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수염
아나벨라 로페스 지음 / 아트북프레스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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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수염> 아나벨라 로페스, 아트북프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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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옛이야기를 읽으며 가장 심장이 쫀득해지는 순간은 절대로 하지 말라는 경고 앞에서 주인공이 그 금도를 넘어가 버리는 장면이었다. 하와(이브)가 선악과를 따먹는 장면도, 프시케가 남편의 얼굴을 기어이 확인하는 장면도, 판도라가 상자를 결국 열어보는 장면 모두 마찬가지였다. 하지 말라면 얌전히 안 하면 될 것을 왜 굳이 화를 자초할까 싶었다. 하지만 나이를 먹고 세상의 풍파를 차츰차츰 겪다 보니 요즘에는 다른 생각이 든다. 아무런 이유도 설명해주지 않은 채 무언가를 절대적으로 금지할 때, 그 문을 평생 모른 척 침묵하며 살아가는 일이야말로 훨씬 더 부자연스럽고 위태로운 일이라는 것이다. 아나벨라 로페스의 그림책 『푸른수염』은 이토록 오래된 잔혹동화를 호기심에 대한 징벌이 아닌 진실을 확인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으로 다시 해석해 낸 멋진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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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뼈대는 샤를 페로의 고전 원작과 크게 다르지 않다. 푸른수염은 자신의 아내에게 성의 모든 열쇠를 건네며 가장 꼭대기 방 하나만은 결코 열지 말라고 당부한다. 하지만 아내는 그 문을 열고, 이전 아내들의 끔찍한 시신들을 목격한다. 원작이 오랫동안 강조해 온 교훈은 여성의 지나친 호기심에 대한 경고였다. 하지만 로페스의 책에서는 질문의 방향을 조금 틀어버리는 것 만으로 이 도식은 쉽게 허물어뜨린다. 

"왜 열어서는 안 되는 방이 존재해야 했을까? 왜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고 숨긴 사람이 아니라, 그 비밀을 목격한 사람의 호기심이 문제로 남아 비난받아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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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에 등장하는 피 묻은 열쇠라는 소재가 꽤나 인상적이었다. 겉으로는 금기를 어겼다는 유죄의 증거처럼 보이지만, 진짜 죄를 지은 쪽은 문 뒤에 폭력의 흔적을 감춰둔 푸른수염이었다. 자신의 잔혹성을 은폐한 채 상대에게 일방적인 규칙을 부여하고, 그 규칙을 조금이라도 어기면 배신자라며 폭력을 정당화하는 태도. 겉으로는 무한한 자유와 선택권을 주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상대를 끊임없이 시험하고 옭아매는 관계의 역학은 고전 속 괴담을 넘어 지극히 현대적인 공포와도 맥이 닿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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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단연 압도적인 삽화라고 할 수 있겠다. 푸른색과 붉은색, 그리고 거칠고 묵직한 검은 질감이 부딪히는 그림들은 텍스트보다 먼저 불길한 기운을 전한다. 화면 전체를 서서히 잠식해 들어가는 차가운 푸른색과, 비밀과 피가 드러나는 순간마다 도드라지는 붉은색의 강렬한 대비는 책장을 넘기는 내내 팽팽한 서스펜스를 느끼게 했다. 기괴하면서도 아름다운 그림이 정말 인상적이었고 홀린 듯이 책을 순식간에 읽을 수 있었던 계기가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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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푸른수염의 죽음 이후에 배치된 결말이었다. 살아남은 아내는 악인을 처단하고 막대한 재산을 차지했다는 사실에 안주하지 않고, 그 방에서 이름도 없이 스러져간 이전의 아내들을 정원에 정성껏 묻어주고 그들을 기리기 위해 꽃을 피워낸다. 자신만 무사히 빠져나오는 것으로 서사를 끝맺지 않고, 폭력의 희생자들을 다시 양지로 끌어올려 애도하고 기억하는 행위. 살아남은 자의 몫을 복수의 완성이 아닌 연대와 기억으로 풀어냈다는 점에서 이 책은 고전의 답답한 한계를 시원하게 뛰어넘는 훌륭한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 이 책은 아트북프레스(@artbookpress)에서 제공받았습니다. 이 글은 보내주신 책을 탐독 후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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