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정말 원하는 건 뭐지? 마스다 미리 만화 시리즈
마스다 미리 지음, 박정임 옮김 / 이봄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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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송보송해 보인다. 한마디로 사랑스럽다. 시뻘건 얼굴에 입을 헤 벌리고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있는데 웃는 표정도 아니지만 눈을 뗄 수가 없다. 언니가 수 시간의 진통 끝에 생살을 째고 장기를 가르고 아이를 낳았다. 형제가 많은 나는 벌써 네 번째 조카를 만난 것이지만 여전히 신기하고 놀라운 일이다.

 

 

어릴 때는 엄마가 되는 것이 너무도 당연해 보였다. 여고 다닐 때 모의고사 점수가 잘 나오질 않는다며, 대학도 꿈도 이제는 다 모르겠다고 훌쩍이는 친구에게 나는 이렇게 말을 했었다. 무슨 걱정이야. 그래도 한 십년쯤 지나면 엄마는 돼 있겠지. 그때 우리는 무언가 되지 못할까봐 너무도 무서웠던 것이다. 대충 십여 년이 지난 지금 그 친구는 정말 엄마가 돼있다. 그 친구 카톡 프사에는 방긋 우는 아기가 걸려있다. 그것도 참 신기하고 놀라운 일이다.

 

 

“되고 싶은 대로 된 사람만 있으면 세상은 북새통이 될 거야~. 신부가 되겠다는 꿈 정도는 이루어도 좋겠지만…….” -20p

 

 

항상 무언가가 되고 싶었던 것 같다. 뭐가 되고 싶은지 적어내야 할 일이 많았던 때는 주변에 너무나도 휘둘려서 이것도 되고 싶었다가 저것도 되고 싶었다가 했었다. 다에코의 말처럼 “되고 싶었던 게 꼭 되고 싶었던 건 아니었”는지 그중에서는 무엇도 되지 못했다. 그래도 엄마는 당연히 되는 건줄 알았지만 지금은 잘 모르겠다. 엄마가 그냥 되는 게 아니라는 걸 똑똑히 아는 지금은 사실 자신이 없다.

 

 

생각해 보면 꽤 오랫동안 나는 누구 씨의 딸이나 누구의 동생으로 불렸다. 그렇게 관계로 규정되는 나에 대한 정의가 너무도 불편하고 싫어서, 너무도 싫어서 견딜 수 없을 때도 많았다. 내가 아니라 누구의 무언가로 불리게 되어 버리면 그만큼 나의 존재감이 나눠져서 줄어드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그런 내가 어쩌면 평생 ‘누구의 엄마’라는 호칭을 얻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이상하게 서러워 진다. 결혼을 하고 싶은 것도, 사무치게 아이가 갖고 싶은 것도 아닌데 말이다.

 

 

내가 정말 원하는 건 뭐지? 가끔은 나도 나를 잘 알 수가 없어서 혼란스럽다. 이 짧은 만화를 읽고 나는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A4용지 한가득 내가 원하는 것들을 적어 내려갔다. 땀이 나고 열이 난 몸뚱이를 씻고 싶고, 달디 단 초콜릿이 먹고 싶고, 잠이 들고 싶고, 하고 싶고, 또 하고 싶고. 종이 한 장을 가득 채웠건만 대게가 일신의 욕구들이었다. 희망이 깃들어 있는 욕망으로 읽힐만한 것은 거의 없었다. 또 서럽고 서글퍼 졌다. 편안하고 싶은 마음뿐인 종이를 들여다보고 있자니 어쩌면 내가 바라는 것도 ‘보장’이 아닐까 싶었다. 나에 대한 보장. 내가 온전할 수 있는 보장.

 

 

이제는 ‘좋은 나이’라는 말을 들어도 수긍하기 어렵고, 그렇다고 많이 늦어버렸다는 생각 또한 들지 않지만 어쨌든 현재의 나는 벚꽃 나무도, 동백나무도 되지 못했다. 종가시나무라서 서글픈 게 아니라 더 이상 무언가가 되고 싶지도, 될 자신도 없어진 것 같아 아프다. 이대로 정말 아무것도 되지 못할지도 몰라. 그럴지도 모른다. 여고시절 그 친구처럼 울먹이면 ‘그래도 엄마는 돼 있겠지’라고 말해줄 사람도 없겠구나. 생각해 보면 지금의 나는 참 여러모로 어중간한 사람이다

 

“나무에서 떨어진 도토리는 모두 나무가 되는 게 아니라 새에게 먹히거나 밟혀서 으깨지고 새싹이 나올 수 없는 곳으로 굴러다니기도 한다. 나무가 되는 것은 도토리에게 아주 힘든 일이라고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그렇지만 엄마는 이미 ‘있다.’ 그것은 무척 대단한 일이다. 분명히 이 도토리에게는.” - 125p

 

 

십년 뒤에도 나는 있을 것이다. 아마도 있겠지? 높은 확률도 나는 십년 뒤에도 ‘있을’것이다. 그래, 그거면 족한 거야. 이 만화는 그렇게 말해주고 있다. 별거 아닌 단순한 그 말이 아무렇지도 않게 위로가 된다. 또다시 10년 뒤에 여전히 어중간한 나라도, 나는 있을 것이다. 나로. 그 말이 ‘멋진 내가 되자’라든가 ‘훌륭한 내가 되자’보다 더 대단해 보인다. 더 따뜻하게, 다정하게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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