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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의 여인
나쓰키 시즈코 지음, 추지나 옮김 / 손안의책 / 2012년 4월
평점 :
폭풍우 치는 밤, 프랑스 바르비종의 샤토 샹탈에서 마음속 깊숙이 살의를 품은 두 남녀가 조우한다. 정전된 가게 안에서 마음속의 어둠을 털어놓은 두 남녀는 서로에게 강한 동지애를 느끼고 자연스럽게 황홀한 시간을 보내게 된다. 운명과도 같은 만남을 잊지 못한 채 귀국한 남자는 여자를 생각하며 우울한 나날을 보낸다. 그러던 중 남자에게 의문의 편지가 날아들기 시작하고, 남자가 증오해 마지않던 교수가 독살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의문의 편지 덕택으로 견고한 알리바이를 갖게 된 남자는 교수 독살사건의 용의선상에서 제외되고, 남자는 비로소 의문의 편지를 보낸 주인공과 교수를 독살한 범인이 폭풍우 치던 밤 만나게 된 운명과도 같은 그녀였다는 것을 직감하게 된다. 그런 남자에게 날아든 엽서 한 장에 남자는 여자의 의도를 파악하고 혼란스러워 한다. 여자는 그녀가 그러했듯이 남자에게 여자가 살의를 품고 있는 자를 처단해 줄 것을 부탁하고 있는 것이다.
대체 인간은 그렇게까지 자신 이외의 인간을 믿을 수 있는 존재일까? 서로 한번 입 밖에 내 버리고부터 계획이 끝날 때까지의 과정 속에서 그들 마음속에는 아마 예상하기 어려운 갖가지 반응과 갈등이 생길 게 틀림없었다. 제아무리 강한 신뢰의 끝으로 묶여 있다 해도 말이다. - 254쪽
그날 밤 서로에게 살인을 부탁한 일은 없었다. 다만 비슷한 마음을 품고 있는 이들 간에 위험하도록 달콤한 위로가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여자가 먼저 행동에 나섰다. 여자의 의도를 알아챈 남자는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다. 무엇보다도 남자는 여자를 누구보다도 이해하고 있고 진실로 사랑하고 있다고 느낀다. 교환살인을 모의한 것은 아니지만 남자도 결단을 내릴 시점인 것이다.

사랑의 인식이란 어떻게 증명되는 것일까?
『제3의 여인』은 짧은 만남으로 서로에게 굳건한 믿음을 갖게 된 남녀의 이야기이다. 그 ‘믿음’의 실체는 ‘사랑’이었노라고 그려지고 있는데 재미있는 것은 두 남녀가 서로의 얼굴을 모른다는 설정이다. 한 번의 만남 이후로 베일에 가려진 여인의 흔적을 뒤쫓으며 낯모르는 이를 살해할 궁리를 하는 다이고의 심리가 세세하게 묘사된다. 다이고에게는 그 이를 살해할 동기가 전혀 없지만 남자의 의지는 운명적인 그녀 ‘후미코’의 흔적을 추적해 나갈수록 더욱 굳건해 진다. 누군가에 대한 깊은 증오와 살의를 품고 있다는 비밀을 공유하고 있다는 동질감 때문인지, 아니면 지긋지긋한 고민덩어리를 한방에 해결해 준 상대에 대한 고마움 때문인지 어쩐지. 다이고의 행동이 ‘사랑’이라는 단어만으로는 쉽게 이해가 가지는 않지만 모르는 이를 살해하기까지의 긴장감 넘치는 과정과 철저히 자신을 숨기고 있는 ‘후미코’의 정체를 추적하는 과정이 흥미진진하게 그려진다.
하지만 사랑은 대체 뭘까요. 얼마만큼의 이해를 근거한 정서일까요? ………아뇨, 물론 상대를 거의 모른 채 사랑에 빠지는 일은 얼마든지 있어요. 캄캄한 어둠 속에서 서로의 모습도 알지 못한 채 사랑을 나누는 것 또한 그리 큰 기적이라 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런 때에도 인간은 자신의 직감이 상대의 보이지 않는 부분이나 말할 수 없는 내면을 재빠르게 통찰하고 인식하고서 사랑을 품었다 착각하는 존재가 아닌가요? - 298쪽
이야기는 다이고가 어째서 낯모르는 이를 살해하기로 마음먹었는지, 그 일을 어떻게 실행하는지, 얼굴도 모르지만 사랑하는 ‘후미코’를 보호하면서 살인을 완성시키고자 고군분투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지만 사실 가장 큰 미스터리는 ‘후미코’라는 여인이다. 후미코는 어둠속에서 다이고를 매료시킨 마성의 여인으로 평범한 가장이자 촉망받는 조교수인 다이고를 끝내는 살인까지 저지르게 만든 인물이다. 그녀는 그녀가 증오하는 사람을 살해하고자 먼저 살인을 저지르는 대담함을 보였다. 그녀는 다이고가 품은 살의의 이유를 알고 있었고 또한 공감하고 있었지만, 다이고는 그녀가 살의를 품는 이유조차도 알지 못했다. 그런 다이고를 알게 모르게 조종한 여자, 치밀하게 움직이며 다이고에게 메시지를 보내지만 끝내 본인의 모습은 감추는 여자. 그녀의 의도와 정체를 추리해 나가는 과정이 또 색다른 재미였다.
더불어 전혀 다른 두 곳에서 벌어진, 용의자를 특정할 수 없는 두 건의 살인사건이 해결되는 과정도 재미있는데, 조금은 우연적인 요소들이 섞여들어 가지만(아무래도 교환살인이라는 소재는 너무 현실감이 떨어져서 일까?) 역시 추리소설 작가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느꼈다. 사실 줄거리로 공개된 정보들이 꽤 많아서 초반에는 조금 지루한데(대략 100페이지쯤?) 형사들이 수사를 시작하고 점차 용의자를 추리고 두 사람의 흔적이 발견되기 시작하고 하니 정말 정신없이 읽히더라. 다이고의 시점과 전지적 시점이 교차하면서 후반부는 드라마틱하게 전개되는데 읽을수록 더욱 빠져드는 이야기 였다. 막판에는 결정적인 반전도 숨어있는 꽤 괜찮은 책.(별 한 개 빼는 것은 내가 반전을 중반부에 알아버렸기 때문이다..아아..) 교환살인을 소재로 하고 있지만 참 우아하고 로맨틱한 이야기다. 읽어본 사람은 알 듯.
쓸데없는 중얼거림을 덧붙이자면 다이고가 나는 참 슬프다. 사랑에 대해서 누구나 한번쯤은 오만했었던 기억이 있다면 다이고를 동정하는 마음이 이해가 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