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딩을 통과하는 중 ㅣ HiP 시리즈
허진희 지음 / 텍스티(TXTY)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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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딩을 통과하는 중> 허진희, 텍스티(TX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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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지나간 선택을 회상하며 그때 다른 말을 건넸더라면, 한 번쯤 붙잡아보았더라면하며 되뇌이는 순간이 찾아오곤 한다. 마음속에서 같은 장면을 고쳐보려 해도 이미 흘러간 시간은 돌이킬 수 없다. 허진희 작가의 소설 『엔딩을 통과하는 중』은 바로 이 되돌릴 수 없는 시간에 대한 미련에서 출발해, 관계의 이면과 후회의 실체를 섬세하게 다룬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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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과거의 시간으로 되돌아가 자신이 하지 못했던 선택들을 다시 마주하는 인물의 여정을 그린다. 시간 여행이라는 소재도 흥미로웠지만, 주인공이 자신의 잘못된 선택을 자각하고 성찰하는 과정이 더 인상깊었다. 적극적으로 상처를 주지 않았다고 해서 온전히 무죄인 것은 아닐 것이다. 때로는 상황을 모른 척 외면하고 침묵하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하나의 결정적인 선택이자 아픈 상처로 남을 수 있음을 소설은 담담하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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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이야기에서는 시점이 변하면서 이야기가 한층 복합적으로 변한다. 외부에서 볼 때는 왜 진작 벗어나지 못했을까 싶은 관계가, 막상 그 안에 서 있는 당사자에게는 자신의 감각과 판단을 끊임없이 의심하게 만드는 복잡한 덫이 되곤 한다. 그렇기에 소설이 이야기하는 구원은 영웅적인 구출 서사로 흘러가지 않는다. 누군가의 삶을 대신 살아줄 수는 없지만, 혼자서는 도저히 내딛기 어려운 첫걸음을 곁에서 함께 걸어주는 것, 그리고 내민 손을 잡고 결국 스스로 그곳을 빠져나오는 용기.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가능한 구원이란 어쩌면 딱 그 정도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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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없이 몸짓으로 감정을 전달하는 예술인 '마임'이 인물들을 잇는 매개체로 쓰인 점도 인상적이었다. 무언의 교감을 다루면서도, 정작 가장 중요한 순간에는 서로의 마음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는 모습은 관계의 본질을 돌아보게 만든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 해도 마음은 저절로 통하지 않는다. 결국 먼저 묻고, 귀를 기울이고, 때로는 마주하기 불편한 대답까지 견뎌내야만 비로소 상대의 마음에 닿을 수 있다. 이 소설 속에는 이러한 사실이 무척이나 잘 녹아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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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덮고 나면 '엔딩을 통과하는 중'이라는 제목의 의미가 한층 선명해지는 것 같았다. 삶은 해피엔딩이나 배드엔딩처럼 말끔한 결말이 나는 경우는 드문 것 같다. 어떤 관계가 끝나더라도 그 시간이 남긴 여파는 오래도록 삶에 남아있게 되고, 우리는 저마다 수많은 결말의 한가운데를 끊임없이 지나가는 중인 것이다. 시간을 되돌리는 비현실적인 기적을 바라기보다,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의 목소리에 한 번 더 귀를 기울이는 일. 그것이야말로 지나간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아직 끝나지 않은 오늘의 이야기를 조금 다른 방향으로 써 내려갈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라는 걸 일깨워준 그런 책이었다.



* 이 책은 텍스티(TXTY)(@txty_is_text)로부터 제공받았습니다. 이 글은 보내주신 책을 탐독 후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엔딩을통과하는중 #허진희 #텍스티 #TXTY #서평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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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수염
아나벨라 로페스 지음 / 아트북프레스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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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수염> 아나벨라 로페스, 아트북프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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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옛이야기를 읽으며 가장 심장이 쫀득해지는 순간은 절대로 하지 말라는 경고 앞에서 주인공이 그 금도를 넘어가 버리는 장면이었다. 하와(이브)가 선악과를 따먹는 장면도, 프시케가 남편의 얼굴을 기어이 확인하는 장면도, 판도라가 상자를 결국 열어보는 장면 모두 마찬가지였다. 하지 말라면 얌전히 안 하면 될 것을 왜 굳이 화를 자초할까 싶었다. 하지만 나이를 먹고 세상의 풍파를 차츰차츰 겪다 보니 요즘에는 다른 생각이 든다. 아무런 이유도 설명해주지 않은 채 무언가를 절대적으로 금지할 때, 그 문을 평생 모른 척 침묵하며 살아가는 일이야말로 훨씬 더 부자연스럽고 위태로운 일이라는 것이다. 아나벨라 로페스의 그림책 『푸른수염』은 이토록 오래된 잔혹동화를 호기심에 대한 징벌이 아닌 진실을 확인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으로 다시 해석해 낸 멋진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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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뼈대는 샤를 페로의 고전 원작과 크게 다르지 않다. 푸른수염은 자신의 아내에게 성의 모든 열쇠를 건네며 가장 꼭대기 방 하나만은 결코 열지 말라고 당부한다. 하지만 아내는 그 문을 열고, 이전 아내들의 끔찍한 시신들을 목격한다. 원작이 오랫동안 강조해 온 교훈은 여성의 지나친 호기심에 대한 경고였다. 하지만 로페스의 책에서는 질문의 방향을 조금 틀어버리는 것 만으로 이 도식은 쉽게 허물어뜨린다. 

"왜 열어서는 안 되는 방이 존재해야 했을까? 왜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고 숨긴 사람이 아니라, 그 비밀을 목격한 사람의 호기심이 문제로 남아 비난받아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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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에 등장하는 피 묻은 열쇠라는 소재가 꽤나 인상적이었다. 겉으로는 금기를 어겼다는 유죄의 증거처럼 보이지만, 진짜 죄를 지은 쪽은 문 뒤에 폭력의 흔적을 감춰둔 푸른수염이었다. 자신의 잔혹성을 은폐한 채 상대에게 일방적인 규칙을 부여하고, 그 규칙을 조금이라도 어기면 배신자라며 폭력을 정당화하는 태도. 겉으로는 무한한 자유와 선택권을 주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상대를 끊임없이 시험하고 옭아매는 관계의 역학은 고전 속 괴담을 넘어 지극히 현대적인 공포와도 맥이 닿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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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단연 압도적인 삽화라고 할 수 있겠다. 푸른색과 붉은색, 그리고 거칠고 묵직한 검은 질감이 부딪히는 그림들은 텍스트보다 먼저 불길한 기운을 전한다. 화면 전체를 서서히 잠식해 들어가는 차가운 푸른색과, 비밀과 피가 드러나는 순간마다 도드라지는 붉은색의 강렬한 대비는 책장을 넘기는 내내 팽팽한 서스펜스를 느끼게 했다. 기괴하면서도 아름다운 그림이 정말 인상적이었고 홀린 듯이 책을 순식간에 읽을 수 있었던 계기가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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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푸른수염의 죽음 이후에 배치된 결말이었다. 살아남은 아내는 악인을 처단하고 막대한 재산을 차지했다는 사실에 안주하지 않고, 그 방에서 이름도 없이 스러져간 이전의 아내들을 정원에 정성껏 묻어주고 그들을 기리기 위해 꽃을 피워낸다. 자신만 무사히 빠져나오는 것으로 서사를 끝맺지 않고, 폭력의 희생자들을 다시 양지로 끌어올려 애도하고 기억하는 행위. 살아남은 자의 몫을 복수의 완성이 아닌 연대와 기억으로 풀어냈다는 점에서 이 책은 고전의 답답한 한계를 시원하게 뛰어넘는 훌륭한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 이 책은 아트북프레스(@artbookpress)에서 제공받았습니다. 이 글은 보내주신 책을 탐독 후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푸른수염 #아나벨라로페스 #아트북프레스 #북스타그램 #서평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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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종 위기의 사고 - AI 시대, 인간은 어떻게 스스로를 포기하는가?
에릭 사댕 지음, 이선주 옮김 / 헤이북스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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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종 위기의 사고 - AI 시대, 인간은 어떻게 스스로를 포기하는가?> 에릭 사댕, 헤이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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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를 찾고 요약하고 쓰고자 하는 글의 초안을 잡는 데에 주로 인공지능을 활용하고 있다. 단순한 검색을 넘어 무언가 궁금할 때 ChatGPT와의 대화창부터 열게 되는 건 이미 일상이 되었다. 몇 시간씩 걸리던 고민을 몇 분 만에 정리해 주는 편리함을 맛본 이상 이전 방식으로 돌아가기는 어렵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이 책, 에릭 사댕의 『멸종 위기의 사고』를 읽으며 미묘한 마음의 파동을 느낀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나 싶다. 저자가 신랄하게 비판하는 바로 그 편리함을 일상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누리고 있는 사용자로서 이 책을 접했기 때문이다.


😶‍🌫️

최근 에릭 사댕의 『유령의 삶』을 읽었을 때도 비슷한 감정을 느낀 적이 있다. 당시 저자는 디지털 기술과 화면 속에 갇혀 신체성과 실재감을 잃어버린 채, 마치 '유령'처럼 부유하는 현대인의 소외를 날카롭게 파헤쳤다. 이번 책 『멸종 위기의 사고』는 존재의 양식을 넘어 인간의 고유한 인지 능력과 사유 그 자체에 더 날카로운 비판을 가하는 책이었다. 화면 속 유령이 된 인간이 이제는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표현하는 지적 노동마저 기계에 위탁해 버리며, 사고의 기능 자체를 퇴화시키고 있다는 진단이 이 책의 주된 요지였다. 두 책을 관통하는 저자의 문제의식은 한결같이 집요하고 단호하게 느껴졌다.


🧶

사댕이 주목하는 위기는 흔히 언급되는 일자리 감소나 경제적 변화보다 훨씬 근본적인 것이었다. 이 책에 따르면, 정보를 찾기 위해 여러 글을 비교하고, 서로 다른 주장을 저울질하며, 무엇이 타당한지 끙끙 앓다가 겨우 자기 생각을 탄생시켜 내던 지난한 과정 전체가 생성형 AI 앞에서 단숨에 생략되어 버리는 현실을 우리는 마주하고 있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정답을 얻는 일과 스스로 생각하는 일이 전혀 다른 층위에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사댕의 이러한 철학적 경고는 최근 MIT 미디어랩 등에서 진행된 생성형 AI 관련 뇌파(EEG) 실험 결과을 떠올리게 한다. 연구진이 글쓰기와 문제 해결 과정에서 생성형 AI를 사용한 집단과 스스로 생각하며 작성한 집단의 뇌 활동을 측정한 결과는 꽤나 인상적이다. AI에 의존해 답을 얻어낸 사람들은 고차원적 사고와 기억, 집중을 담당하는 전두엽과 뇌 신경망의 활성도가 급격히 떨어졌다. 효율적으로 결과물을 얻어내는 동안, 정작 뇌는 '사유의 근육'을 거의 쓰지 않은 채 휴면 상태에 가까워진 것이다. 사댕이 말하는 '사고의 멸종'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었다. 정보를 비교하고, 논리적 모순을 찾고, 무엇이 맞는지 끙끙 앓으며 자기 생각을 만들어내는 지난한 과정을 생략할 때, 인간의 뇌 신경망 역시 손쉽게 연결을 끊어버린다.


😶‍🌫️

다만 『유령의 삶』을 읽었을 때도 느낀 점인데, 사댕 특유의 비타협적인 태도에 완전히 동의하기는 어려웠다. 생성형 AI와 인간의 창작이 공존할 가능성을 너무 일찍 닫아버리고 창작자가 AI 사용을 전면 거부해야 한다는 식의 결론은 다소 비현실적으로 다가온다. 기술의 발전이 가져다 주는 편리함을 외면했을 때 오히려 도태되는 결과가 초래될 수도 있으며, AI를 쓰지 않는다고 저절로 깊은 사유에 도달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날 사고의 빈곤은 기술 문제뿐 아니라 효율과 속도만을 강요하는 노동 환경과 플랫폼 구조 등 훨씬 복잡한 맥락이 얽혀 있으니 좀더 심층적인 분석과 연구를 통해 복잡한 결론에 접근해야할 필요가 있는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

그럼에도 사댕이 던지는 질문이 남긴 경고만큼은 쉽게 떨쳐내기 어렵다. 새로운 도구가 등장할 때마다 이것으로 무엇을 더 빠르게 할 수 있는지만을 물어왔다면, 이제는 반대편의 질문을 던져야 할 때다. 편리함을 모조리 포기하고 기술 이전의 시대로 돌아갈 생각은 없지만 모든 의문에 즉각적인 답을 구하기 전에 내 머리로 먼저 고민해 보는 최소한의 여백을 남겨두어야 하지 않나 싶다. 가끔은 정답을 재빠르게 손에 쥐는 것보다, 조금은 헤매며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중요할 떄가 있다. 생각한다는 것은 결국 뇌와 영혼 단련해 나가는 숭고한 과정일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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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젓한 사람들 - 다정함을 넘어 책임지는 존재로
김지수 지음 / 양양하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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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젓한 사람들 - 다정함을 넘어 책임지는 존재로> 김지수, 양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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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젓하다'라는 말은 보통 떼쓰지 않고 조용하게 가만히 있는 아이들을 향한 어른들의 칭찬이었다. 그래서 한동안은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묵묵히 참아내는 태도만이 어른스러움의 기준이라 여겼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나이를 먹어갈수록 진짜 어른의 모습은 결코 흔들리지 않는 완벽함에 있지 않음을 실감한다. 김지수의 인터뷰집 『의젓한 사람들』에서는 그 단어의 낡은 껍데기를 벗겨내고, 흔들리고 휘청이는 와중에도 자신이 맡은 삶의 몫을 함부로 내던지지 않는 정직한 태도로서의 '의젓함'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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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는 김기석 목사부터 양희은, 진은숙, 박정민, 나태주, 애덤 그랜트, 마크 맨슨에 이르기까지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만의 뚜렷한 궤적을 그려온 열네 명의 인터뷰가 실려 있다. 이 책의 미덕은 그 어디에도 뻔한 성공 비결을 늘어놓지 않는다는 데 있는 것 같다. 오히려 그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막막함,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던 시절의 불안, 여전히 스스로를 의심하며 지낸 시간들에 대한 솔직한 고백이었다. 그들의 삶이 의젓해 보이는 이유는 무엇이든 척척 해내는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그 안에서 내가 책임져야 할 오늘 하루의 몫을 끝내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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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은 역시 박정민 배우와의 인터뷰였다. 그는 열심히 한다고 해서 반드시 그에 합당한 결과가 뒤따르는 것은 아니며, 지금까지 버텨온 원동력 역시 거창한 마음먹은 의지가 아닌, "포기하고 싶은 마음보다 포기하지 않는 마음이 아주 조금 더 컸기 때문"이라고 털어놓는다. 심지어 자신의 열심 뒤에는 준비가 부족했다는 불안을 잠재우려는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고 말한다. 무언가에 오랫동안 천착하다 보면 우리는 노력한 만큼 반드시 대가가 돌아와야 한다는 기대를 품곤 한다. 하지만 현실이 늘 그렇게 우리 삶에 보상을 주지만은 않는다는 걸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안다. 박정민 배우의 이야기가 큰 울림을 주는 이유는 이러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럼에도 오늘 할 수 있는 만큼 준비하고, 또다시 포기하고 싶어 하다가도 다음 날 묵묵히 제자리로 돌아오는 그의 태도가 무척 인상깊었다. 우리가 지켜내야 할 의젓함이란 어쩌면 이런 볼품없는 일상의 반복에 더 가까운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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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작곡가가 된 후에도 슬럼프를 그저 지나가야 할 일상으로 받아들이는 진은숙, 성공에서 운의 몫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플뢰르 펠르랭, 특별함 대신 평범한 인간으로 살아가는 감각을 강조하는 마크 맨슨의 말들은 대단해져야겠다는 욕심 대신 제대로 살아야겠다는 다짐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 방향성을 가장 또렷하게 짚어주는 인물이 바로 김기석 목사였다. 그와의 인터뷰를 잘 들여다 보고 나면, 책의 부제인 '다정함을 넘어 책임지는 존재로'라는 문구가 한층 구체적인 의미로 다가온다. 다정함이 타인의 아픔을 먼저 알아채는 감수성이라면, 의젓함은 그것을 알아챈 뒤에 무엇을 할 것인가에 관한 태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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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과연 의젓한 사람인가'라는 질문에 선뜻 고개를 끄덕이기는 어렵다. 여전히 사소한 일에 마음이 흔들리고 어른답지 못한 나를 생각보다 자주 마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젓함이 타고난 완성형 인격이 아니라 매 순간 내가 내리는 태도라면 앞으로 내가 의젓한 사람이 되는 일이 불가능한 일만은 아닐 것 같다. 내 처지만 앞세워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뜻대로 풀리지 않는 날에도 최소한의 할 일을 해내며 넘어진 자리에서 멋쩍은 핑계를 대지 않고 묵묵히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 나도 어엿한 의젓한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 이 책은 양양하다(@yyhdbooks)에서 제공받아 독서모임 진행을 했습니다.

at @yamongyamong_ss

함께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chiwonna_bier @apureumdite @i_am_what_i_read


#의젓한사람들 #김지수 #양양하다 #인터뷰 #독서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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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김치 만화 클럽
허안나 지음 / 샘터사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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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김치 만화 클럽> 허안나, 샘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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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되고 나서야 무언가를 좋아하는 마음에도 생각보다 많은 체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어릴 때는 새 만화책이 나오길 손꼽아 기다리고, 좋아하는 음악을 온종일 찾아 듣는 일이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하루치 일과를 겨우 견뎌내고 나면 무엇 하나에 마음을 쏟을 기력조차 남지 않는 날이 점점 늘어가는 것 같다. 퇴근 후 지칠대로 지쳐 소파 위에 축 늘어져 있는 내 모습을 '파김치'말고 어떤 단어로 더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을까. 허안나 작가의 『파김치 만화 클럽』은 바로 그 방전된 상태에서 출발하는 책이다.


🐈

저자가 스스로를 '파김치'라 부르게 된 배경이 마음이 아팠다. 전세 사기 피해, 코로나19로 인한 일감 감소, 오래도록 함께 했던 반려묘들과의 이별과 남은 고양이들의 병원비 부담까지. 일상을 무너뜨리기에 차고 넘치는 고단한 일들이 연달아 닥쳐왔던 것이다. 침대 밖으로 발을 딛는 것조차 버거웠던 저자를 다시 움직이게 한 것은 그저 방구석에서 펼쳐 든 만화 한 권이었다. 현실에서는 뜻대로 풀리는 일이 하나도 없을 때, 만화 속 세상으로 잠시 도망치는 짧은 피난을 반복하며 저자는 오히려 조금씩 삶 쪽으로 몸을 돌린다. 『룩 백』, 『루브르의 고양이』, 『호박과 마요네즈』, 『주말엔 숲으로』, 그리고 학창 시절의 추억이 깃든 『호텔 아프리카』까지. 책에 등장하는 만화들은 단순한 추천 목록이라기 보단, 그 시절을 버텨내던 한 사람의 일상과 겹쳐 있었다. 누군가가 자신이 진심으로 아끼는 것에 대해 신나게 떠드는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묘한 활기가 전해져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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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지점은 방구석에서 혼자 읽던 취미활동에서 '파김치 만화 클럽(파만클)'이라는 작은 모임으로 확장되는 과정이었다. 같은 작품을 읽고 저마다의 감상을 나누며 자신의 경험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시간이라니! 나도 요즘 독서모임을 열심히 하면서 혼자 읽었다면 스쳐 지나갔을 장면도 타인의 시선을 통해 새로롭게 의미가 재해석되는 경험을 많이 하고 있다. 역시 지친 사람을 다시 세상 밖으로 걸어 나오게 만든 것은 느슨하게 마주 앉은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느끼는 온기가 아니었나 싶다.


🐈

책에서 특히 깊은 인상을 남긴 단어는 '뻥타임'이었다. 비행기가 다음 비행을 위해 잠시 멈추어 정비하는 시간을 삶에 빗댄 표현이다. 살다 보면 당장 눈에 보이는 성과도 없고 방향조차 흐릿해 제자리에 멈춰 있는 듯한 시기를 맞닥뜨리곤 한다. 남들은 착실하게 다음 단계를 밟아가는 것처럼 보여 조급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삶의 모든 순간이 쉼 없는 전진이어야 할 이유는 없는 것 같다. 잠시 멈추어 서서 좋아하는 것을 뒤적여 보고 겉보기엔 쓸모없어 보이는 일에 시간을 쏟는 동안 우리는 다음 걸음을 내딛을 숨을 고를 수 있다. "실패해도 안 죽어!"라는 저자의 투박한 외침이 그 어떤 긍정의 말보다 훨씬 더 든든하게 와닿는 이유다.


🥬

좋아하는 취미가 비록 인생을 구원해 주지는 못하더라도, 완전히 녹초가 된 날에도 자그마한 몸짓을 할 수 있게 해준 다는 점에서 취미는 삶을 생각보다 단단하게 만들 수 있는 힘이 있는 것 같다. 이 책은 일상을 구겨져 괴롭고 지쳤다할 지라도 그저 축 늘어진 채로도 만화 한 권을 펼칠 힘만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히 다음 날을 맞이할 수 있다고 조용히 말을 건네오는 것만 같았다. 지칠 때마다 책 속으로 도망치는 이유는 복잡한 현실의 문제가 당장 해결되기 때문은 아니다. 그저 다른 사람의 이야기 속에 머무는 동안, 내 문제와 적당한 거리를 둘 수 있는 숨구멍이 생기기 때문이 아닐까?



* 이 책은 샘터(@isamtoh)에서 제공받아 독서모임 진행을 했습니다.

at @yamongyamong_ss

함께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chiwonna_bier @apureumdite @i_am_what_i_read


#파김지만화클럽 #허안나 #샘터 #서평단 #독서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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