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더보이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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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왕 초능력 같은 것을 얻게 될 거였다면 올림픽 복권 1등 번호를 미리 알아낼 수 있는 예지력 같은 것이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혼자된 아이가 외로워서 누군가 보고 싶어 질 때 언제든 볼 수 있도록 천리안 같은 능력이었어도 괜찮았겠지. 스스로를 지킬 수 있게 염동력 같은 것을 얻었어도 좋았겠다. 아무리 생각해도 텔레파시 능력이 제일 구리단 말이다. 말 많고 시끄러운 세상인데 입 밖에 내지 않는 소리까지 들어야 한다면, 안 그래도 괴로워진 인생인데 누군가의 고통과 외로움에 감응해야 한다면 그건 정말 고역이지 않을까. 하지만 그럼에도…….

 

특별해지는 게 필요해. 우리는 중요해져야만 해. 원더보이가 되기를 바라고 또 바라야지. 매순간 삶이 놀라움으로 가득 차기를. 네가 원더보이인 한은 누구도 네 안의 놀라움을 짓밟거나 파괴할 수 없어. - 87쪽

 

 

그 아이는 어떻게 원더보이가 되었나?

 

과일 행상을 하는 술주정뱅이 아빠는 아들 정훈과 소원을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했다. 규칙은 절대 이루어질 수 없을 것 같은 일들을 말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절대 이루어질 것 같지 않은 일들을 말하면서도 아빠는 무한한 우주 어디선가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은 모든 경우의 수가 이루어지는 양자역학 세계의 경이로운 기적을 동경했다. 아들은 아빠 몰래 엄마 아빠와 함께 돌고래 쇼를 보러 가는 소원을 품었다. 그것은 이루어 질 수 없는 일이었으므로. 이루어 질 수 없는 아들의 소원은 아빠의 죽음으로 정말 절대 이루어 질 수 없는 소원으로 남게 되었다. 아빠는 남파공작원을 때려잡은 자랑스러운 애국지사로 포장되고 죽지 못하고 살아난 정훈은 온 국민의 염원으로 살아난 기적의 원더보이가 되었다.

 

어째서인지 아빠를 잃은 그날 밤 환하게 쏟아지는 빛의 무리를 경험한 뒤로 텔레파시 능력을 갖게 된 정훈은 재능개발이라는 그럴싸한 목적아래에 죄 같지 않은 죄목으로 잡혀 들어오는 사람들의 취조장면을 매일같이 지켜보게 된다. 그들의 마음을 읽으며, 감정에 동화되며 알지 못했던 고통과 말할 수 없는 절망과 고문 같은 희망, 깊은 상실감과 체념으로 이어지는 어두운 마음의 그늘을 보게 된 이후 정훈은 권대령에게서 도망쳐 나온다. 병원에 있을 적 만났던 세상에서 FB를 제일 잘 던진다는 선재 형과 재회하고, 죽은 약혼자의 환영에 시달리는 강토 형과, 도통한 듯 은둔거사처럼 살고 있지만 가족을 그리워하고 삶을 후회하는 무공아저씨와 해직기자 재진아저씨를 만나게 된다. 불의에 저항하고, 그러다 누군가를 부당하게 잃고 상처를 품고 사는 사람들과 부대끼며 정훈은 초능력 따위를 빌리지 않고도 누군가의 마음의 그늘을 이해할 수 있게 되고 비로소 본인에게 향하는지 타인에게 향하는지 알 수 없는 위로를 건네게 된다.

 

 

과연 이 고통이 사람들에게 보여질 수 있을까요?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의 마음과 시대의 우울과 너무나도 이상한 권력의 모순은 열다섯 살짜리 어린 아이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 아이에게는 사람의 마음을 읽는 능력이 생겨버렸다. 아빠마저 잃은 천애고아인데다가 하루아침에 평범했던 모든 행복이 사라지고 본의 아니게 반공애국신파극의 주인공이 된 열다섯 살 정훈이 하필 사람의 마음을 읽고 동감하는 능력을 얻게 된 것은 우연이었을까? 어쩌면 그것은 필연이 아니었나. 1980년대는 한국은 너무도 외로운 곳이었다. 타인의 고통을 공감하는 것 자체가 탄압 대상이고 이적행위였던 시절 아프고 고독했던 사람들에게는 위로가 필요했다. 누군가는 외면되고 무시되는 이들의 마음을, 고통을, 외로움을 알아주었어야 했던 것이다. 알아주기라도 했어야 했던 것이다.

 

행복은 이토록 훤히 드러나는데, 고통은 꼭꼭 감춰져 있어요. 때리고, 부수고, 가두고, 불태우는 이유가 거기에 있죠. 어둠 속에 밀어넣고 감추기만 하면 되니까. 지금 우리는 차갑게 식어가는 캄캄한 밤 안에 있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보이지 않으면 우리는 없다고 생각하죠. 그러니 그들의 고통도 이 세상에 없는 거예요. 신부님, 과연 이 고통이 사람들에게 보여질 수 있을까요? - 286쪽

 

보여주지 않으려는 사람들과 보이지 않으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보여지지 않는 고통을 가진 사람들이 그들의 아픔을 내보인다는 것은, 그렇게 부당함을 알리고 억울한 죽음을 애도 받는 일은 어쩌면 당시에는 일어날 수 없는 일,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정훈과 아빠가 절대로 이뤄질 수 없는 소원을 주고받았던 것처럼 그것 또한 누군가의 소원에 지나지 않았을 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정훈은 이루질 수 없는 소원도 계속 바라고 바라서 다른 우주에서라도 그 기적이 이뤄지기를 바라는 아이였다. 쌍둥이에게 부정당해도 그 놀라운 어떤 가능성을 쫓아 끊임없이 기적을 소원하고 그 소원을 간직할 줄 아는 소년의 마음은 놀랍도록 희망적이었고 그래서 조금 더 특별했던 것이다.

 

특별했던 아이는 그렇게 원더보이가 됐고, 곁에 있는 사람들과 스스로에게 작은 기적을 만들어 냈다. 소년은 그렇게 어른이 되었고 아픈 이별을 한 사람은 마침내 안식을 얻었다.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소원으로 남았던 돌고래 쇼 관람도 끝내 이루어졌고, 1987년 억압받았던 사람들의 소원에 지나지 않았을 일도 실현되었다. 저기 먼 우주에 또 다른 지구에서가 아니라 바로 이곳, 너무도 고독한 사람들의 이상한 이곳에서.

 

기적을 바랐던 사람들에게 기적이 일어나고, 위로를 바랐던 사람들에게 진실한 위로가 전해지고, 마치 모든 것이 그렇게 흘러가게 되어 있었던 것처럼 마땅히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다는 듯이 그렇게 모든 것이 순리대로 흐른다는 듯이. 아팠던 지난 날들이 지독한 성장통이었음을, 어느 시절, 어떤 순간에도 누군가는 어떤 가능성을 믿고 기적을 소원한다는 희망을 전하는 정말 기적같은 이야기였다. 기적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일어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반드시 일어날 수 밖에 없는 기적을 소원하는 원더보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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