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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자가 들려주는 일상 속 행복
마르크 오제 지음, 서희정 옮김 / 황소걸음 / 2020년 3월
평점 :
<인류학자가 들려주는 일상 속 행복>의 저자 마르크 오제는 프랑스 출신의 인류학자다.
그가 연구한 '비장소(Non-lieux):초근대성의 인류학 입문'라는 개념은 현대 사회에서 등장한 새로운 형태의 공간성을 논의한 것으로 '지금, 이곳'에 관한 인류학적인 연구는 인류학 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인류학적 접근법으로 우리가 각자 어떤 정황과 여건에서 행복의 순간과 움직임을 또렷하고 섬세하게 감지하는지를 살펴본다.
행복에 관한 뚜렷한 정의가 없는 상태에서, 사람들은 행복을 자신이 열망하는 어떤 상태의 지속이라고 여기는 것 같다. 행복하다고 여기는 상태의 지속을 불안한 사람들(현자의 평온함과 평정심이 없는 이들)의 달뜨고 부산스러운 마음과 대비하는 것은 스토아학파 때부터 이어온 전통이다. 기독교는 여기에 더해 영원한 행복을 약속했다. 오늘날 행복한 평화에 대한 갈망은 의기양양한 자본주의 안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경쟁은 물론, 체제에서 소외되고 배척당한 이들의 부질없는 항의와도 분명하게 대조된다.(18p)
일상 속 행복의 목록은 끝이 없다. 불행의 목록도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행복을 나열함으로써 불행을 감출 생각은 없다. 인생에서 불행이란 무엇보다 가난이고, 가난은 고독과 질병, 피로, 권태를 낳거나 이를 악화시킨다.
삶에서 불행이란 자기혐오와 멸시로 이어지는, 타인들에게 거부당하는 경험이다.
삶에서 불행이란 재정적 풍요를 오만하게 과시하거나, 편협한 태도로 자기 종교를 강요하는 것이다.
삶에서 불행이란 어리석거나 잔혹하거나 이기적이거나 무심한 행동을 매일 목격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능력껏 최선을 다해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어느 정도 이뤄내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더 잘 살기 위한 노력은 무엇보다 정체되지 않고 공간적, 시간적으로 움직이려는 자발적인 노력과 관련이 있다. 한발 비켜나든, 도약하든, 잃은 것을 되찾든 이 움직임은 인간을 계속 살아가게 만든다. 이 노력이 결실을 맺는다면 새로운 상징적인 사건이나 새로운 관계가 발생하고, 이를 계기로 새로운 '그럼에도 불구하고 찾아오는 행복'을 누린다. (180~181p)
행복한 순간, 찰나의 감상, 변하기 쉬운 추억 등을 통한 소소한 행복(시절이나 공포, 나이나 질병에 굴하지 않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찾아오는 행복들')에 대해 이야기한 부분이 인상적이다.
이 행복은 우리가 일상을 버티도록 도와주는 행복이다.
이 행복은 영혼을 뒤흔드는 폭풍에도, 숨통을 조이며 영혼을 잠식하는 폭우에도 살아남을 수 있는 난공불락의 행복이다.
그것은 소박한 행복이다.
빼앗겨봐야 우리에게 얼마나 필요한지 실감할 수 있는 것들이다.
지극히 익숙해서 의식하지도 못할 작은 자유를 한동안 박탈당해보면 일상의 진가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면서 일상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느끼게 되며, 우리의 매일을 이어주고 우리가 살 수 있게 해준 가느다란 실을 불현듯 인식하게 되듯, 우리의 바람은 더 소박해지고 꼭 필요한 것만 남게 되는 것 같다.
전 세계가 코로나19로 인해 고통받고 있다.
유례없는 재난으로 끊임없이 감염자가 늘고 수많은 사망자가 속출하고 있다.
국가별 전염을 차단하기 위해 세계 각국이 빗장을 걸어 잠그고 있고 지역사회도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하고 있다.
평범했던 일상이 무너졌다.
외출 금지, 자가 격리, 사회적 거리두기, 공공시설 폐쇄, 학교 휴교령 등 평생을 살아오는 동안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일들이 실제 일어나고 있고 그 기간이 두 달이 넘도록 지속되고 있다.
혹시라도 감염될지 모른다는 공포심에, 내가 증상 없는 감염자일 수도 있다는 우려 속에 맘껏 외출하는 것도 조심스럽고 불안하다.
그러는 동안 어느새 겨울이 가고 봄이 왔지만 마음껏 봄꽃도 보러 나갈 수 없는 게 지금의 현실이다.
박탈당한 작은 자유와 평범했던 일상의 중요성과 소박한 행복을 빼앗겨보고서야 느끼게 되는 것 같다.
저자는 일상 속 행복은 다양한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며 일상에서 맛보는 행복이 있고, 일상을 누릴 수 있는 이들이 소비하는 행복이 있으며 언제나 변함없이 누리는 만남의 행복이 있다고 말한다.
얼굴, 풍경, 책, 영화나 노랫가락과 만나고, 익숙한 것과 새로운 것을 만나는 행복과, 가끔 순간적으로 나타났다가 급하게 사라지지만 기억 속에 저장된 행복, 회귀 혹은 첫 번째 경험의 행복, 추억과 변치 않는 사랑의 행복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모든 행복은 시절과 의구심과 두려움에도 행복의 창조자가 되려고 열망하는 이들에게 존재하며, 출신, 문화, 성별과 상관없이 모든 이에게 열린 행복이자, 비루한 현실에도 언제나 새롭게 남을 저항의 행복의 있으니 바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찾아오는 행복들'이라며, 이 행복들이 우리가 일상을 버티도록 도와준다고 말한다.
한 사례로 '장례를 치르는 일'을 이야기하며, 이 일은 전통적 지혜가 역설적 행복을 만들어낸다고 말한다.
집안 어른이 세상을 떠나셨음을 진심으로 애도하면서도 이렇게 서로 만나 감정적인 유대를 쌓아가는 것은 단순히 장례만을 치르기 위한 모임이 아니라 함께 하나의 사건을 행복을 나누는 행사로 바꾸는 힘이 있다는 것이다.
<인류학자가 들려주는 일상 속 행복>은 오랜 시간 인간의 삶을 탐구해온 인류학자가 노년에 이르러 행복이란 무엇인지를 명쾌하게 정의하면서 우리가 행복해야 하는 이유와 행복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에 도움을 주는 책인 것 같다.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었지만 공감 가는 글이라 몇 번이고 곱씹으며 읽게 되는 것 같다.
뤽 페리(luc Ferry : 행복해지는 7가지 방법의 저자)는 행복이 현실이 아니라 현실을 바라보는 시각에 달렸다는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았고, 행복해야 한다는 강박은 위험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비판했다. (19p)
작은 자유를 한동안 박탈당해보면 일상의 진가가 무엇인지 깨닫고, 일상이 얼마나 중요한지 깊이 느낀다. (36p)
행복이란 정의하기 어렵고, 언제나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 손에 잡기도 어렵다.(53p)
행복은 사적인 노스탤지어이자 미화된 과거, 혹은 공동의 유토피아이자 미화된 미래라는 두 가지 성격을 띠는 시간적 개념으로 보인다. (53p)
드물게 찾아오는 순간들이 있어 인생은 살아볼 만하다.(스탕달-뤼시 앵 뢰방) (63p)
행복의 미덕은 행복이 우연한 만남과 사건에 따라 달라진다고 해도 여전히 그 우연을 기대하고 찾을 수 있는 데 있다. 또 마침내 행복을 찾았을 때도 계속 행복을 찾으려고 애써야 하는 것을 아는 데 있다. (64p)
문학 속 이야기는 이처럼 시간과 행복을 대하는 태도가 헤아릴 수 없이 담긴 보고(寶庫)다. 날것의 감정과 거리를 두면서도 그 감정을 타인에게 들려주려고 노력하는 글쓰기는 그런 점에서 볼 때 탐색의 대상이자 탐구의 수단이다. (115p)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우리는 나이를 먹으며 나이의 속박에서 벗어나 시간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법을 배우는 것 같다. (162~162P)
나이는 우리에게 지금을 살라고, 흔히 말하듯이 '순간에 충실'하라고, 지금 이 순간의 모든 것을 누리라고 가르친다. (177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