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로 떠난 조선의 지식인들 - 100년 전 그들은 세계를 어떻게 인식했을까?
이승원 지음 / 휴머니스트 / 2009년 12월
평점 :
절판


한 나라의 역사만 공부한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이번 책을 보고 많은 것을 느꼈다. 내가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고, 내가 보지 못한 곳, 생각지도 않은 곳에도 여전히 역사의 수레바퀴는 굴러가고 있었다. 조선 민중이 외세 침입으로 국권을 잃고 실의에 차 있을 때도 세계 역사는 묵묵히 흘러가고 있었다. 만약 일본의 침입이나 서양의 팽창정책이 없었다면, 은둔의 나라 조선은 지금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을까. 그렇다고 일본이나 서양 제국주의를 옹호하자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안일하게 자신의 울타리만 고수했다면 세계역사의 흐름속에 발전된 한국이라는 이름은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20세기 초,중반은 사상의 혼돈과 세계전쟁의 휘오리, 그리고 경제적 대공황속에 허덕이고 있었다.
 
나라 잃은 조선의 지식인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조선의 지식인들은 자의였던, 타의였던, 세계를 향해 여행을 떠난다. 크게는 사신단, 전권대사, 사절단으로, 사적으로는 학문,견문을 넓히고자 가는 경우로 나눌 수 있다. 하지만  착잡한 마음은 말 할것도 없다. 본디 여행은 공적이던 사적이던 자신의 국가를 통해 여행자의 정체성이 확인되는데, 그당시 조선은 일본의 속국으로 간주되어 사적으로는 망명자의 입장이었다. 조선지식인들 앞에 펼쳐진 서양 문물을 바라보는 마음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그리고 혼란스러웠다. 받아들일 것인지, 말것인지. 받아들이면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 그런데 개인이나 국가나 환골탈태하지 않고서는 자신이 갖고있는 기존의 틀을 무너뜨리려 하지 않는다. 일단은 가장 손쉽게 남을 모방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모방을 통해 현재의 난관을 극복하려하지만, 갈수록 더 큰 시련에 봉착하게 된다. 그것이 그당시 조선의 상황이고 지식인들의 모습이었다.
 
책에는 일본, 중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으로 떠나는 조선지식인들을 고찰한다. 일본에 대한 시각은 그 당시나 지금이나 일본이 앞서있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저자 견해대로 부정적 타자로만 남아 있다. 왜 그럴까, 예나 지금이나 일본은 조선이 주변국과 긴밀해지려는 것을 싫어한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크게는 일본속으로 내선일체 시키려는 속셈을 가지고 있다. 중일전쟁의 앞서 만주에서 중국농민과 조선농민의 수로다툼인 만보산사건을 과장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영국에 대해서는 제국주의적 시선보다 신사의 나라로 더 인식된다. 그러나 신사도라는 것도 그 나라 국민정신의 통합을 위한 구심점이다. 엘리트 의식, 우월주의는 개인이나 사회 국가간 이질감을 갖게하는 요소는 아닌지.. 1936년 우리나라의 손기정선수가 독일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할 때 히틀러에게 손을 올리며 하이 히틀러를 했다는 내용도 흥미롭다. 시시때때 변해가는 세계정세에 조선의 지식인들은 한마디로 갈팡질팡이었다. 내면을 깊이 읽고 넓게 바라보는 시각없이 그때마다 풍조했던 사상에 몰입하고 있었다. 자본주의. 맑스주의사이에서 또는 자유주의와 나치즘 파시즘의 전체주의속에서 흔들렸던 것이다.
 
여행은 시, 공간의 이동이다. 조선 지식인들이 서양여행을 하면서 가장 크게 적응하기 힘든 것은 시간관념이었다. 특히 시간 개념을 파악하는 것은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분석하는 작업이고, 역법은 그 사회의 집단심성과 정체성, 세계관을 의미한다는 저자의 견해에 동의한다. 무엇보다 이번 책을 통해 역사상 가장 혼란했던 세계속에 조선의 지식인들의 고민과 좌절, 그리고 희망을 위한 열정을 느낀다. 남의 문화는 완전하게 인식할 수 없다. 남의 문화가 우리 문화가 될 수도 없다.  지금도 우리나라의 지식인들은 대부분 서양으로 유학을 떠난다. 어떠한 마음으로 떠나는 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그당시 조선지식인들보다 여건이 나아졌다는 점이다. 그들의 고민과 좌절을 통해 지금의 여행속에 희망이 생겼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열정만은 조선의 지식인들을 통해 배웠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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