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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브리오 기담 ㅣ 이즈미 로안 시리즈
야마시로 아사코 지음, 김선영 옮김 / 엘릭시르 / 2014년 3월
평점 :
나는 태아를 주웠다. 새끼손가락만 한 크기에 하얀 뱃살이 개구리나 애벌레 같았다. 긴 머리를 말총처럼 묶은 단정한 얼굴의 이즈미 로안이 그것은 “엠브리오” 라고 한다고 알려줬다. 태아, 아니 태아라고 부르기도 애매한 배아 상태의 인간. 그것은 인간인 것이다. 나는 인간을 주웠다. 아니 잠깐, 어떻게 태아가 탯줄도 없이 어미의 배 밖에서 멀쩡히 살아 있을 수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한 순간 엠브리오는 허여멀건 한 배를 부르르 떨더니 순식간에 거무튀튀해 졌다. 죽어버린 것이다.
놀라서 깨어나니 관자놀이가 뻣뻣했다. 책을 베고 자면 책 꿈을 꾼다는 말이 반쯤은 맞는 말이구나 싶었다. 간만에 만난 재미있는 단편소설이라 자기 전에 야금야금 읽고 있었는데, 머리맡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던 책이 머리에 베어져서 이상한 꿈까지 꾸게 한 모양이었다.
새삼 느끼는 거지만은, 참 상상하기 어려운 시절이구나 싶다. 잡다하게 너무나도 많은 비밀이 까발려져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게으른 탓에 내 머리가 점점 굳어가고 있기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면 스마트폰에, 인터넷에, 세상의 모든 지식을 담고 있는 것 같은 검색포털에, 세상이 너무도 똑똑하고 편리하고 무뚝뚝하기 때문일까?
뭐 이유야 어찌됐든, 아니 그런 이유에선지 어쩐지, 이 책의 배경은 과거의 어느 시절이다. 이제 막 도로가 정비되기 시작하고, 사람들이 이제야 낯선 곳으로 여행을 다니기 시작한 그런 시절 말이다. 때문에 여행을 떠나는 이들에게는 여행 가이드 역할을 하는 여행서가 인기이고, 또 그런 여행서를 전문으로 집필하는 전업 작가가 존재하는 세상이 『엠브리오 기담』의 세계인 것이다.
이즈미 로안은 단정한 얼굴에 삼단 같은 머릿결을 지닌 미남인데다가 나름 인기 있는 여행서 작가이다. 여러 곳에서 의뢰를 받고 유명한 온천지 같은 곳을 여행하며 여행서를 쓰는데, 신기할 정도로 매번 길을 잃어버리고 마는 길치다. 그런 주제에 본인은 태평한 성격이어서 어떤 상황이 닥치든 유유자적이다. 하지만 그와 종종 동행하는 짐꾼 미미히코의 사정을 들여다보자면 여간 안타까운 것이 아니다. 이즈미 로안과 함께 길을 잃으면 반드시 이 세상의 일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기괴한 것과 마주치게 되는데, 그 괴이라는 것이 마주치는데서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낮이고 밤이고 할 것 없이 안개가 자욱한 마을에는 개구리 같기도 하고 벌레 같기도 한 엠브리오들이 꿈틀거리는 호수가 있고, 산길을 헤매다 들어선 평야의 마을에는 500년을 살아온 노파가 맑은 눈을 하고는 여행자를 맞는다. 우연히 흘러들어간 온천마을의 효엄있는 온천에는 밤마다 그리운 죽은 사람이 찾아오고, 산길을 오르다 만난 바닷가 마을에는 풀이고 나무고 돌멩이고 할 것 없이 모든 사물이 사람의 얼굴로 보인다. 오래전 무너져 없어지고 더 이상 ‘있을 수 없는’ 다리가 나타는 마을에, 내가 알지 못하는 ‘내’가 살다 죽은 마을까지. 태생부터 범상치 않은 이즈미 로안과 함께라면 이 세상의 어디든 닿게 되고,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닌 것 까지도 만나고 만다.
탯줄도 없이 자궁 밖으로 쫓겨난 엠브리오를 죽이지 않을 정도의 상상력으로 이야기는 이어지고 이어지고 이어지는 듯 하며 끝맺음 한다. 하나같이 기괴하지만 그 바탕에는 모성이라든지, 부성이라든지, 조금 뒤틀린듯하지만 어쨌든 ‘가족애’라고 부를만한 것이 녹아들어 있어서 끔찍하거나 두렵지는 않다. 소름이 돋기도 하지만 적당히 아련하고 따뜻해서 여운이 길다. 이런걸 바로 ‘기담’이라고 하는구나 싶은 말 그대로 기담이다. 그냥 기담이 아니라 ‘훌륭한’이라거나 ‘천재적인’이라는 수식어를 붙여주고 싶을 정도로 재미있다.
상상하기는커녕 뭔가를 생각하는 것조차 부담스러워지려고 하던 차에 상상력을 자극하는 기가 막힌 이야기를 만났다. 엠브리오를 줍는 꿈은 나쁘지 않았지만 수상한 데스마스크가 가득한 산적소굴에 잡혀 들어가는 꿈만은 꾸고 싶지 않으니 오늘부터 이 책은 책장에 고이고이 모셔놓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