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행관람차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27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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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뭐 프로그램에서 애매한 것을 속 시원하게 정해준다고 하는 남자들이 큰 인기를 얻고 있다.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그 애매한 순간들에 대한 신랄한 일침과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안 지킨다고 경찰이 잡아가진 않지만 지킬 때 우리 사회를 더욱 아름답게 만드는’ 규범을 제시해 준다는 것이 그 팀 개그의 웃음 포인트이다. 그 속시언한 선언들을 듣고 있자면 자못 웃음이 나오지만, 가끔 생각한다. 사실, 우리가 진정 궁금해 하는 ‘애매한 무언가’는 여성의 민낯 기준이나 헤어진 연인들의 숙려기간 따위가 아닐 것이다. 그보다 더 근본적이고 애매하면서 항상 우리의 사회생활에 시시콜콜한 트러블을 일으키는 그 무언가. 단어로 명명하기 조차 애매해 지는 그 무언가인 것이다. 아, 이런 걸 뭐라고 불러야 할까?  

왜 내게 직접적인 상해나 위해를 가하지 않은 사람에게 화를 내게 될까? 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마 이런 생각도 해 보았으리라. 내가 아는 많은 사람들과, 그들과의 관계들 속에서 내가 그 사람들에게 실망해도 되고, 화를 내도되는 범위는 어디까지 일까? 단순하게 말하자면, 오지랖퍼의 바운더리는 어디까지 일까? 이것이야 말로 정말 ‘애매한 문제’가 아닌가? 뭐 그런 시답지 않은 데에 생각의 에너지를 쏟느냐고 핀잔할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거 꽤 심각한 문제다. 요즘은 소셜네트워크란 놈의 발달인지 뭔지 해서 이전에 비해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사람들의 범위가 광범위하게 늘어난 데다가, 넓은 관계는 가능해 졌지만 상대적으로 상대방을 제대로 이해하는 범주의 깊은 인간관계는 줄어들게 된 탓이다. 요즘은 너무 쉽게 사람에게 실망하고 비난하고 증오한다. 깊이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그렇게나 가혹할 수 있나 싶을 정도로 말이다. 마치 요즘 사람들은 엄청나게 길고 많은 보이지 않는 다리를 가진 다지류 생물이 된 것 같다. 그 다리들이 어딘가에 사는 누군가에게 까지 제 멋대로 뻗쳐서 그 사람이 뭔가 실수를 하거나 잘못할 때 마다 찌릿 찌릿 통증을 본체에 까지 전달해 주는 것 같달 까? 정말 기묘한 환지통을 겪고들 있는 것만 같다.

이 책을 읽고 있자니 그런 징그러운 상상이 점점 더 선명해 지는 것 같았다. 물론 그렇게 광범위한 관계 속에서의 이야기는 아니지만, 인물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흉측한 다리들이 다카하시 가족들에게 뻗쳐 있는 것만 같아서 진심으로 섬뜩했다. 정말이지, 속이 울렁거릴 정도로 기분 나빠지는 이야기였다.

그림 같은 그 집에서 존속살인이 벌어졌다.

히바리가오카(일본에 실제 존재하는 열차역. 실제로도 이곳 역시 부자동네라고 한다.)는 언덕위에 조성된 마을로, 고풍스럽고 호화로운 집들이 모여 있는 부자동네이다. 그런데 어느 날, 이곳의 가장 고풍스럽고 서양의 어느 성을 닮은 것 같은 아름다운 집에서 끔찍한 살인사건이 발생한다. 피해자는 이 집의 가장인 의사 남편, 피의자는 그의 부인이었다. 큰 소리 한번 난 적 없는 집에서 일어난 이 급작스럽고 잔혹한 사건으로 인해 조용했던 마을이 떠들썩해 진다. 의대에서 공부하고 있는 듬직한 아들, 명문 여고에 다니고 있는 머리도 좋고 자기주장도 뚜렷한 예쁜 딸, 그리고 아이돌을 닮은 곱상한 외모에 운동이면 운동, 공부면 공부 뭐 하나 빠지는 것이 없는 막내아들, 번듯한 직장에 자상한 아버지와 아름답고 고상한 어머니가 사는 이 집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더군다나 피해자는 아버지고, 피의자는 어머니라니? 

온 동네를 떠들썩하게 만든 히바리가오카 고급주택가 존속살인사건은 사건 당사자인 다카하시 가족과 사건이 일어난 집의 맞은편에 사는 엔도가족, 이 동네의 원년 주민으로서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참견 쟁이 아줌마 고지마 사토코의 시선이 엇갈리며 사건 이전과 사건 이후의 일들이 서술된다. 하루아침에 살인사건 피의자의 자식들이자 피해자 가족이 된 다카하시 남매들의 이야기와 호화 주택가에 기가 눌려 온갖 피해의식에 찌들어 사는 엔도 가족이 완벽한 이상 같았던 앞집의 참사를 목격한 이후의 이야기, 동네 반장 같은 사토코의 입장이 교차되며 지독하게 이기적이고 차가운 사람 내면의 독에 대한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전한다. 어떤 사람이 있어도 되는 자리란 존재하는 것일까? 반대로, 어떤 사람은 있어서는 안 되는 자리란 것이 있는 것일까? 애초에 그 ‘어떤 사람’이라는 것은 누가 정하는 것일까? 제 멋대로 ‘어떤 사람’이길 정해 버리는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차가운 독을 퍼뜨리는 것은 무엇일까?

속물들…….

미나토 가나에가 전작인 [고백]에서 그랬던 것과 같이, 사람을 치졸하고 이기적이며 나약하게 그려내고 있다. 읽다 보면 절로 눈살이 찌푸려지고 골이 당기는 느낌마저 든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 책에서 그려내는 인물들의 심리가 공감이 가기도 한다. 상류층 사회를 대변이라도 하는 것처럼 높은 언덕배기에 모여든 고급 주택가는 묘한 위화감을 준다. 집으로 가기 위해, 혹은 벗어나기 위해 히바리가오카의 언덕길을 오르내리는 인물들이 느끼는 현기증이 종이를 넘어 전해지는 것 같았다. ‘그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라는 말도 안 되는 이상에 맞추기 위해 스스로를 옭아 메고 학대하는 사람들이 미련하고 무식해 보이기보다는 불쌍해 보였다. 누구나 그렇게 하고 있지 않던가? 하지만 그 이상은 정작 누가 정하는 걸까? 남의 속도 모르고 너무 쉽게 판단하고 비난하고, 무슨 엄청난 손해라도 끼쳤다는 듯이 구는 사람들과 나와 연관된 누군가의 잘못이로 인해 비난 받아야 하는 사람들 가운데 진정 잘못된 건 어느 쪽일까?  

이 모든 갈등을 만들어 냈던 것은 어쩌면 저 높은 데서 아름다운 풍경을 독점하고 서 있는 마을 자체가 아닐까. 높은 데 있어서는 그 곳을 밟고 서 있는 사람들 눈마저 잔뜩 높여 놓은 그 마을 말이다. 언젠가 마을 아래 들어선다는 관람차를 기대하는 다카하시 신지의 마음이 어느 정도 이해가 갈 것 같기도 하다. ‘어떤 사람’에게라도 허락되는 공간인데다가, 위도 아래도 없이 공평하게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주며 원만하게 돌아가는 관람차라면 다카하시 신지는 아마 더 이상 현기증을 느끼지 않을 것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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