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싫은 소설
교고쿠 나쓰히코 지음, 김소연 옮김 / 손안의책 / 2011년 11월
평점 :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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싫은 소설 ―
묘한 제목이었다.
일부러 소설이라고 내걸고 있으니 소설일 테지만, 이런 제목을 좋아서 붙이는 사람이 있을까. 순문학인 것 같지도 않다. 그러나 엔터테인먼트에서 이런 프레젠테이션은 어떨까. 제목은 그렇다 치더라도 모든 것이 싫은 느낌이었다. 그런 의미로는 제목에 맞는 장정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 용케 출판사가 승낙해 주었다고 나는 생각했다. (p. 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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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 같은 비오는 겨울날이 싫습니다. 짜장면 위에 고명으로 얹어진 오이도 싫고, 일요일 이른 아침의 약속도 싫고, 밤바다도 싫고, 뱃대지가 빵빵해져서는 거미줄에 간신히 매달려 뒤뚱거리는 거미도 싫어요. 허리가 끊어지고 밑이 빠질 것 같은 달거리통도 싫고, 손톱 가에 이는 손 가시도 싫고, 운동화 밑창에 굴러다니는 모래알도 싫습니다. 누군가에게 빌려준 책이 정체모를 얼룩을 달고 되돌아 왔을 때, 남의 얘기는 듣지도 않고 자기 얘기만 하는 사람과 오랜 시간 붙어있어야 할 때, 날은 추운데 버스가 연착될 때, 식당 밑반찬에서 머리카락이 나왔을 때 ― 정말, 싫은 것을 얘기하자니 한도 끝도 없네요. 네, 다 싫습니다. 정말 싫어 죽겠어요. 단지 귀찮을 뿐이기도 하고, 혐오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무섭기 때문이기도 하고, 성가시기 때문이기도 하죠. 그저 싫은 것도 있어요. 나는 그런 것들을 ‘싫다’ 라고 이야기 합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어쩔 수 없는 것들이죠. 아주 일상적인 일이기도 하고요. 의식하지 않으면 ‘그랬었나?’하고 그냥 넘겨버릴 수도 있는 문제들이지만 싫은 것들은 비상하게 내 의식을 파고듭니다. 손가락 끝에 살에 박혀든 가시처럼 계속, 내내 신경이 쓰이는 거죠. 뭐, 신경 쓰지 말아야지, 잊어버리자 하면 금세 잊혀지기도 합니다만 그런 건 아무래도 ‘싫은 느낌’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신경 쓰지 않으려고 애를 써 봐도 그 ‘싫은 일’이 계속 된다면 상당히 골치 아프겠죠? 매일이 싸늘하고 비가 추적거리는 날씨에, 허리가 끊어지고 밑이 빠질 것 같은 고통을 일 년 내내 달고 살아야 하고 눈에 띄는 사방에는 뒤뚱거리는 왕거미들이 득실거리고 운동화를 신을 때 마다 모래를 밟아야 한다면 저는 정말 미쳐버릴 지도 모릅니다. 그런 일이 계속 된다니. 아 ― 정말 싫을 것 같아요.
괴이를 사랑하는 작가가 그리는 음울한 괴작
이 책이 딱 그런 이야기입니다. 싫어서 견딜 수가 없는 일들이 지독하게도 반복되는 그런 괴이를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 이지요. 그 ‘싫은’ 일들은 어떠한 전조도 없이 불쑥 그들의 일상에 나타나 지독하고 징그럽게 평범했던 일상을 헤집어 놓습니다. ‘싫은’ 일들이 일상을 좀먹는 동안에도 뜻밖에 황당한 재앙을 당한 사람들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 ‘싫은’일들이라는 것이 너무도 기괴하고 말도 안 되는 일이기 때문이죠. 도저히 설명이 불가능 하거든요. 남에게 도움을 구할 수도 없고, 싫은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떠한 제스처도 취할 수가 없어요. 애초에 그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전혀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유산으로 아이를 잃고 위태로운 부부생활을 이어오던 가정에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머리가 크고 기괴한 아이는 그저 어디선가 불숙 나타났다가 사라질 뿐이죠. 갑자기 나타나는 끔찍한 외모의 아이 때문에 신경쇠약증에 걸릴 지경이지만 유령도, 외계인도 그렇다고 인간도 아닌 아이를 내쫓을 방법이 없습니다.[싫은 아이] 돌봐주고 있는 그 노인은 기괴한 냄새를 풍깁니다. 불쾌한 남세죠. 노망이 든 것도 아니건만 노인의 기행은 날이 갈수록 정도를 더해가고 노인을 돌보는 ‘나’는 신변의 위협까지 느낍니다. 나의 조부모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남편의 조부모도 아니죠. 그렇다면 과연, 노인은 대체 누구인 걸까요?[싫은 노인] 모든 것을 잃은 ‘나’는 더 이상 불행해 질 수 없겠다고 느낄 정도로 불행합니다. 노숙자로 전락한 나는 ‘하룻밤만 묵으면 행복해 질 수 있는 호텔’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나는 우연히 그 호텔에서 숙박할 수 있는 티켓을 얻게 되고, 찾아간 호텔에서 행복해 질 수 있는 경악스러운 방법을 듣게 됩니다. 왠지 ‘싫은 문’ 앞에 선 나. 행복해 질 수 있을까요. 나는. [싫은 문] 싫은 후배에게 불단을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은 ‘나’는 불단을 맡은 이후로 계속 싫은 기분을 느낍니다. 기괴한 냄새가 나는 그 불단은 과연 뭘까요? 그건 뭐였을 까요?[싫은 조상] 우연히 사귀게 된 그녀는 생김세도 귀엽고 똑똑하고 요리도 잘하는 최고의 여차진구입니다. 하지만 ‘나’는 그녀와 헤어질 것입니다. 아니 헤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그럴 수가 없습니다.[싫은 여자친구] 퇴직 후 마누라도 죽고 오랫동안 산 집에 홀로 남겨진 ‘나’는 이 집이 너무도 싫습니다. 아니, 이 집에서 일어나고 있는 개인적이고 기괴한 일들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저 싫은 일들일 뿐입니다. 견디거나 무시하거나 하면 결국 별 것도 아닌 일들이지요. 이대로, 나는 괜찮을 까요?[싫은 집] 최근 ‘나’의 주변사람들은 내게 이상한 상담을 해오더니 결국 모두 불행해 졌습니다. 착란을 일으키거나 실종되거나 자살했거나 죽어버렸죠. 그들이 상담해 온 너무도 이상한 ‘싫은 일’들이 마음에 걸립니다. 나는 지금 내가 가장 싫어하는 상사와 출장을 가고 있습니다. 이 순간이 미치도록 싫습니다. 얼마 전 헌 책방에서 구입한 ‘싫은 소설’을 읽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소설 너무도 이상합니다. 최근 불행해진 그들의 기묘한 이야기가 이 책에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책의 마지막 이야기 ‘싫은 소설’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나.[싫은 소설]
싫어서 싫어서 싫어서 싫어서 싫어서 싫어서 싫어서 견딜 수가 없게 되고 말았던 것이다. (p. 259)
그들은 결국 견딜 수 없어졌어요. 그래서 아주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죠. 아~ 정말로, 정말이지 싫은 소설입니다.
“이 세상에 이상한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다네, 세키구치군” 정말 당신이 그 교고쿠도 시리즈의 교고쿠 나츠히코가 맞긴 한거야?
나는 교고쿠 나츠히코의 팬입니다. 왕팬! 을 자처할 정도는 아니지만, 교고쿠 나츠히코의 출세작이기도 한 『우부메의 여름』을 읽고 일본 미스터리 소설에 빠져들게 된 이후로 그의 작품이라면 앞뒤 안 재고 사들이고 읽었어요. 국내에 소개된 그의 작품들은 대.부.분 읽었거나 소장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의 이야기가 좋습니다. 아주 기괴한 사건을 사실은 별 것 아닌 일로 만들어 버리는 재주가 있거든요, 그 사람. 20개월이나 출산을 하지 못하고 있는 여자의 이야기 라든지, 상자에 곱게 담겨 버려지는 토막 난 시체에 대해서라든지 흉측하고 기이한 사건들이 이 사람의 손을 거치고 나면 결국 아무것도 아닌 일이 돼 버려요. ‘이상할 건 아무것도 없다’라는 주의예요. 그게 너무도 박식하고 논리적이어서 읽는 사람의 혼을 아주 쏙 빼놓죠. 나는 이 작가의 그런 지적이고 논리적인 면이 너무도 좋았습니다.
나는 아마도 또 그런 이야기를 기대하고 있었는지도 몰라요. 그래서 이 책을 집어 들고, 첫 번째 이야기를 읽어내고는 조금 어리둥절해 졌죠. 생각지도 못한 부분을 세세하게 물고 늘어져서 설명하고, 가르치려는 것 같은 문체라든가 기괴한 분위기라든가 어딜 봐도 그의 소설인데 이 이야기는 너무도 낯설었다는 것이죠.
“당신은 늘 설명이야. 뭐든지 다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세상은 그렇게 합리적인 것만은 아니잖아. 그런 건 설명할 수 없어도 상관없지 않아?” (p. 26)
‘이 세상에 이상한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네, 세키구치 군’ 이라고 외치던 교고쿠도는 사라지고 ‘이 세상은 그렇게 합리적이지 않아, 설명할 수 없어도 상관없지 않아?’라고 외치는 낯선 이가 이 책에 있더라고요. 이 책에 주인공들이 미신을 맹신하거나 오컬트 마니아라던가 그런 건 아닙니다. 그들은 지극히 상식적인 생각을 하고 상식적으로 행동하려고 노력하죠. 그들을 미쳐 날뛰게 만드는 건 그들의 상식을 벗어나는 이 세상의 이상한 일입니다. 뭔가 일일이 설명하려는 작가가 이 책에는 거의 뒷짐만 지고 있어서 좀 어리둥절해 지기도 하고, 편하게 읽히기도 했어요. 뭐 가끔은 이런 것도 괜찮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었죠. 낯설었달 까, 신선했달 까.
원인도 없고, 이유도 없고, 당장 어떻게 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사회적으로 심각한 일도 아니고요, 지극히 개인적이고 혼자만 피해를 입는 그런 싫은 일들이 벌어집니다. 당장 어찌할 수도 없고, 어떻게 할 방법도 없는 일들을 그저 받아들이고 견디고 무시하려고 했던 사람들이 맞는 최후는 꽤나 참혹하죠. 말 그대로 싫은 소설입니다. 소설의 주인공처럼 ‘싫다―’라는 말이 절로 흘러나오죠. 뭐, 유쾌하진 않습니다. 분명 재미는 있지만 상당히 찝찝한 뒷맛이 남는 재미고요. 하지만 교고쿠 나츠히코의 팬임을 자처하는 사람이라면 읽어볼 만하겠습니다. 아니, 꼭 읽어보세요. 첫 번째 이야기를 견딜 수 있으면 아마 괜찮으실 겁니다. 다만, 교고쿠 나츠히코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집어 드는 건 좀 참아주세요. 이 작가가 정말 싫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 정도로 정말, 싫은,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