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일곱, 364일 블랙 로맨스 클럽
제시카 워먼 지음, 신혜연 옮김 / 황금가지 / 2011년 11월
평점 :
절판


그날 밤, 내가 죽었다.

 

조용한 마을 노앙의 해안가 선착장에서 물에 빠진 시체가 발견된다. 시신은 지난밤 18번째 생일을 맞아 친구들과 보트에서 생일파티를 벌였던 금발의 소녀 엘리자베스 밸처였다. 보트에는 파티의 잔상인지 술과 마리화나로 잔뜩 어질러져 있었다. 그녀의 생일을 축하해 주기 위해 모였던 친구들은 지난밤의 비극은 알지도 못한 채 술과 마약에 취해 널브러져 있었다. 그녀의 죽음을 목격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어째서 18번째 생일날 그렇게 무참하게 죽어버린 것일까? 정황상 사고사로 볼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간단히 결론을 내리기엔 뭔가 석연치 않다. 소녀의 죽음에는 분명 무언가가 있다.

 

자살일까? 금발의 미소녀는 부유한 집안과 멋진 남자친구, 우정이 돈독한 친구들에 주변 사람들의 관심과 동경까지 그 나이 때에 누릴 수 있는 모든 호사를 누리는 아이였다. 자살이라기엔 동기가 부족하다. 그렇다면 타살일까? 그날 밤 그녀와 함께한 이들은 모두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그녀를 생의 유일한 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멋진 남자친구 리치, 어릴 적부터 최고의 친구였고 지금은 사랑하는 가족이 된 의자매 조시, 마찬가지로 어릴 적부터 붙어 다녔던 절친이자 좋은 사람인 캐롤라인, 닭살 스러운 커플이지만 항상 어울려 다녔던 메라와 토퍼. 그들 가운데 누구에게도 동기가 없었다. 그렇다고 이들 외의 누군가가 늦은 밤 개인 소유의 보트에 침입해서 살인을 벌였다고도 생각할 수 없다. 그렇다면 과연, 그날 밤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보트 살인사건? 이것은 추리소설 입니까?

 

줄거리를 요약하고 보니 영락없는 추리소설이다. 소녀가 죽었다. 사고사로 보기도, 자살로 보기도, 타살로 보기도 애매하다. 이 이야기는 결국 그 화려한 인생을 살았던 소녀가 왜 그렇게 홀로 아무도 모르게 죽어갔는지에 대해 추적해 가는 이야기다. 소녀조차 자신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소녀의 과거 회상을 쫓아가며 그날 밤 죽음의 진실을 추리해 내야 한다. 하지만, 홈즈나 왓슨 같은 재기 넘치는 탐정은 등장하지 않는다. 죽음을 추적하는 것은 소녀 자신이고 그녀의 조언자격은 투덜이 소년이 한명 따라 다닐 뿐이다. 그렇다. 이것은 추리소설이 아니다. 그렇다고 미스터리 소설도 아니다. 영혼이 등장하지만 호러 소설도 아니다. 예쁜 여자주인공이 등장하고 잘생긴데다가 순정파인 남자주인공이 등장하는 로맨스 소설인 것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시작부터 어긋나 있다. 일단 로맨스 소설이라고 하면 마땅히 등장해야 할 요소들이 끼어들 틈이 없다. 애초에 여주인공은 죽어버렸고, 그녀의 절절한 로맨스 상대는 죽어버린 그녀를 그리워하며 건장하게 살아있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영혼인 그녀가 기억하는 그녀의 인생은 상당히 단편적인 데다가 기억의 공백이 많아서 살아 있던 동안의 사랑의 기억을 반추할 거리조차도 부족하다. 그녀가 되짚어 보는 그녀의 인생이란 사랑에 가득 차 있다기 보다는 의심과 왠지 모를 불안한 분위기가 감도는 것이어서 도저히 핑크빛의 무언가는 찾아 볼 수가 없다. 모든 이야기는 결국 로맨스로 흐르게 돼 있다는데 이 이야기는 로맨스 소설이라고 말하고 있으면서도 뭔가 뜨듯 미지근한 느낌이다. 사랑을 이야기하기에는 미스터리가 너무도 많다.

 

그런데 오히려 그런 것들이 흥미로운 것이다. 속이 간질간질한 뻔뻔한 애정묘사는 없다. 다만 몇 가지 의문들이 길게 꼬리를 늘이고 이어질 뿐이다. 그녀는 어째서 죽어서도 이승을 떠나지 못하고 헤매는 것인가. 어째서 육신을 떠나 자유로운데다가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영혼의 상태인데도 정작 죽음의 순간은 기억해내지 못하는가. 시종일관 그녀와 투닥거리는 의문의 소년 알렉스에 대해서도 그렇다. 그는 그녀보다 1년 전에 죽은 동급생이었다. 그의 생에 그녀와의 접점은 거의 없었다. 그런 그가 어째서 그녀의 곁을 지켜주는 것일까? 이런 의문들이 계속 이어지면서 정말이지 다음 장이 궁금해지는 것이다. 이 모든 의문들은 그녀가 사라진 이후에 남은 사람들의 모습에서, 미처 알지 못하고 흘려보냈던 과거의 단편들에서 조그만 퍼즐같이 떨어지는 단서들이 감질나게 모아지며 극적으로 해소된다. 그 과정을 따라가며 다양한 가능성을 추리하는 뜻밖의 재미를 안겨주더라.

 

일단 이것은 로맨스 소설입니다.

 

죽음 이후에 생전의 기억들에 공백이 생겨버렸고, 영혼이 된 나는 원하기만 하면 생의 어느 지점으로 거슬러 올라가 당시의 일을 엿볼 수 있다. 기억하지 못하는 아기 때의 기억을 들여다보는 것도 가능하다. 철저히 제 3자의 입장이 되어 나의 일생을 되돌아 볼 수 있는 것이다. 관찰자인 나는 지난날의 과오를 반성할 수도 있고, 어떤 깨달음을 얻을 수도 있다. 리즈(엘리자베스 밸처)는 영혼이 되어 전혀 몰랐던 자신을 만나고, 알지 못했던 진실들을 마주하고 사랑을 그리워하고 또 떠나보내게 된다. 그 과정이 마치 사건을 해결해야 하는 탐정에게 하나하나의 소소한 단서가 주워지는 것처럼 구성되어서 이게 추리소설인지 로맨스 소설인지 헷갈릴 정도다.

 

하지만 이것은 어쨌든 로맨스 소설이라는 점이다. 소녀가 본인에게 향했던 진실하고 순수한 사랑을 사후에 알게 된다는 점은 조금 비극이지만, 그런 비극도 훈훈하게 느껴질 만한 애절한 이야기이다. 한편으로는 소녀가 자신을 이해하고 과거를 반성하는 과정에서 좀 더 자신을 사랑하게 되는 성장 소설 같기도 하다. 결국은 사랑이다. 추리소설적인 요소들이 분명 있지만 추리소설은 아니라는 점이다. 치밀하고 정교한 무언가를 바라는 사람에게는 조금 모자랄 듯도 싶다. 나름 반전까지 갖추고 있지만 조금 투박한 느낌이다. 하지만 어리고 상처 많은 소녀가 잊고 있었던, 또는 미처 깨닫지 못한 자신으로 향했던(계속 자신을 향할) 사랑을 알게 되는 과정이 주가 되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뭐 그런 점은 별로 상관없을지도 모르겠다. 읽는 사람이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의 문제겠지만, 로맨스 소설로는 꽤 독특하고 수준급의 몰입도를 자랑하는 이야기이다. 예상할 수 있는 결말의 추리물이었다는 점은 다소 아쉽지만, 예상을 뒤엎는 로맨스 소설이었다는 점에서는 후한 점수를 주고 싶다. 어쨌거나 재미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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