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기담 - 고전이 감춰둔 은밀하고 오싹한 가족의 진실
유광수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생각하기에, 이 세상에는 딱 세 가지의 책만이 있을 뿐이다. 내가 읽은 책과 내가 안 읽은 책 그리고 내가 읽었다고 착각 하는 책이 바로 그것이다. 물론 내가 세상의 책은 분류하는 카테고리로 삼은 세 종류의 폴더 가운데 가장 빈약한 것은 ‘읽은 책’ 폴더이다. 노파심에 밝혀 두건대 나는 딱히 이 세상 모든 책들을 읽어주겠다는 다부진 야망을 가진 독서광은 아니다. 그러므로 ‘읽은 책’ 폴더와 ‘안 읽은 책’ 폴더 사이의 엄청난 빈익빈 부익부 현상에 죄책감을 느낀다거나 자학 한다거나 하는 타입은 아닌 것이다. 하지만 때때로 나는 의외의 사실을 발견할 때마다 엄청난 쪽팔림을 경험하는데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얼마 전 모 퀴즈프로그램 문제에 ‘콩쥐의 성(姓)은 무엇일까요?’라는 문제가 출제됐었다. 아무생각 없이 티비를 보다가 목구멍에 찐 달걀이라도 걸린 듯 한 갑갑증이 일어서 켁켁댔었다. 그 유명한 콩쥐팥쥐 이야기, 누구나 아는 국민동화 콩쥐팥쥐가 아닌가. 근데 나는 소설 콩쥐팥쥐를 읽어본 일이 없다. 읽어볼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니까. 근데, 읽지도 않았는데 이미 읽은 거나 다름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니 조금 웃긴다. 뭐 이런 사례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내가 ‘읽었다’고 착각하는 무수한 이야기들과 ‘읽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게 대충 알고 있는 그 많은 이야기들이 새삼 나를 쪽팔리게 만들더라.

 

 

이 책을 읽을 때 그 쪽팔림은 배가 되었다. 이 책에는 콩쥐팥쥐에 버금가는 국민동화, 국민고전소설로 꼽힐 만한 이야기들을 소재로 한 9편의 개성강한 글이 실려 있다. <가족기담>은 익히 알려진 민담과 고전소설을 날카로운 주제의식을 갖고 새로운 시각에서 다시 읽어 내려간 기록이다. 저자의 시선을 따라 저자가 품은 주제의식을 투영하여 낯익은 이야기들을 낯설게 읽어보고 교훈과 감동으로 포장되어 가려진 충격적인 진실과 경악스러운 의도를 파헤쳐보자는 것이 아마 이 책의 ‘주제’가 아닐까 싶다. 뭐 상당히 흥미롭고 재미있다. 어릴 적 배추도사 무도사가 들려주는 전래동화로 재미있게 보고 들었던 이야기들이 알고 보면 엽기 호러영화보다 더 끔찍하고 포르노 잡지보다 더 폭력적이고 선정적이더라 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니 얼마나 재미있겠는가. 심청이가 왜 눈먼 아비를 남겨두고 인당수에 몸을 던졌겠는가? 재색을 겸비한 장화와 홍련이는 노처녀가 되도록 왜 시집도 못가고 있었을까? 열부 함양박씨가 자살을 한 진짜 이유가 뭐겠나? 호부호형 못한 길동이가 불쌍할까? 어린나이에 주인마님 수발들다 난데없이 길동이를 갖은 춘섬이가 불쌍할까? 2명의 부인과 6명의 첩을 거느린 양소유는 쾌남인가 강아지인가? 등등 7세 관람가, 12세 관람가를 19금으로 과감하게 등급조정해서 거침없이 이야기를 쏟아낸다. 가족이라는 인간관계 속에서 의무와 채무로 엮여버린 혈육의 모순,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인격조차 무시되고 폭력적인 욕망의 대상이며 그저 소유물일 수밖에 없었던 여성의 삶, 효가 가장 큰 미덕이었던 극단적인 시대의 광기에 대해 실낱하게 비판하고 비웃는다. 우리가 알고 있던 가족에 대한 그 이야기들이 사실은 그렇게 아름답고 정겹고 훈훈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야말로 기이하고 괴상한 이야기였다는 새삼스러운 사실을 남세스럽게 알려주는 책이랄까.

 

 

뭐 그렇다. 그런 얘기다. 그러니 참 재미지다. 원래 칭찬보다는 뒷담화가 더 흥미롭고 미담보다는 자극적인 뉴스가 더욱 이슈가 되는 법이 아니겠나. 이 책은 정말 노골적이고 딱 불량스러울 정도로 시선이 삐딱한데 고것이 매력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책을 읽다보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당신은 모르고 있었어’라고 하는 환청이 사방에서 들리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되는데 그것도 참 재미난 점이다. 앞서 나는 아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마치 그 책을 ‘읽었다고 착각 하는’ 경우 다시없을 쪽팔림을 느낀다고 고백한바 있다. 이 책은 그 쪽팔림을 한없이 자극하는 책이다.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의 알지 못했던 점들을 여기저기 늘어놓는 식이라서 아주 정신없이 얼굴이 벌게진다.(물론 다른 의미로 얼굴이 벌게지기도 했다. 더러 더러.) 나의 어설픈 오만함과 무성의함을 재발견하는 재미도 재미라면 재미이겠다. 그리고 또 이 책의 훌륭한 점은, 저자의 아주 집요하리만치 뚜렷한 문제의식이다. 장화홍련전을 이야기하며 이런 의혹을 제기했던 사람이, 뭐 고전소설을 연구하는 학자들 중에는 있었는지 어쨌는지 알 수 없으나, 있었나 싶다. 상당히 자극적이고 과감한 접근인데, 저자의 말대로라면 장화홍련전은 19금 딱지를 박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또한 이야기 속에서는 조연으로 초반에 잠깐 등장하고 마는 춘섬의 입장을 주목해 본 부분도 흥미로웠다. 홍길동전은 적서차별에 대한 문제의식은 있으면서 축첩의 폐단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고 있는데 이건 전혀 생각지 못했던 부분이라 무릎을 탁 쳤다. 이 밖에도 내가 고전소설을 ‘남성의 시각’으로 읽고(혹은 알고) 있었구나 깨닫게 한 기가 막힌 부분들이 많다. 이런 부분이 참 괜찮더라.

 

 

조금 아쉬운 부분이라면 ‘~것이다’가 너무 남발된다는 점이다. 저자는 역사학자가 아니고 국문학을 전공하고 고전소설을 연구한 분이기 때문에 한계가 보이기는 한다. 이렇게 고전소설의 행간을 읽는 작업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은 한다. 하지만 그 전개가 대게가 ‘~일 것이다’ ‘~이지 않을까’ 식으로 진행된다는 점은 확실히 아쉬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이 글들은 당시 시대상을 연구하고, 그 당시 여성의 지위가 어떻고, 처첩간의 갈등이 실제로는 어땠고, 사료에 따르면 실제로 어떻고 하며 학술적으로 쓰인 글은 아니다. 새삼 몰랐던 이야기의 실체에 대해 폭로하며 뜻밖의 지적인 호기심을 충족해 주고 있는 글이기는 하다만 연구서는 아니란 소리다. 그러므로 그렇게 학술적일 이유도 없다. 하지만, 고전소설의 행간을 읽는 과정에서 저자가 추측한 여러 이야기들의 근거는 어느 정도 제시되어야 하지 않나 라는 생각이다. 적절한 근거 없이 ‘이 부분은 조금 이상하지 않나?’ ‘당시는 축첩이 일반적이었으니 이렇지 않았을까?’하는 식이라면 아무래도 부족하다. 독자로서 저자의 글에 반발심이 생기는 부분도 있을 것이고.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느냐고 한다면 저자의 문체가 뭐랄까, 좀 강하다. 직설적이고 노골적이고 조금 비아냥거리는 듯 하기도 하고 따지는 듯 하기도 하고 여하튼 좀 열정적이다. 문체가 강하다 보니 그만큼 이런 부분들이 도드라져 보이더라.

 

 

뭐 재미도 있고, 훌륭하기도 하고, 어떤 부분은 좀 억지가 아닌가 싶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이렇게도 생각해 볼 수 있구나, 이런 부분도 있었구나 새록새록 발견하는 맛이 있어 존경스럽기도 하고 그렇다. 빠져들어 읽다보면 반쯤 흥분한 상태가 되어버리지만 오랜만에 재미나게 읽은 책이다. 가족에 대한 이상과 환상을 깨버리는 것은 물론이고 고전소설에 대한 보이지 않는 금줄까지 끊어놓은 유쾌한 책이었다.

 

 

 

덧, 책 디자인 정말 이쁘게 나왔다. <청춘의 독서>이후 참 오랜만이다. 내지랑 본문까지 일러스트 화려하게 들어간 책..으~ 화려할 수록 책값은 올라가겠지만 뭐..이쁜건 어쩔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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