이 책 <드디어 만나는 대만사 수업>은 흥미롭게 대만을 만나보는 에피타이저로 꽤나 괜찮은 선택이 될 듯합니다.

미식과 쇼핑을 위해 찾는 대만 여행 전에 그 나라의 실체를 이해하고 방문한다면 여행의 재미도 배가 될 듯 하고.

그나저나, 조만간 대만 여행이나 출장, 일정 잡아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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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대만역사 #대만사 #타이페이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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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케치 쉽게 하기 : 풍경 드로잉 (리커버) - 그림 그리는 즐거움을 배운다! 스케치 쉽게 하기 4
김충원 지음 / 진선북스(진선출판사)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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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네임드김충원의 풍경 드로잉 실전 책입니다. 숨겨진 뒤편의 풍경 드로잉 연습장까지 품은 이론과 실습의 두 마리 토끼를 포획한 책이고요.

 

고등학교 시절, 창덕궁에서 미술 대회가 열리는 날이었습니다. 아침 일찍 서둘러 도착하고 보니 그만 수채화 팔래트를 집에 두고 온 것이었습니다. 하는 수없이 연못 위에 떠 있는 연잎과 꽃을 연필로만 그려서 제출했는데, 놀랍게도 가장 큰 상을 타게 되었습니다. 스케치에 대한 저의 사랑은 그때부터 시작되었고, 어느덧 사십 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 p.4 ‘시작하기 전에

 

이 책이 처음 나온 것이 2007년이고 올해로 33쇄를 찍은 스테디셀러인데, 책의 처음은 김충원 작가의 자랑이자 스케치 쉽게 하기라는 시리즈에 대한 첫 마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물론 연배를 계산할 힌트도.

 

그렇게나 중요한 바탕인 스케치. 특히 이번 책은 풍경을 대상으로 하는 스케치에 대해 체계적으로 다루고 또한 중간 중간 연계하는 실습이 가능하도록 연습장을 부록으로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풍경 스케치를 하고 싶은 이에게 기초적인 아웃라인을 그려낼 수 있는 헬스장 같은 책 되겠습니다. 물론 더 많은 스킬을 키워내기 위해서는 책에서 제공하는 아웃라인에 가지를 치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도록 나아가야 할 지난한 연습과 연습은 당연히 독자의 몫이겠습니다.

 

마음의 눈으로 대상을 관찰하고 전체적인 느낌을 단숨에 표현하기 위해서는 완벽한 묘사에 대한 기대보다 자신의 눈과 손을 믿는 자신감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 p.27

 

만약 피치 못할 사정으로 그림의 완성을 뒤로 미루어야 할 때에는 현장의 생생한 이미지가 머릿속에 남아 있을 때 스케치 위에 특별한 강조 사항이나 잊기 쉬운 세부적인 특징 등을 적어둡니다. 채색을 하기 위해서라면 중요한 색깔 등을 메모해 두는 것도 좋습니다.”

- p.62

 

특히 눈에 띄는 대목들은, 단순한 드로잉 테크닉만을 나열하지 않고 중간중간 그리는 이의 태도를 일러준다거나, 야외 스케치에서 의도치 않게 마주하는 상황에 대처하는 팁들을 공유하는 등의 친절한 조언들이었습니다. 오랫동안 미술학도들에게 사랑받는 컨텐츠를 내놓은 저자의 공력이 느껴지는 부분이기도 했습니다.

 

단계별로 제시되는 포인트 레슨 식의 책의 항목들을 따라가고 연습장을 채워내면 어느 정도 자신의 눈과 손을 믿는 자신감을 지니게 되도록 꾸려져 있는 탄탄하고 따뜻한 책,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스케치쉽게하기풍경드로잉 #김충원 #김충원미술교실 #진선출판사

#도서제공 #서평단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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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피라이터의 일 - 11년간의 모든 기록이 담긴 29CM 카피라이터 직업 에세이
오하림 지음 / 흐름출판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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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만나는 모든 이에게 글만이 줄 수 있는 감동과, 전략적 메시지로서의 글의 유용함과, 또 글이라는 막연함에 대한 고민과, 글이라는 도구를 계속 써나갈 내일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고 싶습니다.”

- p.11 ‘들어가는 글’ 中


이 책은 직업에세이. 현직 카피라이터가 자신의 직업 입문기에서부터 직업의 안팎을 담담하지만 꼼꼼하게 소개하는 책이자,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인생을 살아내는 이들에게 전하는 격려와 동병상련의 공감을 담은 책이며, 앞으로 카피라이터가 되길 꿈꾸는 이들이나 현재 그 일을 하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공유하는 실질적 팁까지 담고 있는, 욕심 많은 책입니다. 한편으론 작가 본인의 포트폴리오, 이력서, 자기소개서이기도 합니다.



“온 세상이 남의 약점을 잡느라 바쁘고 단점을 숨기기에 바쁜데, 장점만 눈에 불을 켜고 찾아다니는 일을 한다는 것은 꽤 낭만적인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주 감동하고, 자주 사랑에 빠지는 것이 습관이 된 건 덤입니다.”

- p.21


“하지만 이젠 일을 오래하기 위해서 회사와의 거리두기가 필요하단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회사의 날씨에 내 상태를 맡겨버리면 위험하다는 것도 알았죠.”

- p.95


“반짝이는 결과는 찰나일 뿐, 창의력을 요하는 이 직업은 지루한 반보과 끝없는 고민이 99%를 차지합니다.”

- p.97


“오래 일하기 위해 필요한 건 쓰러지지 않는 마음이 아닌 쓰러져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마음입니다. 일은 언제나 우리를 쓰러지게 만들 테니까요.”

- p.102


책을 읽어가노라면 밑줄 칠 문장들이 제법 많이 등장합니다. 엉뚱한 감성에서부터, 단순한 이유들과, 누군가와의 소통에 더없이 중요한 금언이 될 문장들 말입니다. 역시 글을 쓰고 말을 다루는 작가다운 가지런하고 분명한 의도와 문장들이 독서하는 눈과 머리에 걸림 없이 잘도 지나가고 마음 한켠에 쌓이곤 합니다.


이 책은 그렇게 느슨하지만 3부로 나눠져 있고, 각각 카피라이터의 일에 대해, 작가 자신이 지나온 일과 직장에 대해, 그리고 카피라이터로 살아갈 앞으로의 시간들에 대해 담아내고 있습니다. ‘느슨하지만’을 굳이 넣은 이유는, 세가지 이야기가 각 부 여기저기에서 출몰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느슨함이 주는 편안함이 있는데, 아마도 그저 딱딱한 업무 인수인계나 자기개발의 목적이 아닌, 그저 사는 일, 하는 일을 들려주는(!) 방식이기 때문 일겁니다.


“이 혼란스러움의 구덩이 한가운데서 저는 가능성이라는 다리를 놓고 카피라이터라는 내 정체성을 지키면서 혼란한 시대에 대한 대답을 준비하려고 합니다.”

- p.90


작가는 자신의 일 혹은 직업을 자신의 ‘정체성’이라고 말합니다. 그 일 자체가 보여 지는 것 이외의 다양한 분야와 걸쳐있음을 알려주면서 길어진 기대수명과 비례해서 몸담을 직장이라는 틀거리의 확장을 꾀하는 바, 일이 정체성이 되게 하는 태도를 선택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연일 연령의 구분이 변화하고 있으며 정년 연장이 가시화되고 있으며, 금전적인 이유 외에 삶을 영위하는 것에서 일은 정체성이라 여겨질 만큼 지분이 커져만 가고 있음 일겁니다.


특히 3부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은 직장인생 초보들이나 한 두 번의 번아웃을 경험한 이들에게 적절한 보약같은 이야기들을 담고 있어서 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물론 직장생활과 사회생활에 어느 정도 노회한 제 입장에서는 그저 귀여운 대리급 직원이 신입들에게 들려주는 술자리 조언 같기도 해서 귀엽기도 했습니다만, 여전히 선명한 그 시절에 서 있던 저 스스로의 모습들을 돌아보게도 해서 코끝이 시큰해지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작가 스스로 터득한 비법들(?)을 독자들에게 조곤조곤 들려주면 이 책은 마무리됩니다. 옳고 그른 선택이 아닌, 스스로 옳게 만들 선택만이 있을 거라 믿으면서.



“죽은 물고기만이 물의 흐름을 좇는다는 독일의 속담처럼, 나를 잃지 않기 위해선 변하지 않을 소중한 것들을 붙잡고 스스로의 항해를 시작해보는 겁니다.”

- p.117



#카피라이터의일 #오하림 #흐름출판

#무신사 #29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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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와의 티타임 - 정소연 소설집
정소연 지음 / 래빗홀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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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나왔던 작가의 소설집 <옆집의 영희 씨>에 있던 10편의 단편에, <교실 맨 앞줄>, <계단>, <발견자들>, <스마트워치>를 추가해서 14편의 단편을 엮어서, ‘낯선 세계의 오래된 사랑’과 ‘아득한 어둠 저편의 아름다움’의 두 개의 장으로 나눠 담았습니다.

“나는 일흔네 번째 세계에서 앨리스 셸던 부인을 만났다.”

- p.11 <앨리스와의 티타임> 中

설정과 캐릭터들을 조금 가리고 나면, 정소연의 단편들은 과연 SF소설이 맞나 싶을 정도로 살가운 면이 다분한 이야기들을 장착하고 있습니다. 이 소설집의 표제작이기도 한 <앨리스와의 티타임>의 첫 문장은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투로 멀티유니버스를 쓰윽 끌어와서 이야기를 끌어갑니다.

그런가 하면, 이웃에 외계인이 살거나, 육체적 장애가 바둑 이야기로 치환되기도 하면서 현재의 누군가의 이야기가 되더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상황과 사건 속에서 또 천연덕스런 상상력으로 과하지 않게 지금의 우리를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어쩌면 공익 인권변호사라는 작가의 부캐(?)가 실마리가 될지도 모를, 소설들 여기저기에 뭍어있는 공공선이랄지 불평등과 차별의 문제 등을 문득 떠올리게 하는 따스함은 그래서 더욱 SF소설이지만 SF소설 같지 않게 만드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두 외계인의 얼굴을 응시하며, 수십만 하루가 지나도록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그들의 감정에 대해, 수백만 명에게 총을 겨누고 온 땅을 피로 적신 다음에도 그들이 살아가는 내내 조금도 변하지 않을 아이 하나를 거두겠다는 외계의 인간다움에 대해 생각했다.”

- p.221 <입적> 中

“내가 습관적으로 만지작거렸던 귓등의 상처는 역사적인 폭발의 흔적이 아니라 내가 기억하지 못한 가족과의 연결고리였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며 이제 습관이 된 대로 귓등을 만지작거렸다. 사라지지 않은 그 흉터 뒤에는, 나는 잊어버렸지만 어딘가에서 누군가는 기억하고 있던 과거가 있었다.”

- p.243 <귀가> 中

이토록 살가운 SF소설이라니, 단편집이지만 다음 소설로 쉬이 넘어가지 못하게 하는 동심원의 파문들이 자꾸만 마음 한켠에서 일렁이게만 하는 이야기들 앞에선 그렇게 속수무책이 되고야 말게 하는 구석이 있었습니다.

저에게 있어서 소설은 두 가지로 나눠집니다.
끝까지 읽어내게 하는 이야기의 힘이 있는 소설과 그렇지 않은 소설. 이 분류의 틀거리에는 장편, 단편의 물리적 분량과 무관하게 동일 적용됩니다.

소위 벽돌책이라 불리는 5-600 페이지의 장편소설이라고 하더라도 시작부터 끝까지 그냥 탄탄한 구성과 이를 쌓아가는 문장들의 힘에 이끌리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50페이지 미만의 단편소설임에도 그저 그런 엉성한 구성과 이도저도 아닌 문장들에 휘둘리다 몇 번이고 쉬었다가 겨우 끝내거나 중간에 포기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정소연 작가의 이야기는 그렇게 제겐 끝까지 읽어내게 하는 분명한 힘을 보유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소설집의 마지막에 얹어두신, “소설이라는이 배가 당신과 나 사이의 긴 항해를 버틸 만큼 튼튼하기를, 시공간을 넘어 언젠가 결국은 당신에게 도달하기를” 바랐던 정소연 작가의 바람은 저에게는 그렇게 안전히, 마침내 도달했다고 답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데뷔 20주년이 되는 2025년에 나머지 단편들을 엮은 소설집 <미정의 상자>를 조금 조바심 내면서 기다리겠노라 답하고만 싶어졌습니다.

#앨리스와의티타임 #정소연 #정소연소설집 #래빗홀 #인프루엔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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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일드 - 4285km, 가장 어두운 길 위에서 발견한 뜨거운 희망의 기록
셰릴 스트레이드 지음, 우진하 옮김 / 페이지2(page2)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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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CT (Pacific Crest Trail)은 미국 서부 해안을 멕시코 국경에서 캐나다 국경까지 걷는 4285Km의 트레킹 코스입니다. 이 소설 <와일드>는 작가 본인이 출간 15년 전에 PCT를 실제 완주하며 경험한 일을 놀랍도록 디테일하게 적어내린 여행기이기도 합니다.  


도보여행자들의 커뮤니티에 가끔 들어가보면, 주로(?) 등장하는 도장깨기의 대상이 제주 올레길인데 총 거리 420 여 Km, 그리고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이 800 Km, 그런데 PCT는 장장 4285 Km이니 그 거리가 가늠이 되질 않습니다. 그 거리를 도보로 완주한다라... 하루에 평균 25~30 Km를 걷는데, 산길이 대부분이고 눈으로 막히면 우회하기도 하고, 방울뱀과 곰 같은 들짐승을 만나기도 한다는데. 

셰릴은 그렇게 계획한 3개월의 PCT 완주를 위해, 레스토랑에서 돈을 벌어 필요한 물품들을 준비하고 배낭을 채웁니다. 하지만 배낭을 매고 일어나지도 못하는 스스로를 발견합니다. 불필요한 것들. 그렇게 스스로의 인생의 가난과 불운과 갈팡질팡을 떠올립니다.  

그저 걷는 듯 하지만, 한걸음 한걸음이 인생의 뒤를 돌아보며 걸어가야할 앞을 내다보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발에 맞지 앉는 등산화같이 늘 불편했던 관계들, 상황들 같은 자신의 지난 시간들을 돌아보고, 그 마저도 절벽 아래로 떨어뜨리고는 절망같은 순간을 마주하기도 합니다. 분노와 포기의 유혹이 동반하는 그런 순간들, 읽어나가는 제 자신의 지난 시간도 오버랩되며 제법 공감되었던 부분들이 제법 있었습니다. 

그렇게 싸구려 샌들과 테이프로 임시방편해서 다시 걷기를 시작하는 셰릴. 이제 포기하고 절망하는 것은 자신의 인생에 또다시 끼어들지 못하게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잃어버리고 놓쳐버리고 스스로 내려놓고 버림으로, 오히려 그렇게 스스로 자유로워지고 가벼워진 채로 남은 길을 걷고 또 걷는 것. 그것에만 집중하는 것을 해냅니다.

고달팠던 어린 시절과 고생스런 엄마의 인생과 느닷없는 죽음. 희망같던 가족과 상실, 끝없는 터널 같은 인생에 뭔가 돌파구를 스스로 찾아내지 않으면 안되는 절실함. 어쩌면 그런 힘이 PCT 완주의 힘이자 고개를 쳐들고 앞을 바라보게 하는 스스로 발견한 에너지가 아니었을까? 

리즈 워드스푼이 제작하고 주연했던 영화도 충분히 감동적이지만, 문장과 상상을 오가는 원작소설이 주는 감동은 비교할 수 없게 오래도록 마음을 울리고 또 울렸습니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다른 모든 이의 인생처럼 나의 인생 역시 신비로우면서도 돌이킬 수 없이 고귀하다는 것을.
지금 이 순간, 내 곁에 있는 바로 이것."
  - p.575

책의 원제는 <Wild: From Lost to Found on the Pacific Crest Trail>. 상실감의 저 바닥에 있던 셰릴이 PCT에서의 발견한 것들이 궁금하다면 일독을 감히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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