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한 한의원
배명은 지음 / 텍스티(TXTY)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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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설 명절 다음날, 부모님을 모시고 고향 동네 유명한 한의원을 들렀습니다. 다른 이유로 방문했는데, 원장님은 부모님께 그간 불편한 데가 없었는지를 물어보시더니 어머니에겐 쑥찜과 물리치료를, 아버지에겐 쑥뜸을 받으시란 처방(?)을 내셨습니다. 명절 후라 왁자한 원내 분위기에 휩쓸려 정신없이 직원 안내에 따라 들어간 쑥뜸하는 공간, 어느새 제 손에는 작은 화분같이 생긴 것이 들려있었고, 그 속에 불씨가 살아있는 쑥을 채워서 아버지 배와 가슴 부위를 느린 속도로 넓게 돌리고 있었습니다. 귀신에 홀린 기분이었는데 어느새 아버지는 편안한 표정으로 침대에 누워서 저의 쑥뜸을 받고 계셨고 팔이 좀 아팠지만 기분은 왠지 좋았습니다.

배명은 작가의 오컬트 시트콤 같은 장편소설 <수상한 한의원>은 뭔가 익숙한 시작으로 이야기를 엽니다. 서울의 대형 한방병원의 부원장 자리를 노리는 한의사가 보기 좋게 뒷통수를 맞고 어처구니 없는 상황으로 구설수에 오릅니다. 그리고, 심기일전, 지방 소도시에서 와신상담의 마음으로 한의원을 개업해서 기필코 멋지게 서울로 복귀하겠노라 다짐하지만 이사 온 첫 날부터 일이 꼬이더니,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상한 사건들이 일어나고 귀신을 보는 능력이 생겨버린 한의원 원장은...
뭐를 이렇게나 뻔한 클리셰로 이야기를 푼다고? 하면서 읽어 가는데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400페이지를 육박하는 책의 페이지가 50페이지, 150페이지, 300페이지... 자세를 이리저리 바꿔가며 앉은 자리에서 이야기를 읽어내는 속도에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너무 재미난 겁니다.

산 사람들은 산 사람들의 이야기로, 죽은 이들은 그들의 사연으로 날줄과 씨줄을 엮어내며 이야기가 나아가고, 티키타카하는 스크루볼 코미디 같다가 처연하게 눈물 쏙 빼는 최루영화 같다가... 시트콤과 주말 드라마를 오가는 뒤를 좇다보면 어느새 마음 푸근해지더니 미소 짓게 되는 마술 같은, 그래서 ‘수상한’ 한의원과 한약방에서 벌어지는 사람들과 귀신들의 정과 한이 소복하게 내려앉은 어둠이 내려앉은 마을회관 앞마당에 둘러앉아 모닥불을 사이에 두고 들려주는 재미난 각자의 이야기들에 웃다 울던 어느 밤처럼 기억으로 남는 순간이 되며 끝맺습니다.

“괜찮아. 이제 여한 없어.”
공실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승범의 등을 오래오래 쓰다듬었다.
<p.258>

어느 새 귀신들의 사연과 한풀이에 위로 받는 순간들을 마주하고 또 어느 날의 나의 후회와 누군가에 대한 회한이 묘하게 연이어 나의 사연이 되어 생각나게 하는, 어쩌면 귀신에 쓰인 듯한 순간들도 있습니다. 살고 죽는 건 무엇이고, 또 그렇게 욕심을 부리고 자존심을 세워가며 아득바득 이 세상 살아가봐야 뭐하겠나 싶은 마음에 이릅니다. 그래 그렇게 살아가는 것. 때론 내가 곁을 내어주고, 또 누군가의 등을 오래오래 쓰다듬어주며 가만히 있어주는 것. 그렇게 살아가는 것.

이 추위가 지나면 금새 또 따슨 봄바람 불어올테지, 하며 책장을 덮고 책장 한곳에 가만히 책을 꽂아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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