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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우마 대물림을 치유하는 법 - 얽히고설킨 아픔을 풀기 위한 가족세우기 수업
유명화 지음 / 김영사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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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세우기가 지닌 의미와 성과를 잘 보여주는 책이다. 독일 버트 헬링거의 가족세우기가 이 땅에 들어온 지도 벌써 20년이 넘었다. 치유의 위력이나 효과에 비해 아직 한국사회에 널리 보급되지는 못했다. 독일에서는 너댓 중 한 집이 가족세우기를 경험해 본 적이 있다고 할 정도라고 한다. 헬링거 박사님에 의해 전 세계에 알려진 가족치료기법이다.

그동안 가족세우기에 관한 책이 서점가에 여러 권 출간되어 나온 적이 있다. 대부분 외국인이 쓴 번역본이다. 가족세우기라는 가족치료법은 워크샵에 직접 참가해보지 않고 책을 통해 이해하기가 아주 어렵다. 가족세우기 체험과 경험을 통해서만 이해가 가능하다.

그런 의미에서 트라우마 대물림을 치유하는 법은 가족세우기에 입문해보지 않은 사람도 책을 통해 이 치료기법에 대한 이해가 가능한 책이라는 점에서 획기적이다. 우리 현장에서 가족세우기를 오랫동안 진행해 온 분에 의해 써졌기 때문에 문장의 목넘김이 부드럽다. 번역이라는 낯선 건널목을 통과하지 않고 가족세우기를 만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행해진 가족세우기 사례에 입각하여 책이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감정 이입이 쉽게 일어난다. 내 일이나 집안일처럼 느껴진다. 주변에서 한두 번쯤 본적이 있는 게 대부분이다. 한반도에 살고 있는 우리는 근현대의 역사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가족세우기 공부를 수 년 동안 해왔음에도 가족세우기 원리나 기전에 대해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것이 어려웠다. 이 책은 가족세우기의 원리와 효과에 대해 쉽고 재미있게 풀어서 설명해준다. 내게 또는 우리 집안에서 일어난 일이나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 통찰을 할 수 있게 해준다. 그동안 나의 성향이나 성격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던 것들이 내 것이 아닌 대물림된 것이라는 것도 알아차리게 해준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는 속담처럼 주변 사람이나 심지어 나의 자식들을 볼 때도 원가족인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느낌과 정서에 사로잡혀 있을 때가 많았다. 있지도 않은 가상현실을 계속 만들어서 가족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에게 덧씌우며 살아왔던 것이다. 그런 정서 대물림이 진정한 나 자신과 만나는 데 걸림돌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현 가족과의 연결 또한 어렵게 만들었다. 내 주변 사람들을 순수하게 그 사람 자신으로 보지 못하고 내가 투사한 어떤 사람으로 대해왔던 것이다.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아버지처럼 늘 전쟁터에 사는 느낌으로 살아왔고, 둘째딸로 태어나서 버려질 뻔했던 엄마처럼 나또한 늘 슬픔에 빠져 혼자 처절하게 살아왔던 것이다.

가족세우기는 이런 모든 것이 가족각본에 의해 대물림된 정서로 인해 빚어지는 일이란 점을 바로 볼 수 있게 해준다. 가족 내에서 구성원들에 의해 제외된 사람이 있으면 그 빈자리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그것을 대신하는 후손이 나타난다는 사실도 일깨워준다. 이렇게 가족에 적용되는 원리를 이해하면 투사와 동일시에 의해 일어나는 많은 오류와 불행을 줄일 수 있다.

조상이나 부모의 운명을 자기 것 인양 짊어지고 무겁게 언덕을 올라가는 시지프스 역핳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바윗돌 대신 가벼운 배낭을 짊어지고 룰루랄라~ 콧노래를 부르며 자신의 운명을 즐겁게 살 수 있게 된다. 삶에서 겪었던 트라우마가 자신을 살릴 자원으로 탈바꿈하는 신기한 경험을 할 수 있다. 옛이야기 속의 두꺼비신랑이 허물을 벗고 멋진 남자가 되는 것에 비견할 수 있을까?

이 책을 읽고 자신과 가족을 보는 새로운 눈을 뜨는 경험을 많은 사람들이 할 수 있기를 빈다. 그리고 자신이 겪은 트라우마를 보석처럼 귀히 여기게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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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다 놓아버려라
가이 핀리 지음, 김우열 옮김 / 조화로운삶(위즈덤하우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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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명상에 관한 책을 많이 읽었지만,

이 책은 요즘 나의 헤매는 지점을 잘 포착해서 시원하게 긁어주는 책이다.

무척 몰입해서 읽었고, 메모도 많이 했다.

무엇보다 '놓아버린다.'는 방식은, 참 유효하다.

그것은 잊는 것도 아니고, 완전히 버리는 것도 아니고, 외면한다는 것도 아니다.

다만 내 손아귀에서 놓고, 그것을 바라본다는 것이다.

모든 괴로움(고, )의 근저엔 집착이 있고,

집착을 해결하는 가장 바람직한 방식은 바로 '놓아버리는 행위'이다.

어떤 땐 생각이 내게 너무 거머리처럼 달라붙어서

놓아버리려는 의지를 넘어서는 범주일 때도 있지만,

어린시절 

몸에 붙은 거머리도 손으로 떼어내어 놓아버리지 않았던가!

바람처럼 머무름없이 존재할 수 있도록 손아귀에 쥐지 않아야 한다.

쥐지 않은 채 직시해야 한다.

놓아버리되, 놓치지 않음이 핵심이요, 관건이다.

 

삶을 멋지고 귀하게 만드는 것에는 더이상 신경쓰지 못하고,

경기장에 있는 순간순간을 버틸만한 사소한 일에만 기대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마세요.

우리는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이길 수 있습니다. 그냥 놓아버리면 됩니다.

여기저기 부딪히며 바쁘게 뛰어다니지 않으면 인생이 무의미하다는 엄격한 규칙,

이 쓸모없는 규칙을 모두 놓아버리세요.

게임에 참여한 시간이 길어질수록 인생이 더 나아질 거라는

진부하고 쓸데없는 소망에 더이상 매달리지 마십시오.

녹초가 되는 것과 고양되는 것이 같다고 여기지 않는 한은.....

놓아 버리세요. 끝내야 합니다.

무엇도 당신을 막지 못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승리로 가는 첫걸음입니다.

어느 쪽으로 갈지 신경쓰지 마세요.

전혀 상관없습니다.

 

참자아가 어떤 사건에 혼란을 느끼거나 그 때문에 고통받는 경우는 단 한가지 뿐입니다.

한 마디로 그릇된 정체성 때문입니다.

이렇게 잘못된 정체성이 형성되는 이유는

자신, 즉 본질적인 자아가 어떤 식으로든 삶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좌우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생각이 변화를 두려워하는 원인이 됩니다.

인생이 사건에 좌우된다고 믿기에

사건을 통제할 수 없으면 자신 역시 통제하지 못하게 될까봐 두려워지는 것입니다.

 

 

잘못된 정체성에 따라서 살아가다보면

초조함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며 헛되이 자신을 찾으려 애쓰게 됩니다.

결코 끝나지 않는 일에 뛰어드는 것입니다.

'당신에게 사건이 일어난 것이지, 당신 자신이 사건이 아니다.'

구름이 하늘이 아니듯, 당신은 당신을 스쳐가는 것들이 아닙니다.

 

당신은 자신이 생각하는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자신이 곧 사건이라고 생각하고, 사건과 자신을 동일시하면 그릇된 정체성이 형성됩니다.

불안정하고 자신 없는 정체성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런 그릇된 정체성을 '거짓 자아'라고 하는데 여기에도 여러가지 모습이 있습니다.

지금은 이 거짓 자아가 경험의 총합으로 우리 의식에서 생겨난 하나의 인물이라고만 말해둡시다.

 

거짓자아가 생기는 것은 매우 자연스런 일입니다.

잘못 흘러가게 되는 것은 거짓 자아가 '현재'와 '과거'만 비교할 줄 알기 때문입니다.

 거짓 자아는 문자 그대로 과거의 산물이기에 매 순간을 새롭게 받아 들이지 못합니다.

거짓 자아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한,

현재에 몰입할 때 누리게 될 자유를 결코 맛보지 못할 것입니다.

 

거짓 자아는 너무 오랫동안 우리 안에서 편하게 지내왔습니다.

오늘, 바로 지금이 거짓 자아를 지우고, 참자아로 살기 시작할 순간입니다.

 

우리는 매손간 습관적인 생각과 느낌에 속아 넘어가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습관적인 생각과 느낌에 더이상 의문을 품지 않기 때문입니다.

거짓 자아는 우리에게 불행의 원인이 외부에 있다고 주입합니다.

거짓 자아는 먼저 당신이 길을 잃게 만든 후, 외부 요인을 탓하게 만듭니다.

 

거짓 자아가 제시하는

익숙하지만 자기 파괴적인 대답을 모두 놓아버리고,

탓하기 놀이의 실체를 간파해야 합니다.

도둑질하다 잡힌 범인은 "저기, 진짜 범인이 도망간다."라는 거짓말도 서슴지 않습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가 이 내면의 도둑을 체포하려면

멈춰서,

살펴 보고,

귀 귀울이는 법을

훈련해야 합니다.

 

놓아버리기가 어렵게 비춰지는 이유는

졸고 있는 우리의 마음이 인생을

'원인과 결과가 분리된 것이라고'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고차원적 지성은 쌓여있는 욕망의 힘에 갇히지 않습니다.

내면의 고요한 관찰자는 생각 대신 직접 보는 것을 선택합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자신을 관찰한다는 말이 자신 안에 사로잡히지 않는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의심을 과감히 헤쳐 나가면 자신을 초월해 성장할 가능성도 커집니다.

당신과 자유로운 삶 사이를 가로막는 유일한 장벽은

바로 당신이 실수로 두려움과 의심에게 자리를 내준 것입니다.

 

 

한 귀절, 한 귀절에 깊이 공감하여

베끼다시피 정리 양(量)이 이렇게도 많은 경우도 드물다.

어느 만큼 실천으로 보답하느냐가 관건이다.

 

자신과 사건을 동일시하지 마라는 경고와

거짓 자아를 진짜로 착각하지 마라는 가르침 또한 의미 심장했다.

어쩌면 내 인생에서 남들에게 속은 것보다

자신에게 속은 것이 훨씬 더 심각했는지 모르겠다.

거짓 자아에 더 이상 끌려다니지 않고

내 삶을 뒤흔들었던 사건들을, 이젠 객관화하여 바라볼 수 있도록 차근차근히 정리해 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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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 없이 살아보기 - 개정판, 삶의 기적을 이루는 21일간의 도전
윌 보웬 지음, 이종인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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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목사님이 지은 책이다.

그가 제창한 운동의 이름이다.

보라색(변화를 상징하는 색) 고무 밴드를 팔찌처럼 차고, 불평할 때마다,

팔찌를 다른 쪽 팔목으로 옮기는 것이다.

옮기지 않고 21일(병아리가 알에서 깨어나올 때까지의 일수)을 넘기면 일단 성공한 것이다.

그렇게 할 때까지 보통 몇 개월이 걸린다고 한다.

 

나도 요즘 내가 불평이 참 많은 사람이라는 걸 깨닫고 있는 중이다.

불평의 밑바닥엔 대부분 원망이 또아리를 틀고 있는데,

나의 경우엔 특히 원망의 가면이 불평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모르고, 내 인생에서 쌓아놓은 원망의 에너지가

태산처럼 커져서, 이젠 아무 일이나, 아무 때에도

불쑥불쑥 쏟아져나온다.

그래서 내가 하는 거의 모든 말이나 말투에 불평의 형식을 빈 원망이 묻어 있다.

그것이 내 주위의 사람들, 특히 남편, 그 다음에 아이들의 일상까지 구겨놓곤 한다.

깽깽거리지 않을 때가 살면서 거의 없었던 것 같다.

 

나도 보라색 밴드를 하면 언젠가는 불평 습관을 고칠 수가 있을까?

아직 자신 없다.

한번 도전하고는 싶다.

그러나 하다가 잘 안 되면, 자신에게 좌절할까봐 두렵다.

단순히 불평하는 습관만 고친다고,

근본적인 결함이나 마음가짐까지는 치유가 될 것 같지는 않다는 노파심도 있다.

 

그러나 나는 지금까지 내 마음의 아픈 곳을 치유하고자, 평생을 애써 왔다.

어쩌면 지금 남은 것은

상처로 인해 만들어진 나쁜 습관의 껍데기 청소를 해야하는지 모른다.

때로는 껍데기도 태산처럼 쌓이면

그것이 다시 근원이 되어 또다른 나쁜 운명을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속담에서처럼

자라는 볼 기회가 드물지만, 솥뚜껑은 도처에 널려 있으니,

얼마나 자주 놀라겠는가?

그리고 모든 솥뚜껑이 자라처럼 보이면

사는 것이 얼마나 고단하겠는가?

 

내가 지금 그런 형국이다.

사는 게 고단하다.

단지 몸이 약하기 때문에 고단한 건만은 아닐 것이다.

부정적인 생각,

불평하는 말투,

과대망상적인 생각,

비관적이고 불안한 마음가짐 등이

내 인생을 고단하고 고달프게 만드는 것이다.

 

내가 잘 쓰는 말을 살펴보면 명약관하()하다.

미치겠다.

힘들다.

어렵다.

죽겠다.

쉬운 일이 없다.

아프다.

겁난다.

두렵다.

불안하다. 등등 대부분 부정적인 말들이다.

 

그 중, 힘들다는 말은

우리 작은 아이의 18번이기도 하다.

워낙 내가 빈번하게 쓰니

아이에게도 습관처럼 전염되었나보다.

 

내게 그런 감정이 있으니까, 그런 표현이 필요했던 것이라고 변명할 수도 있다.

그러나 미칠만큼한 일이 인생에서 가히 몇 번이나 있겠는가?

한 두 번 정도는, 아니 대여섯 번 정도는 있었을 수도 있지만

내가 쓴 만큼의 백분의 일, 천분의 일, 만분의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옛날 있었던 가장 강도 높은 미칠 뻔한 기억과 매치시켜서

계속 그런 표현을 남발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죽을 정도로 힘든 일도 그렇지 않은가?

그 때는 죽을 것 같지만

벗어나는 순간, 그런 느낌은 속은 것이었음을 자명하게 깨닫지 않았던가?

그러니까 그럼 표현이 입에서 튀어 나오려고 할 때,

자신의 순간적인 감정에 속으면 안 돼 라고 외치면 될 것 같다.

그 순간이 지나가서 그 감정이 사라질 때를 잠깐만 기다리면 된다.

 

자신의 힘든 감정을 표현해주는 적합한 말을 찾았을 때,

마치 저승에서 구원자를 만난 것만큼 든든하고

뭔가 그 표현으로 인해서 깔끔하게 감정이 정리되어

객관화가 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속이 후련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습관처럼 내뱉는 부정 어법은

그 말의 빈번한 사용이

있지도 않은 상황을 만들어 내는 어마어마한 에너지로 사용될 수 있는 것이다.

 

진정으로 표현의 자유를 획득코자 한다면

자신의 말투에 독버섯처럼 붙어 있는

불평이나 투덜거림, 원망을 떼어내야 하는 것이다.

 

 

P83

생각도 일종의 에너지다.

당신의 말은 당신의 생각을 드러내고, 그 생각을 강화하며,

자신도 모르는 새에 행동으로 옮기게끔 만든다.

당신의 불평은 당신이 갖고 싶다고 말하는 것들로부터

당신을 멀어지게 만든다.

 

불평한다는 것은

당신이 원하는 것보다 원하지 않는 것에 대해

더 많이 말하고 표현하는 일이다.

불평을 늘어놓을 때마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바대로 되어가지 않는 것에 대해

초점을 맞추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생각이 우리의 삶을 만들고,

우리가 하는 말이 우리의 생각을 만든다.

 

'당신의 입밖으로 나오는 것이 당신이 하고자 하는 것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오늘의 당신은 당신의 생각이 데리고 온 곳에 있으며,

내일의 당신은 당신의 생각이 데리고 갈 곳에 있게 된다.

                                                             -제임스 앨런

 

자신의 생각에 주의를 기울이게 될 때

나의 삶은 나 자신이 원래 선택한 방향으로 변화할 수 있고,

궁극적으로 다시 창조될 수 있다.

 

당신이 어떤 사람이나 특정 상황이 변하기를 원하면서 말한다면,

그것은 불평에 해당된다.

당신이 어떤 사물에 대해

그 사물이 원래 그대로의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을 원한다면,

그것은 사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불평하는 것이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자아를 쌓아 올리는 것과는 다르다.

자기 중심주의란 자신을 지독하게 증오한 다음에 자신이 얼마나 가치있는 존재인가를 증명하려는 태도를 말한다.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면, 당신의 자아도 사라지게 될 것이다.

당신의 자아가 사라지면

더이상 당신이 우월하다는 것을 증명할 필요도 못 느끼게 될 것이다.

 

스스로에게 감사하게 되기 전까지는

나는 나 자신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완전히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내 문제점은 계속해서 한 가지에만 촛점을 두고

결국엔 스스로에게서 항상 잘못된 점만을 찾아낸다는 것이었다.

 

우리 모두에게는 우리가 처한 상황을 좀더 제대로 인식하고 해결하기 위해

우리의 인생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정리해 보야야 할 때가 있다.

정리와 불평은 다른 것이다.

정리는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 당신의 감정을 나누는 것이지,

그 일을 사사건건 다시 되씹는 것은 아니다.

경험을 정리할 때 당신의 느낌에만 집중해서 말하도록 하라.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 다시 주저리주러리 이야기하지 않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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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의 힘 - 0.3초의 기적
데보라 노빌 지음, 김용남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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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불평없이 살아보기' 책을 읽고 연이어 읽은 책이다.

단순히 소설들이 아니고,

실천을 담보로 하는 책들이어서

읽은 후에는 어떻게 실천할까? 가 관건이어서

책 읽기를 다 끝낸 다음엔 부담이 생긴다.

 

그래도 다른 것보다는 실천하기가 좀 쉬운 것 같다.

100% 완벽하게는 못하지만

꼭 한 번 실천을 해보고 싶다.

 

이 책은 재미있는 실화와

이 덕목을 토대로 진행한 다양한 실험 결과가 함께 데이터로 첨가된 내용으로 꾸며져 있어서

지은이의 강조점과 설명이 더욱 설득력있게 다가오게 하는 힘이 있는 책이다.

 

요즘 배려, 경청 등 여러 가지 핵심 주제어로 꾸며진 자기 계발서가 많이 나오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감사'란 덕목은

'사랑'에 버금갈 정도로 삶의 기저를 이루는 덕목이 아닌가 한다.

 

연습과 훈련도 다른 덕목에 비해서 비교적 쉬운 편이기도 하다.

내가 좋아하고 존경하는 한비야씨도

학창시절  학교에서 매일매일 감사 일기를 쓰게 해서

어떤 땐 억지로 쓰다시피 했는데,

그것이 자신의  긍정적 성격을 만드는데 가장 크게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내 인생의 어떤 시기를 사로잡았던 핵심 키워드들이 제법 있었다.

고등시절에는 '의지'였고,

대학 시절엔 '겸손'이었다.

30대쯤에 나를 적셨던 주제어는 '사랑'이었고,

그 뒤에는 '믿음' 그리고 '희망'이라는 단어에 많이 마음을 쏟았다.

그렇게 쏟은 만큼 장족의 발전을 이루진 못했지만,

'감사'의 마음이 요 근래 마음에 많이 엉긴다.

 

'평상시에 해온 감사 연습이

고통을 겪는 과정이나 그것을 극복한 후에도 작용해,

강한 희망을 부여하는 것이다.'

 

감사의 힘은 결국 전혀 새롭지 않은 일상에서도

거기에서 새로운 해석 요소를 찾아내어

즐겁게 누릴 수 있는 능력이다.

 

감사의 힘은 '떠올리기 싫은 순간'으로부터  우리 영혼을 자유롭게 한다.

 

감사하는 태도를 지닌 사람들에겐 고통스러운 기억이 큰 위협 요소가 되지 못합니다.

결과적으로 감사하는 사람들은 힘든 기억의 영향을 덜 받는 것이죠.

 

감사의 힘을 믿고

끝까지 지침없이 나아가고 싶다.

 

내 인생의 모든 경험에 감사할 수 있을 때까지...

내가 만난 모든 사람에게 감사할 수 있을 때까지...

진정으로 자신에게 감사하는 일상을 살게 될 때까지...

 

비록 늦은 나이의 훈련이고 연습이지만,

자신에게 실망하지 않고 꾸준히 해보고 싶다.

끝까지 놓치지만 않으면 된다.

여태까지 너무 집착해서 살았던 집착심이

이럴 땐 긍정적 효과를 발휘하지 않겠는가?

집착이 집념이 되는 건  에너지의 방향만 틀면 되는 것이려니....후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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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지도 - 동양과 서양, 세상을 바라보는 서로 다른 시선
리처드 니스벳 지음, 최인철 옮김 / 김영사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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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며 ‘MBTI 검사’ 생각이 났다. 이번에 ‘인간관계교육’ 수업을 들으며 몇 년 만에 다시 검사를 받았다. 이전 검사 결과가 잘 생각은 안 나지만, 이번과는 달랐던 것 같다. 검사 결과에 대한 해석이 내가 생각하는 내 성향과 그다지 맞지 않는 부분도 있어서, 검사의 신뢰도를 그렇게 높이 봐줄 수는 없지만, 그보다 더 내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었던 것은 검사지의 문항이었다. 완충지대가 없는 2지 선다형에다가, 상황 설정이 없이 그냥 들이대는 문항이, 답을 하는 내내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다 하고 난 뒷맛이 개운치 않고 뭔가 떨떠름했다.

 

생각의 지도를 읽고 난 후, 불편함의 원인을 알게 되었다. 나는 관계와 상황을 중요시하는 동양인의 사고를 지녔기 때문이었다. 상황이나 관계에 대한 진술도 없이 단순한 발문으로 이루어진 MBTI 검사가 내겐 맞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나와는 달리 다른 사람들은 이런 마음의 갈등이 나처럼 많지 않았던 것 같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모두 조사를 해 본 것은 아니었지만 대체적인 분위기가 그랬다. 여기에서 또 한 가지를 알 수 있었다. 서구화의 속도가 무척 빠른 우리나라의 분위기에서 서구적인 성격유형검사에 대한 호오(好惡)에도 세대에 따른 차이가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 수업을 수강하는 60여명 가운데서 4,50대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손을 꼽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리고 나조차도 몇 년 전에 이 검사를 했을 때보다 지금 검사 문항에 대한 갈등이 더 많아진 것 같으니, 어쩌면 이것도 나이 들면서 더 동양적인 의식 구조로 회귀하는 내면의 변화를 반영하는 것은 아닐까 한다.

 

이 책을 읽기 전에도 역사라는 전공 탓인지 몰라도 동양과 서양의 차이에 대해 나름대로 생각해 본적이 많았다. 현실적으로 내게 가장 와 닿았던 차이는 의학 분야였다. 아마 그처럼 눈으로 드러나는 현격한 차이를 보이는 학문 분야도 드물 것 같다. 세상을 지각하는 방법에 있어서 전체를 보는 동양과 부분을 보는 서양의 차이가 인체에 대한 접근 방식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난다.

 

인간의 몸을 소우주로 대하며 몸 속의 병 역시 균형과 관계의 어그러짐으로 파악하여 초목에서 생약재를 구하고 2cm도 채 안 되는 가느다란 침으로 만병을 다스려나갔던 동양 의학과는 달리, 서양의 의학은 인체를 낱낱이 해부하여 병의 원인을 말소해 버린다. 도려내고 잘라내고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며 마지막 남은 세균 한 마리까지 끄집어낸다. 그 와중에 심장이 멈추는 경우도 있고, 수술용 고무장갑이 뱃속에 남아있는 채로 봉합해 버리는 황당한 실수도 생길 수 있다. 어쨌든 서양 의학은 전체의 균형을 깨뜨려서라도 오로지 병인(病因)을 발본색원(拔本塞源)하는데 총력을 기울인다.

 

동양과 서양의 의학, 각각이 가진 장점이 있고, 양자가 결합하면 병을 치료하는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찾아낼 수 있긴 하지만, ‘동서양이 어떻게 이렇게 다른 접근법으로 병을 다스려 왔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살면서 동양 의학과 서양 의학 양쪽의 도움을 다 받고 있고, 병의 종류에 따라 병원을 이리저리 선택하긴 하지만, 가끔 서양 의학에서 황당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둘째 아이를 낳고, 좌골 신경통이 심해서 걷지를 못했다. 출산 휴가 두 달이 지나도 걸을 수가 없었다. 당연히 학교에 출근할 수가 없어서 병가를 내려고 진단서를 끊으러 갔다. 출산한 병원의 내과에서 내 증상에 대해 얘기를 했는데, 의사가 한다는 말이 아무 이상이 없으니 진단서를 끊어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걷지 못하는 환자에게 아무 이상이 없다는 말이 가당키나 한 말인가!

 

병원을 나오면서 서양 의학이 가진 허점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을 했다. 부분을 종합한 것이 결코 전체가 아닌 것을 서양 의학은 간과할 때가 많은 것이다. 물론 각종 수술에서 발휘하는 순발력과 전염병의 예방과 치료 면에서 유능하고 확실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동양 의학이 따라가지 못하는 부분이긴 하다. 이런 면에서 우리나라의 양의학과 한의학이 서로를 불신하다가 최근 양․한방 협진 분위기로 나아가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종교에서도 그러한 차이가 드러난다. 개인적으로 명상을 오래 한 편이다. 명상이 아니라도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불교 문화권에 속해 있다. 우리가 어른들, 특히 엄마에게 가장 많이 들으면서 성장한 말이 “내가 전생에 무슨 죄가 많아서...” 류(類)가 아닌가 한다. 직선적인 진화와 진보를 추구하는 서양과 달리 동양인의 사고방식은 순환론이다. 죽는 것을 돌아간다고 표현하는 것만 봐도 그러한 순환론과 회귀론을 짐작할 수 있다. 서양 기독교를 대표적으로 상징하는 십자가만 봐도 두 개의 직선이 90°로 교차하고 있다. 그러나 동양의 불교는 원이나 수레바퀴로 대표된다. 모든 생명체는 다시 돌아가고, 다시 태어나는 윤회를 계속 되풀이하고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한 십 년 전에 근무하던 학교에 원어민 교사가 있었다. 미국의 유수의 대학을 나온 실력파 영어 교사였다. 철학과 예술 등 다방면에 조예가 깊어서, 서투른 영어로 대화를 나눈 적이 자주 있었는데, 유독 가장 이해시키기 힘들었던 부분이 ‘마음을 비운다.’는 표현이었다. 아마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그 표현이 가진 의미가 어떤 것인지를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거진 이해를 할 것이다. 그런데도 그 지적인 원어민 교사는 끝내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논리적으로 맞지 않다는 항변을 했던 걸로 기억을 한다.

 

서양 기독교의 기도를 보면 바로 그렇다. 원하는 바를 끊임없이 갈구하고 비는 행위가 바로 기도다. 동양의 도교나 불교를 보면 정반대다. 끊임없는 비움을 추구한다. 강인한 견인력과 행동력이 기독교가 가진 강점이긴 하지만 유일신만을 숭배하는 부작용으로 인해 다른 종교와 갈등을 초래하기도 한다. 도교나 불교는 ‘비움’의 행위를 통해 다른 종교에 대한 포용력을 지닌 것이 사회 갈등을 줄이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우리나라에도 점차 기독교가 늘어가고 있고, 젊은층으로 내려갈수록 서구화의 경향이 짙어서 그로 인한 세대 갈등도 심하긴 하지만, 아직까지 이 책에서 말하는 동양적 경향성이 밑바닥에 깔려 있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경험을 한 적도 있다. 수업 시간에 역사에 관한 다양한 사진을 학생들에게 보여주는데, 교사인 나는 그 그림의 주인공을 중심으로 핵심만을 설명한다. 그런데 그때 꼭 아이들이 배경에 대해 이런저런 사항을 지적하면서 질문을 하기도 하고, 말을 보태기도 한다. 그런 아이들의 세밀한 관찰력이 참 놀랍다는 생각을 해왔는데, 이 책에서 지적하듯이 서양인들은 주인공을 중요시하고, 동양인들은 배경을 중요시한다는 설명에서 고개가 끄덕여진다. 내가 보기에 거의 서양적인 특성을 많이 가진 요즘의 아이들에게도 그러한 동양적인 특징을 가끔 만나게 되는 모양이다.

 

아이를 키울 때도 경험했던 사실이 있다. 서양의 아이들이 명사 중심으로 언어를 익히는데 비해, 동양의 아이들은 명사와 동사를 함께 사용한다는 설명이 제 5장에 되어 있다. 우리 큰애가 말을 할 때, 그러했던 것 같다. 물론 ‘엄마, 아빠 할매’ 라는 명사를 가장 빨리 하긴 했지만 그에 못지않게 ‘물 줘’ ‘우유 줘’ ‘가자.’ ‘자자’ 라는 동사의 사용도 명사 못지않게 빨랐다.

 

‘동양과 서양의 방식 중, 어느 쪽이 옳으냐?’ 하는 것을 가늠하기가 어려운 경우가 많다. 다만 동양에 속한 우리로서 의학이라든가, 종교, 등 다양한 분야에서 자기 지역의 환경에 맞게 형성된 문화의 측면이 많을 것이다. 정확한 진실은 알 수 없지만, ‘세상을 해석하고 우리의 몸과 마음을 가꾸어가는데 좀 더 적합한 것이 우리의 문화나 세계관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무엇이든 한 방향만으로만 치달을 때, 그것 역시 진실이나 사실에서 멀어져가는 결과를 낳을 수가 있다. 세계가 하나의 생활권으로 발달해가는 지구촌 사회에서 우리의 방식만이 아닌, 우리와는 사뭇 다른 서양의 방식이 우리의 생활 문화에 섞여 들어오는 것이 우리의 삶과 생각의 폭을 넓히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우리 문화를 객관적으로 성찰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된다. 다만 그것이 제국주의의 다른 형태로서 우리의 문화를 잠식해나갈 때, 우리의 정체성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리고 우리는 허수아비춤만 추게 되는 허무한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는 점을 도외시해선 안 될 것이다.

 

이 책에서 동양의 예로서 중국과 일본의 경우가 자주 등장하고, 한국의 예는 많지 않음이 단순히 지은이 주위에 한국 연구자나 제자가 많지 않아서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중국이나 일본이 동양적인 정체성을 잃지 않은 부분이 많은데 비해, 한국은 급속한 서구화의 물결과 신식민주의 재편성 과정에서 어느 것이 우리의 본모습인지 스스로 혼란스러울 때가 잦을 정도로 우리의 문화 정체성을 잘 지켜오지 못한 부분이 많다는 반성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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