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편집된 죽음 ㅣ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8
장-자크 피슈테르 지음, 최경란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6월
평점 :
마치 <킬빌>에서의 ‘더 브라이드’가 차를 달리며 내 뱉는 독백 같았다. 빌에게 모든 것을 잃은 브라이드가 빌에게 복수를 다짐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 빌. 그래서 나는 당신을 죽이지 않으면 안 되는 거야.’ 이 책의 화자 에드워드 램도 그렇다. 그는 니콜라 파브리를 죽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친구이며, 동업자이며, 동경했고 사랑했던 나머지 증오하게 된 자신의 우상을, 에드워드는 죽이기로 결심한다. 그것도 니콜라가 작가로서 정상의 자리에 섰을 때,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말이다. 그가 꺼내든 무기는 날이 선 일본도처럼 위험하지는 않지만 그보다 훨씬 치명적이었다. 작가인 니콜라를 나락에 떨어뜨릴 흉기로 그가 선택한 것은 바로 한권의 책이었다.
- 통속적이지만 독특하고, 뻔하지만 참신한 복수극
예감이란 과연 믿을 만한 것인가? 프랑스 문학계 최고의 상인 ‘콩쿠르 상’ 수상자에 니콜라 파브리가 유력하다는 신문기사를 보며 에드워드 램은 불안인지 흥분인지 모를 떨림을 느낀다. 모든 일은 그의 뜻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에드워드는 그의 섬뜩한 계획이 거의 성공단계에 이르렀음을 예감한 것이다.
책은 화자인 에드워드 램의 불온한 예감에서부터 시작된다. 이미 도입부터 사건도 가해자도 피해자도 심지어 결말 까지도 은연중에 모두 드러내 버린다. ‘비브리오 미스터리’로 소개된 책이지만 이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것은 책의 비밀도, 사건의 진상도, 범행의 미스터리도, 범인 잡기도 아니다. 이 이야기는 수없이 망설이고 불안해하면서도 지독하리만치 치밀한 살인을 계획할 수밖에 없었던 에드워드 램의 내면상태를 그리고 있다. 어째서 그는 살인을 계획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어째서 살인에 결정적인 무기로 책을 이용하게 되었는지가 이 이야기의 실체다. 사실 살인을 결심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나 살인방법은 참신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어쩌면 이 책을 읽는 누군가에게는 통속적인 범행 동기일 수 있고, 추측 가능한 트릭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독특한 재미를 주는 꽤 재미있는 소설이다.
그 이유는 먼저 이 책의 화자인 에드워드 램의 캐릭터에 있다. 그는 오십대의 명예기사 작위를 받을 정도로 잠잖고 유능한 영국 신사이다.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면과 다르게 유년시절부터 심각한 우울과 열등감에 빠져 있었던 에드워드는 불안정한 심리 상태를 감추고 침착하면서도 치밀하게 범행을 실행한다. 그의 이런 캐릭터는 화려하고 독보적이며 재능이 넘치지만 오만하고 무심한 니콜라의 캐릭터와 대비되면서 뜻밖에 긴장감을 유발한다. 아주 점잖고 고급스러운 말투로 니콜라를 조롱하며 자신의 범죄를 정당화 하는 에드워드이지만 결국은 그의 입장에 동조하게 되는 것은 이런 극명한 캐릭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또한 에드워드의 계획이 상당히 세밀하게 묘사되고 있는 점이 재미있다. 아주 오랫동안 니콜라를 동경하고 사랑했던 그가 ‘결정적인 이유’로 인해 그를 가장 비참한 방법으로 살해하기를 마음먹은 이후로 그의 계획은 정밀한 기계처럼 복잡하지만 정확하게 맞아 들어가기 시작한다. 잘 쓰인 소설처럼, 에드워드의 덫은 빠져나갈 길이 없을 정도로 촘촘하다. 마치 그의 살인이 아주 오래전부터 예정된 필연적인 일이었다는 착각마저 들 정도로 말이다. 그 과정이 아주 낱낱이 묘사되고 맞아떨어지면서 일종의 희열감마저 느껴진다. 그렇게 니콜라는 가장 정점에 오른 순간 나락으로 떨어지고 결국 최후를 맞이하고 만다. 에드워드가 오랫동안 마음속에 기생해 오던 악마를 처단해낸 것이다. 하지만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 이후의 뒷이야기가 이 책의 재미를 완성해 준다. 비로소 완벽한 복수가 이뤄지는 것이다.
- 이것은 ‘위대한 편집자’에 대한 이야기 일지도..
니콜라는 결국 에드워드에 의해 간접살인을 당하지만 사실 에드워드와 니콜라는 운명공동체였다. 오로지 에드워드의 입장에서만 쓰였기 때문에 니콜라에 대한 서술은 항상 왜곡되어 있고 과장되어 있으나 책장이 얇아질수록 확실히 알 수 있다. 니콜라는 에드워드의 눈에 보이는 것처럼 완벽한 인간이 아니며, 오히려 에드워드의 도움을 통해 작가로서의 성장해 왔고 그의 입지를 넓혀 왔다. 에드워드가 니콜라에게 인정받고 인식되고 싶어 했던 것처럼 니콜라도 에드워드에게 인정받고 싶어 했을 것이다. 필생의 역작을 완성하자마자 그에게 달려왔던 것도, 잠적 중에 유언처럼 그에게 편지를 남겼던 것도 모두 니콜라가 에드워드를 얼마나 의지하고 있었는지 잘 보여준다. 이런 둘의 관계는 작가와 편집자라는 그들의 입장으로 인해 더욱 흥미롭게 다가온다.
책 한권이 발행되기 까지 수많은 과정을 거치게 되지만 그 가운데서도 작가와 편집자간의 교섭은 아마 가장 중요한 과정이 아닌가 싶다. 책의 완성도를 높이고 더욱 좋은 책을 만들어 내기까지 작가와 편집자는 끊임없이 투쟁하고 화해하는 과정을 거친다. 그런 과정을 거치며 명작이 탄생한다. 그렇게 탄생한 책은 이미 작가 혼자만의 작품이 아니다. 작가와 편집자가 만들어낸 명작인 것이다. 에드워드가 니콜라의 작품에 마치 자기 작품처럼 여기고 나중에는 에드워드의 작가로서의 재능이 본래 자신의 것인 것처럼 여겼던 것은 어쩌면 명작을 향한 편집자와 작가의 노력과 열정의 일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에서는 에드워드로서는 더 이상 참아줄 수 없는 ‘치명적인 이유’로 그러한 노력과 열정이 결국 파국으로 치닫고 말았지만 말이다.
훌륭한 운명공동체를 잃은 에드워드는 결국 또 다른 동료를 찾아낸다. 그런 결말이 단순한 해피엔딩 이상의 의미로 다가왔던 것은 내가 이 이야기를 읽는 동안 너무나도 에드워드의 입장에 동조됐기 때문일까? 위대해졌고, 앞으로도 더욱 위대해 졌을 작가의 죽음 보다는 그늘에 가려졌지만 그야말로 위대한 편집자였던 어떤 남자의 이야기였다. 나에게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