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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그림자 그림자의 바다 ㅣ 십이국기 1
오노 후유미 지음, 추지나 옮김 / 엘릭시르 / 2014년 11월
평점 :
머리색이 남다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행실이 멀쩡한 모범생을 불량아 취급한다든지, 가정에서는 여자아이니까 학업보다는 조신하게 신부수업이 하는 것이 좋다고 여기는 분위기 같은 것을 보면 확실히 현실감이 떨어지기는 한다. 이 시리즈가 세상에 나온 지도 벌써 20년도 더 됐다고 하니 어느 정도 감안은 해 줘야 할 부분이겠다. 그럼에도 흥미로운 것은 20년이 지났든, 앞으로 더 몇 년이 지난다 해도 식상해지지 않을 독특하고 탄탄한 세계관을 가진 소설이라는 점이다. 감히 단언컨대, 여고생을 주인공으로 하는 이계 워프물 가운데서는 이 책이 가장 독보적이리라. 이 책이 다시 출간된다고 하니 정말 반갑고 기쁘다. 오노 후유미의 십이국기!
새로 시작하는 십이국으로의 여행
이번에 엘릭시르에서 새롭게 나오는 십이국기는 시리즈 완간을 목표로 한다니 시작부터 든든한 기분이다. 이 시리즈를 사랑하는 독자들이 많았던 만큼이나 구판본의 번역에 대한 불만도 많았는데 이 부분도 충분히 개선되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운 좋게도 사전 평가단에 참여하게 되어 당장 서점에 진열해도 될법한 가제본을 받아 읽게 되었는데, 정말 오랜만에 다시 읽게 되니 새삼 새롭고 또 재미있더라.
일단 이번에 받아든 가제본과 구판본을 비교해 보자면 눈에 띄는 부분은 아무래도 외형인데, 판형이 작아진 것이 마음에 든다. 일전에 1부, 2부로 나눴던 것을 한권으로 합치고 내지 디자인도 넣고 해서 더 빵빵해지고 더 화려해진 느낌이다. 가제본에는 일러스트가 들어가 있지는 않는데 일러스트 까지 제대로 들어간 정식 출간 본은 진짜 멋질 듯하다. 개인적으로 구판 본에서 아쉬웠던 부분이 표지디자인이었는데, 이번에 나오는 버전에서는 표지디자인에도 일러스트를 살리는 쪽으로 가는 것 같더라. 이것도 마음에 드는 부분.
번역 부분에 대해서는 좀 어렵다. 나는 일단 뜻이 통하게 잘 읽히기만 하면 땡큐인 사람이라 사람들이 그렇게 욕해대던 구판본도 사실 그리 나쁘지 않게 읽었다. (물론 오락가락하는 이름 표기와 오타는 나도 거슬렸다. 이건 번역문제가 아니라 성의 문제니까) 당장 눈에 띄는 것은 몇몇 고유명사 부분인데, 케이키가 게이키가 돼 버리고 타이호는 태보가 돼서 처음에는 좀 어리둥절했으나 번역자나 편집부에서 고유명사 번역에 고민을 많이 한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라크슌은 라쿠슌으로 일본어 발음을 살렸고, 연왕은 연왕, 엔키도 그대로 엔키, 경동국의 왕은 케오오가 아닌 경왕(이건 구판도 그렇지만), 경의 기린인 경기가 케이키가 아닌 게이키가 된 것만 봐서는 이름에 있어서 일본식 발음을 살리는 한편 표기법에 맞춰 적는등 나름 원칙이 있는 것 같다. (케이키가 게이키가 된 것은 미묘하지만 조금 어색하긴 하다...) 가제본인지라 이대로 책이 나올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고유명사가 오락가락 이렇게 표기됐다 저렇게 표기됐다 하는 일은 없겠지. 당연히 그래야 되는 거지만 말이다. 일본식 존칭이 눈에 띄지 않는 점도 그렇고, 원체 번역에 말이 많았던 책이니 나름 신경을 많이 쓴 것 같다.
엘릭시르에서 출간하는 십이국기는 일본 신초샤 신장판을 텍스트로 번역했다고 하는데 신초샤 신장판이 개정판이라고 하더라. 개정판이라고는 하나 내용상 큰 변화는 없다. 하지만 전보다 더 잘 읽힌다는 느낌이 드는것은 원작자가 가필 수정을 해서 그런 것인지 어쩐지 알 수 없다. 오랜만에 읽었는데 내용 전개를 다 아는데도 재미있게 술술 넘어가서 조금 놀랬다.
어쨌든 가제본만 읽었을 뿐이지만은 전반적으로 공을 많이 들였다는 느낌이다. 이 시리즈가 무사히 완간될 수 있기를! 읽어보지 못한 뒷이야기들이 아직 많이 있다.
스케일이 엄청난 성장소설
십이국기는 운명에 대한 이야기이다. 신이 있고, 인간이 있고, 반인반수가 있고 요마가 위협하는 환상의 세계. 생명은 나무에서 열매의 형태로 잉태되고 신분의 귀천을 따지지 않고 하늘이 정한 데로 왕이 세워지고 하늘의 뜻을 전하는 기린이라는 신비하고 영험한 신수가 존재하는 나라. 그런 세계에 나 홀로 떨어져 갖은 요마들의 위협과 믿었던 사람들의 배신에 너덜너덜해지는 주인공 요코가 진정한 조력자를 만나고 마음을 치유 받고 한 단계씩 성장해 나가 결국에는 정해진 운명을 받아들이는 그런 이야기다.
사실 평범한(줄 알았던) 사람이 사명을 받아서 어느 날 갑자기 영웅이 되는 유의 이야기는 멋있어 보일지는 몰라도 그렇게 허무할 수가 없다. 정해진 운명대로 주워진 수순을 밟듯이 예정된 결말로 향해가는 이야기가 독자에게 무슨 카타르시스를 줄 수 있을까?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십이국기도 그저 그런 이야기로 비춰질 수도 있겠다. 하지만 십이국기에는 여고생 주인공의 생고생, 갖은 고생, 죽을 고생이 있다. 현실 세계에서도 제대로 발붙이지 못하고 그저 흘러가는 데로 받아들이고 제대로 반발해 본적도 없었던 나약했던 소녀가 어느 날 갑자기 이계로 나 홀로 떨어진다. 믿을 만한 사람인줄 알았던 것은 종적을 감춰버리고 목숨을 위협받는 상황 속에서 고군분투 하는 과정은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참혹하다. 그 면면에서 인간의 나약함과 악랄함, 이기적이고 바보 같은 모습들이 집요하게 그려진다. 하지만 그렇게 짓밟히고 꺾이는 과정 속에서 비로소 성숙해 간다. 그런 과정들이 좀 남다르달 까. 내가 이 책을 참으로 오래전에 읽었건만, 판타지 소설이라기보다는 성장소설로 기억하는 이유이다.
이렇게 방대하고 엄청난 이야기가 고작 시리즈의 1편이다. 이 뒤로는 신비한 존재인 기린에 대한 이야기도, 12국의 다른 나라 이야기들도, 그 안에 살아가는 인간이거나 반인반수인 인물들의 이야기도 남아있다. 출판사가 끝까지 열심히 달려주길 바란다. 이 시리즈는 정말 재미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