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호형사
쓰쓰이 야스타카 지음, 최고은 옮김 / 검은숲 / 2011년 10월
평점 :
절판


   
  여기서 느닷없이 가마쿠라 경부는 회전의자를 홱 돌려 독자들 쪽을 향해 말했다. “자, 독자 여러 번, 여기서 인사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이 소설의 전반부도 이제 곧 끝납니다. 현명한 독자 여러분께서는 이 사건의 범행 수법 및 밀실 트릭이 어떤 것인지 이미 알아채셨으리라 믿습니다. 이 작가는 본격 미스터리를 처음 쓰는 풋내기라 …….                                                                       - <부호형사> 115쪽  
   

이쯤 되면 거의 막장이다. 아니, 이미 막장인가? 저자의 뻔뻔스러움은 정말 상상을 초월한다. 느닷없이 이야기 속에 등장해서 독자들에게 말을 거는 것은 사실 낯간지러운 애교수준에 불과하다. 한참 이야기에 몰입중인 독자는 아랑곳 않고 예고도 없이 갑자기 끼어들어 “그만두겠습니다. 이렇게 쓰니 재미가 없네요” 라고 말하며, 자기가 재미없다고 이야기 전개를 싹둑 잘라버린다. 주변 인물에 대해 설명하는구나 하면 “이번 편과는 관계가 없으니 생략하도록 하겠다” 라고 하며 미련 없이 이야기를 접어버린다. 이건 뭘까? 마치 재채기가 나오려다 쏙 들어가 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렇게 독자를 들었다 놨다 던졌다 메쳤다 하는 저자는 참 오랜만인 듯하다. 이런 식으로 휘둘렸던 적은 없었던 거 같아서 정말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런데 우습다. 신기하게 이런 막장 전개에 웃음이 난다. 그리고 이 책을 다 읽고 덮을 때쯤 문득 깨닫게 된다. ‘아, 이것이 이 작가의 개그코드 구나!’

본인은 미스터리나 추리물에 개그코드가 가미된 이야기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이런 이야기들은 대게 반인륜범죄를 소재로 한다. 납치, 방화는 우습고 사람을 잔인하게 살인하는가 하면 그것도 모자라 시체를 훼손하기 까지 하는 이야기가 흔하다. 이런 심각한 범죄를 다루는 이야기는 우스워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아니, 정확히는 그런 이야기들은 엄숙하고 진지하게 표현되는 것이 위화감이 적다. 물론 작가의 상상력은 용인될 수 있지만 작가는 이야기에 독자가 받아들일 수 있는 정도의 현실감을 부여해 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책은 설정, 분위기, 전개 등 모든 면에서 이런 내 생각에는 어떠한 장단도 맞춰주지 않는다. 그저 그런 책 같았으면 나는 이 책을 읽다가 집어 던져버렸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 읽었다. 그것도 읽는 내내 큭큭 대면서 말이다.

작가는 뻔뻔하고, 개그는 시시껄렁하지만 이 책은 묘한 매력이 있다. 일단 이 책은 아버지가 일본 제일의 갑부인 부호형사가 타고난 재력을 십분 활용해 범인을 검거한다는 설정이다. 부호형사가 활약하는 4개의 에피소드에서 소재가 되는 사건들은 다른 추리물에서 다루는 사건들과 유사하다. 부호형사는 여러 명의 강도 용의자 중에 범인을 가려내야 했고, 밀살살인의 트릭을 밝혀내야 했고, 유괴범의 의도를 알아내야 했고, 군중 속에 벌어진 살인사건을 해결해야 했다. 재미있는 것은 어느 추리소설에서 본 듯한 사건들을 어느 추리소설에서도 보지 못한 방법으로 해결해 낸다는 것이다. 키워드는 돈이다. 머리가 엄청나게 좋은 작가의 비범한 발상이 격이 다른 금전감각을 가진 부호형사의 비범한 씀씀이로 전이되어 멋지게 사건을 해결해 낸다.

사건을 풀어나가는 방식이 참신한 것도 있지만, 작가가 각각의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는 방식도 독특하다. 우선, 이 작가는 장면이 바뀌어도 행을 띄우질 않는다. 장면이 전환되지만 계속 이어서 쓰는 것이다. 어디서 장면이 바뀌는지 파악할 수 없기 때문에 처음에는 읽으면서 헷갈리기 까지 한다. 하지만 나중에 가서는 여러 장소에서 각각 일어나는 일을 연속된 문장으로 표현하는데 행을 띄우지 않아 한 장면을 표현하는 것처럼 구성한다. 마치 극의 빠른 전개를 현란한 편집으로 표현한 드라마를 보는 것 같다. 또 다른 에피소드에서는 서사를 시간에 따라, 장소에 따라 쪼개서 나눠놓고 독자에게 어느 순서로 읽으라고 조언을 한다. 이 부분을 페이지 순서대로 읽으면 일종의 서술트릭이 된다. 밴 다인의 ‘미스터리 소설의 금기 12법칙’을 이야기 하면서도 자신은 전문 미스터리 작가가 아니므로 플롯 상 조작은 눈감아 달라나 뭐라나. 또 다른 에피소드에서는 주변 인물에 대해 설명하는 듯 하다가 주의를 슬쩍 돌려놓고 모른 척 하기도 한다. 시종일관 여기저기서 갑자기 튀어나와 딴죽을 걸던 작가는 마지막 마침표를 찍는 그 순간까지도 딴죽 걸기 본능에 충실 한다. 4개의 에피소드에 각각 서술상의 변화를 시도하며 독자의 정신을 쏙 빼놓는 것도 모자라 시니컬한 척 여기저기 개입해서 내면의 개그본능을 마음껏 표출하는 작가의 사족까지 더해지니 범인을 잡고 트릭을 찾아내는 과정의 재미가 더욱 배가 된다. 

SF소설을 쓰던 작가가 2년여 간의 고심 끝에 내 놓은 최초의 미스터리라는 설명이 무색할 정도로 아주 쉽고 편안하게 쓰여진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그러면서도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어 읽는 내내 놀라웠다. 황당무계한 설정이지만 그 안에서도 현실감을 부여하기 위해 고심했던 것 같고, 자유롭게 쓰는 것 같으면서도 장르의 형식을 지키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적절히 잘 섞였고, 재미있게 완성됐다. 이 작가의 저서 가운데 미스터리로 분류되는 작품은 단 3편에 불과하다고 하던데, 이 작가의 다른 미스터리 소설이 궁금해졌다. 작가의 다른 작품을 궁금하게 하는 괜찮은 이야기였다. 더불어 드라마화 되어 많은 인기를 끌었다는 후카다 쿄고의 부호형사도 궁금해졌다. 하지만 드라마 에서는 작가의 글재간을 표현해 낼 수 없을 테니, 감히 짐작하건데 드라마 보다는 소설이 더 재미있을지도 모르겠다. 다만 정말 궁금한 것은, 드라마 에서도 사건이 해결되면 어디선가 숨어있던 서장이 덩실덩실 춤을 추며 나타날까? 그걸 확인해 보기 위해서라도 드라마를 한번 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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