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 함무라비
문유석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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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라는 아주 좋은 말이 있다. 그런데 이 말의 앞에는 대중의라든지, ‘사법적이라든지, ‘사회적이라는 말이 붙기도 한다. 앞에 붙는 말에 따라서 정의는 묘하게 달라지는 것 같다. 그래서 가끔은 내 일도 아닌데 괜히 화가 난다. 내가 아는 정의는 어떤 세상이나 어떤 세계의 그것과는 많이 동떨어진 것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단순하고 명쾌한게 좋아서 인지 나는 추리소설을 아주 좋아한다. 나쁜 놈은 기상천외하게 나쁜 짓을 저지르지만 결국은 악행이 밝혀지고 벌을 받게 된다. 이 얼마나 명쾌하고 통쾌한 정의의 구현인가. 현실세계에서는 드물게 벌어지고, 별로 일어나지 않는 결론이기도 하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추리소설은 항상 범인이 잡히는 데서 끝이 난다. 법정을 무대로 하는 일부 특수한 설정의 소설들을 제하고 나면 범인이 법정에 세워져서 판사에게 죗값을 받는 결말은 본적이 없다. 정의를 주제로 하는 각종 엔터테인먼트 물에서 정의의 사도는 늘 탐정이거나, 경찰이거나, 변호사거나 검사다. 사실 죄를 특정하고 죗값을 저울질 하는 곳은 법원이고 그 곳에서 악인의 형량을 결정하는 것은 판사인데 말이다. ‘악을 벌하는 정의의 사도라는 프레임에 걸맞은 역할을 하는 것은 어쩌면 판사일 것 같은데, 내가 좋아하는 픽션에서는 그려지는 판사는 항상 미미한 조연이다. 어쩌면 피해자이거나 악과 결탁한 부패한 권위로 그려지기도 한다.

 

주인공이 변호사도 아니고 검사도 아닌 판사라는 점이 확실히 흥미를 끄는 부분이었다. 법정 활극이라는 데 주인공이 젊은 여성인데다가, 별명은 미스 함무라비라니 거칠고 과격하지만 속 시원한 사건들이 벌어질 것 같은 엄청난 제목이다. 어떤 종류의 이야기가 기대되기도 하고 예상 가능한 이야기들이 쉽게 그려졌지만, 열어놓고 보니 실상은 법정판 미생이었다. 예상과는 많이 달랐지만 그래도 흥미롭게 끝까지 읽어나갈 수 있었던 건 어째서 범죄, 추리 소설에서 그려지는 판사의 역할은 조연(혹은 피해자, 악역)일 수밖에 없는가라는 소소한 질문에 대한 답이 들어있어서 이기도 하고, 다뤄지는 사건들이 너무나도 생활 밀착형이라 나도 모르게 빠져들어 읽게 되더라.

 

작가의 이력을 보자면 아마 이 책만큼 판사들의 현실을 제대로 보여주는 책을 없지 싶었다.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때때로 당황스러웠다. 기성 판사들의 목소리를 통해 ‘정의는 한정된 자원이라고 말하고, ‘법원은 사회운동을 하는 곳도 아니고, 탐정놀이를 하는 곳도 아니다. 판사는 정의의 사도가 아니다라고 말하는가 하면 직접적으로 판사가 할 일은 법정에서 분쟁을 해결하는 일이지 길거리에서 정의를 실현하는 일은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으니 말이다. 공명심 조차 가져서는 안 되는, 오로지 가운데에 서야 하는 사람으로서의 판사라는 직업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 위치라면 확실히 격정적인 범죄, 추리극에는 어울리지 않는 직업이긴 하다.

 

 

정의로운 변호사, 정의로운 검사는 입에 붙어도 정의로운 판사는 왜인지 어색한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인지에 대해서도, 이 책은 의외의 답을 주고 있다. 사회적 정의와 사법적 정의의 괴리를 우리는 일상에서 빈번히 느끼고 있다. 어째서 저 천인공노할 범죄자의 죗값은 고작 몇 년에 불과한 것인지, 누가 봐도 억울한 소시민인 것 같은 그는 왜 그런 판결을 받아야 하는지, 음주가 죄의 경중을 가리는데 영향을 끼치는 것은 어째서인지 같은 의문에 대해 작가는 마치 대화를 청하는 것처럼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범죄자에게 너무 무른 것 같은 판결을 내려졌을 때, 사람들은 피해자가 판사의 자식이거나, 부모거나, 형제였다면 과연 그런 판결을 내릴 수 있겠느냐며 분노하고 사법적 정의라는 것을 냉소하게 되는 일이 많다. 하지만 사건의 모든 기록을 읽고 법을 근거로 판결을 하는 판사의 입장에서는 사건이 훨씬 다양한 모습을 보인다. 판사의 일은 현장을 직접 뛰는 것이 아닌 기록과의 싸움이라고 한다. 오로지 기록과 증거만으로 법에 근거하여 판단을 내린다. 일반 대중과는 사건에 대한 접근도 다르고 판단의 근거도 전혀 다른 것이다. 법이 현실의 모든 상황을 반영하는 것도 아니니 사법의 정의와 일반 대중들이 느끼는 정의는 분명 다를 수 밖에 없다. 그것이 어려운 것이다. 어려운 것을 어렵다고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법이 항상 약자의 편에 서는 것도 아니고, 호소하지 않으면 구제해주지 않는다. 울지 않는 아이에게는 젖을 물리지 않는 매정한 어미같은 법을 근거로 사건의 시비와 죄의 경중을 다루는 일이 그들의 일이다. 일반 대중의 상식으로는 이해가지 않는 판결이 내려질 때도 있고, 그럴때면 그들의 사고체계는 나와는 영 다른, 다른 세상 사람 같이 느껴진다. 소설의 인물들은 정의는 한정된 자원이라고 말하는 기성 판사에서부터 냉철하고 이성적인 엘리트 판사, 혈기 넘치는 초짜 판사까지 모두 평범하게 그려진다. 평범한 두 아이의 아빠로, 중간에 끼어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직장인으로, 평범하게 세상이 두려운 젊은 여자로. 마치 판사도 평범한 사람이랍니다라고 알려주고 싶어하는 것처럼 조금 과정된 듯 하게 말이다. 그런 평범한 사람들의 일이라는 것이 다양한 갈등상황을 맞닥들이는 것이라, 인간에 대한 혐오나 회의만 가득할 있을 것만 같은데도 판사들의 속내는 의외로 동정과 연민이라는 감정도 많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야기들이 이어진다. 그게 이야기의 반전포인트이기도 하고 또 의외여서 이상하기도 하고, 읽는 내내 기분이 묘하더라. 차갑고 딱딱할 것만 같은 석고상의 손에서 의외의 온기를 느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좀 당황스럽기도 하고, 아주 조금 두렵기도 하고, 조금 우리와 닮았다고 느껴지기도 했다.

 

사법적 정의와 일반 대중이 느끼는 정의는 분명 다르다. 그 간격이 때때로는 너무 멀게 느껴질 때도 많았다. 사법의 세계는 법을 아는 소수만의 세계이고 그들은 영 현실세계와 동떨어진 사람들인 것만 같았다. 그런데 그들도 사실은 법과 현실의 괴리에 대해 일반 대중과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런 고민을 하고 있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 좋았다. 솔직히 인물들은 너무나 소설 같은데, 이야기는 명쾌하지도 않고, 딱 떨어지는 결론도 아니라서 개인적인 취향은 아니지만 그래서 좋았다. 그들도 고민하고 있구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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