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 낸시 (스티커 포함)
엘렌 심 지음 / 북폴리오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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귤머리라고 놀린다고 했다. 내가 들어보지 못한 생경한 단어에 어리둥절해 있으니까 잘 못 알아들었다고 생각했는지 언니가 한 글자씩 또박또박 되풀이했다. 귤머리. 그런 단어가 있냐고 되물으니까 말 그대로 머리가 귤같이 노랗다고 해서 귤머리란다. 이제 막 초등학생이 된 조카는 언니를 닮아서 머리카락 색깔이 옅었다. 이건 우리 집 내력인데, 언니뿐만 아니라 우리 자매들은 모두 머리카락 색깔이 옅다. 어두운 데서 보면 그냥 짙은 갈색인데 햇빛을 받으면 빛바랜 갈색이다. 자매들 중에서는 특히 내가 제일 심해서 어느 동네 미용실에 가도 염색한지 얼마나 됐냐는 질문을 받는다. 여하튼 반 친구들 눈에는 조카의 머리색깔이 튀었는지 귤머리라는 해괴하고도 직관적인 신조어를 만들어 놀려대는 모양이었다. 타고난 머리색을 어쩌랴 싶지만 아이에게는 그게 꽤 큰 스트레스였는지 잔뜩 울상이었다. 이모도 저 만할 때 친구들이 그렇게 놀렸느냐고 물어보는데 뭐라고 대답해 줘야 할지 난감했다.

 

아이들은 어쩌면 그렇게 다른 것을 민감하게 찾아내서 집요하게 배척하는 것일까? 때로는 어른들보다도 아이들이 더 무정하고 잔인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그런 일은 어린 아이들 사이에서만 벌어지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노골적이지 않아서 그렇지 어른들도 그러지 않은가? 세 사람만 모여도 파벌이 생기고 왕따가 나온다. 사람이라는 동물은 그 자체로 무리 짓기를 좋아하고, 무리가 아니면 내쫓아야 직성이 풀리는 족속이야. 그렇게 설명하면 귤머리 아이는 조용히 납득할까? 원래 그런 거라고.

 

착한 쥐들이 사는 마을에 하얀 아기고양이가 버려진다. 지미를 키우고 있는 더거씨는 차마 버려진 고양이를 외면하지 못하고 가족으로 받아들인다. 평화로운 쥐 마을에 천적인 고양이가 업둥이로 거둬진 일은 엄청난 사건이지만, 아기고양이 낸시는 너무도 귀여웠고 쥐 마을의 쥐들은 귀여운 낸시를 내칠 만큼 모질지 못한 착한 쥐들이었다. 그렇게 낸시는 자연스럽게 마을에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지고 마을 쥐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다.

 

보는 내내 그냥 기분이 좋아지는 책이다. 그림은 몽실몽실하고 텍스트에서는 부정적이거나 어두운 감정은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작가가 나쁜 건 하나도 보여주지 않겠다고 작정한 것처럼 이야기 내내 뻔한 갈등이나 어디서 본 것 같은 악당은 등장하지 않는다. 이렇다 할 위기나 스릴도 없다. 평화로운 쥐 마을의 유일한 고민거리는 다만 저가 쥐인 줄로만 알고 있는 낸시가 사실은 쥐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을 때 받을 충격을 어찌 감당하게 할 것이냐 하는 문제뿐이다.

 

교육용 교재도 아닌 만화를 보며 다름을 받아들이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동화를 읽어주며 현실을 미화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는 이 이야기가 마냥 기분 좋고 때로는 코가 찡하기도 했지만 조카를 생각하면 한편으론 속이 상했다. 얘야, 넌 낸시가 될 수 없을 거야. 네 친구들은 착한 쥐들이 아니거든. 물론 너도 귀여운 낸시가 아니지. 책을 덮으면서, 아름다운 꿈에서 깨어나 아름답지 않은 현실을 마주한 느낌 같은 미묘한 찝찝함이 있었다. 귤머리 아이에게 나는 뭐라고 말해줘야 했을까?

 

내가 조카만 한 나이였을 때부터 귀에 인이 베이도록 들어온 말이 있다. 우리 딸 머리는 백만 불짜리 머리야. 나중에 할머니가 되서도 하얗게 세지 않을 거야. 아빠는 이미 마흔 전에 백발이 되셨으니 아빠를 닮은 내 머리가 나중에 셀지 안 셀지는 모르는 일이었지만 말이다. 이제는 어린애도 아닌데 엄마는 염색하러 가시는 날마다 아직도 내게 그런 말을 하신다. 네 머리는 나중에 세지 않는 머리야. 그러니 얼마나 특별하냐고.

 

어릴 때 나는 그 애정이 담긴 도돌이표 멘트를 들을 때 마다 내가 다른 애들과 다른 부분이 있다는 걸 자각하게 됐지만 한편으로는 그 다름이 나쁘지 않은 것임을 알았다. 오히려 가끔은 특별하다는 생각도 했었다. 다르다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님을, 때로는 특별한 것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이야기해도 어린 조카는 아마 이해하지 못하리라. 나중에 하얀 머리가 덜 난다는 말은 들은 들 아이가 기분 좋게 생각할 것 같지도 않고 말이다. 귤머리 아이에게 뭐라고 말해줬어야 했을까? 어쩌면 정답은 이 책의 254쪽에 있는 그 말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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