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은 밤 (별밤 에디션)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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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할머니의 입을 통해 전해 듣는 증조모와 새비 아주머니의 이야기는 여전히 내게 큰 울림을 준다. 함께였기에 견딜 수 있었던 시간들. 비록 그로 인한 고통이 있었더라도 서로의 존재가 주는 위로와 기쁨이 더 컸기에 그들의 만남은 충분히 따뜻했을 것이다.

 

사람이 저지른 일이라던 새비 아저씨의 외침과 자신의 딸만큼은 멀리 나아가길 바랐던 새비 아주머니의 마음, 그리고 그런 엄마의 마음을 안고 먼 나라로 떠나 자신의 길을 개척해나간 희자의 시간은 오래도록 가슴에 남는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과 용서하는 마음, 살생을 결행하는 것과 살아남기 위해 애쓰는 마음, 인간이 가진 수많은 형태의 마음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이었다.

 

2021년을 마무리하며 밝은 밤을 만날 수 있어 정말 다행이었다. 덕분에 좋은 향기가 나는 마음으로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마음이라는 것이 꺼내볼 수 있는 몸속 장기라면, 가끔 가슴에 손을 넣어 꺼내서 따뜻한 물로 씻어주고 싶었다. 깨끗하게 씻어서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해가 잘 들고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널어놓고 싶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마음이 없는 사람으로 살고, 마음이 햇볕에 잘 마르면 부드럽고 좋은 향기가 나는 마음을 다시 가슴에 넣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겠지. 가끔은 그런 상상을 하곤 했다. - P14

어떤 말은 듣는 순간 영원히 잊히지 않으리라는 걸 알게 한다. 내게는 엄마의 그 말이 그랬다. 엄마는 내게 전화를 해서 나의 이혼으로 엄마가 얼마나 힘든 상황인지, 얼마나 괴롭고 우울한지 호소했다. 심지어 내 전남편에게 연락해서 그의 행복을 빌어주기까지 했다고 말했다. 엄마의 눈에는 나의 고통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 P18

열일곱은 그런 나이가 아니다. 군인들에게 잡혀갈까봐 두려워하며 잠들지 못하는 나이, 아침마다 옥수수를 삶아 한 광주리를 이고 팔러 다녀야 하는 나이, 죽음을 목전에 둔 엄마의 공포와 노여움과 외로움을 지켜봐야 하는 나이, 영영 자기 혼자 남겨질 것이라는 예감을 하는 나이, 백정이라는 표식 때문에 길을 지나갈 때면 언제나, 어김없이 조롱당하고 위협당하는 나이, 엄마를 버려야 하는 나이, 엄마의 임종조차 지키지 못하고 멀리서 소식을 들어야 하는 나이. 그렇지만 증조모의 열일곱은 그런 나이였다. 할머니는 증조모가 그 나이의 자신을 버리지 못한 채 계속 붙들고 살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 P47

할머니는 증조모가 고조모에게 느낀 감정이 죄책감일 거라고만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 시간을 지나면서, 고조모에 대한 증조모의 감정이 오로지 깊은 그리움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어리광 부리고 싶고, 안기고 싶고, 투정 부리고 싶고, 실컷 사랑받고 싶고, 엄마, 엄마, 하고 부르고 싶은 마음을 차곡차곡 접어둔 채로 살아왔을 뿐이라고. 증조모가 할머니를 보며 엄마라고 불렀을 때, 할머니는 고조모가 증조모에게 했다는 말을 떠올렸다. 기래, 가라. 내레 다음 생에선 네 딸로 태어날 테니. 그때 만나자. 그때 다시 만나자. - P47

나는 항상 나를 몰아세우던 목소리로부터 거리를 두고 그 소리를 가만히 들었다. 세상 어느 누구도 나만큼 나를 잔인하게 대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쉬웠을지도 모르겠다. 나를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을 용인하는 일이. - P86

내가 새비 아주머니의 입장이었더라도, 나는 남편을 위해 그만큼 울었을 것이고 남편을 다시 만나서도 그만큼 행복했을 것이다. 전남편이 저버린 것은 그런 내 사랑이었다. 내가 잃은 것은 기만을 버리지 못한 인간이었지만, 그가 잃은 건 그런 사랑이었다. 누가 더 많은 것을 잃었는지 경쟁하고 싶지는 않지만 적어도 그 경쟁에서 나는 패자가 아니었다. - P99

‘넌 사랑받기 충분한 사람이야.’ 어느 날 말을 이을 수 없어 눈물만 흘리던 내게 지우가 그렇게 말했다. ‘앞으로는 내가 널 더 많이 사랑할게. 이제 사랑받는 기분이 뭔지도 느끼며 살아.’ 아무 이유 없이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듯이, 어떤 이유 없이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나는 지우를 보며 알았다. - P102

"새비 아주머니는 엄마의 상처였어. 그렇지만 자랑이기도 했지. 엄마를 크게 넘어뜨렸지만, 매번 털고 일어날 힘이 되어주기도 했으니까. 엄마가 새비 아주머니를 떠올리며 가장 많이 했던 얘기는 이거였어. 새비가 나를 얼마나 귀애해줬는지 몰라, 새비가 나를 얼마나 애지중지했는지 몰라. 새비 아주머니를 만나 아픈 일이 많았는데도, 새비 아주머니를 기억하는 엄마의 표정은 늘 환했어. 꼭 다른 세상에 있는 사람처럼 말이야. 새비 아주머니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런 상처 같은 거 받지 않아도 됐겠지만 그래도 엄마는……"
"새비 아주머니를 만나는 삶을 택하셨겠네요."
"그래. 그게 우리 엄마야." - P116

그렇게 죽어야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희자 아바이가 말했어. 조선 사람이고 일본 사람이고 중국 사람이고 간에 그렇게 허무하게 죽을 사람은 세상천지 어디에도 없다고. 사람이 저지른 일이야. 사람이 저지른 일이야. 희자 아바이는 내 손을 붙잡고서 그 말을 몇 번이고 반복했어. - P123

희자 어마이, 전지전능한 천주님이 왜 손을 놓고 계신 기야. 나는 슬퍼만 하는 천주님께 속죄하고 싶지 않아. 천주님 앞에서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말하고 싶지 않아. 천주님이 정말 계신다면 그때 뭐하고 계셨느냐고 따지고 들고 싶어. 예전처럼 무릎 꿇고 천주님, 천주님 감사합니다, 말하고 싶지 않아. 기래, 나를 살려주셨지. 기래서 감사하다고 말한다면 다른 사람들 목숨은 뭐가 되나. - P124

혼자 돌담 아래 앉아서 아재비, 말을 걸고, 잘 지내시오, 아재비, 다시 말하고 그랬어. 내가 여든이 다 되도록 살면서 떠나보낸 사람들이 많아. 그런데도 그게 처음 겪은 죽음이어서 그런지 잊히질 않네. 분명히 가까이 있는데, 마음으로는 그렇게 지척인데 볼 수도, 만져볼 수도 없다는 게, 영영 없어져버렸다는 게 지금도 믿기지 않아. - P126

우리는 둥글고 푸른 배를 타고 컴컴한 바다를 떠돌다 대부분 백 년도 되지 않아 떠나야 한다. 그래서 어디로 가나. 나는 종종 그런 생각을 했다. 우주의 나이에 비한다면, 아니, 그보다 훨씬 짧은 지구의 나이에 비한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삶은 너무나 찰나가 아닐까. 찰나에 불과한 삶이 왜 때로는 이렇게 길고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참나무로, 기러기로 태어날 수도 있었을 텐데, 어째서 인간이었던 걸까.
원자폭탄으로 그 많은 사람을 찢어 죽이고자 한 마음과 그 마음을 실행으로 옮긴 힘은 모두 인간에게서 나왔다. 나는 그들과 같은 인간이다. 별의 먼지로 만들어진 인간이 빚어내는 고통에 대해, 별의 먼지가 어떻게 배열되었기에 인간 존재가 되었는지에 대해 가만히 생각했다. 언젠가 별이었을, 그리고 언젠가는 초신성의 파편이었을 나의 몸을 만져보면서. 모든 것이 새삼스러웠다. - P130

"이상한 일이야. 누군가에게는 아픈 상처를 준 사람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정말 좋은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게." - P134

예전처럼 며칠씩 서로 말도 붙이지 않을 정도로 신경전을 벌일 만한 일이 우리에게는 더 이상 없었다. 큰불이 나기 전에 꺼버렸고, 상대에게 작은 불씨를 던졌다는 것에 문득 무안해지기도 하는 사이가 된 것이었다. 그건 우리가 그만큼 친밀한 사이가 아니라는 뜻이기도 했다. 서로에게 큰 상처를 입혔다가 돌이킬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우리는 눈빛으로 공유하고 있었다. 우리는 더 이상 끝까지 싸울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정말 끝이 날까봐 끝까지 싸울 수 없는 사이가. - P137

그때 죽은 사람이 그 열 명만은 아니었다고 할머니는 말했다. 첫번째 영옥이도 그때 죽었고, 다시 태어난 영옥이는 그전의 영옥이와는 다른 형편없는 사람이 되었다고 했다. 증조모, 증조부, 할머니는 죽음으로 서로 헤어질 때까지 그날의 일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리고 셋 다 각자의 방식으로 조금씩 부서졌다. 겉으로 보아 가장 달라진 사람은 증조모였다. 증조모는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약이 없이는 밤에 잠을 자지 못했다. 사람을 쉽게 의심했고, 자신이 언제든지 아무렇게나 처리될 수 있다는 생각에 시달렸다. 그 마음을 누구도 고쳐주지 못했다. - P141

나는 희자가 높은 하늘에 연을 띄우듯이, 기억이라는 바람으로 잊고 싶지 않은 순간을 마음에 띄워 올리곤 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런 바람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 일이 항상 즐거운 것만은 아니었으리라고 짐작하면서. - P152

고통 안에서 시간은 직선으로 흐르지 않았다. 나는 자꾸만 뒷걸음질쳤고 익숙한 구덩이로 굴러떨어졌다. 다시는 회복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조바심 서린 두려움이 나를 장악했다. 나는 왜 내가 원하는 만큼 강해질 수가 없을까. 이렇게까지 노력하는데도 왜 나아지지 않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며 오래 울던 밤에 나는 나의 약함을, 나의 작음을 직시했다. - P156

말이 끝나자마자 증조모가 할머니의 얼굴을 때렸다. 한 번, 두 번, 다음에는 머리를 쳤다. 바닥에 쓰러질 정도로, 증조부가 말릴 때까지. 아이는 더 이상 그들을 따라오지 않았다. 입을 다물고 길을 걷다보니 해가 졌다. 그믐밤이었다. 별 무리가 아주 낮게까지 내려와 밝게 빛났다. 그걸 보면서 할머니는 생각했다. 우리는 이런 아름다움을 보고 느낄 자격이 없는 존재들이라고. 짐승만도 못한 존재들, 천한 존재들, 세상에서 사라져야 할 존재들이라고. - P166

"너희 증조할머니가 돌아가신 것도 이런 계절이었어. 장례 치르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도무지…… 안에 들어갈 수가 없는 거야. 그래서 여기 길가에 서서 계속 맴돌았어. 겁이 나더라고. 집에 아무도 없다는 걸 눈으로 확인하면 세상에 엄마가 없다는 게 진짜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계속 맴돌았지. 옛날 사람들 말이 맞아. 딸의 곡성은 저승까지 들린다고…… 그렇게 한 해를 괴롭게 지내다가 네가 놀러왔을 때 얼마나 반갑고 좋았던지 몰라. 세상에는 끝나는 것들만 있다고 생각했거든. 근데 너를 보니 그게 아니라는 걸 알겠더라."
할머니가 개망초꽃을 손등으로 툭툭 쳤다. 지금 너도 남몰래 울고 있다는 걸 알고 있어. 할머니의 말이 내게 꼭 그렇게 들렸다. 끝나는 것들만 생각하지 마. - P168

나는 엄마에게 죽은 언니와 놀았다고 말하던 날을 떠올렸다. 내가 상상할 수도 없는 고통을 겪은 사람 앞에서 나의 진실을 떠벌리는 것이 대체 무슨 의미였을까. 엄마의 고통 앞에서 나의 진실은 가치가 없었다. 어떤 경우에도 엄마의 불행에 나의 불행을 견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계속 거짓말을 했다. 괜찮다고, 잘 지내고 있다고, 잘 자고 잘 먹고 있다고, 문제가 없다고. 나는 언제나 잘 웃는 아이였고, 자라서는 잘 웃는 어른이 됐다. 마음속으로 울고 있을 때도 얼굴에서는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 P171

할머니는 희자야, 라고 말하지도 못한 채로 자리에 주저앉아서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울음을 터뜨렸다. 반가움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동안 입 밖으로 내지 않았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이고 치받치던 두려움이 그제야 몸밖으로 빠져나왔기 때문이었다. 두려움이란 신기한 감정이었다. 사라지는 순간 가장 강렬하게 느껴지니까. - P179

이런 갈등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 엄마나 나나 서로에 대해 많은 걸 포기했었다. 그런데 어째서 다시 이렇게 부딪치게 된 걸까. 나를 방어하기 위해서 결국 엄마를 공격하게 되는 패턴을 반복하고야 말았다. 상처 주고 싶지 않았지만 끝내 자신을 꺾지 않고 나를 비난하는 엄마를 견딜 힘이 내게는 없었다. - P191

앞에서는 듣기 좋은 말을 하면서 뒤에선 다른 말을 하는 사람들, 악의 없는 웃음을 보이면서 다른 마음을 품는 사람들이 흔하고 흔했다. 그런 모습은 어쩌면 인간이 지닌 보편적인 성질인지도 몰랐다. - P195

"어떻게 살았어요, 할머니? 그런 일을 겪고 어떻게 살 수 있었어요?"
나는 참지 못하고 얼굴을 가린 채 눈물을 흘렸다.
"언젠가 이 일이 아무것도 아닌 날이 올 거야. 믿기지 않겠지만…… 정말 그럴 거야."
할머니가 말했다. - P230

나는 가만히 앉아서 그날 아침 의사가 내게 귀리의 죽음을 알렸을 때 느낀 감정이 슬픔만은 아니었음을 기억했다. 나는 안도했다. 나의 일부는 안도했다. 귀리의 고통이 이제 사라졌다는 사실에, 고통을 받는 그애의 모습을 보고 겪어야 했을 나의 괴로움이 끝났다는 사실에. 그 이기적인 마음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 P233

나는 할머니의 얼굴을 보며 누군가에게 죽어버리라고 소리지를 수밖에 없는 마음을 생각했다. (...) 눈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세상에는 진심으로 사과받지 못한 사람들의 나라가 있을 것이다. 내가 많은 걸 바라는 건 아니야, 그저 진심어린 사과만을 바랄 뿐이야, 자기 잘못을 인정하기를 바랄 뿐이야, 그렇게 말하는 사람과, 연기라도 좋으니 미안한 시늉이라도 해주면 좋겠다고 애처롭게 바라는 사람과, 그런 사과를 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애초에 이런 상처도 주지 않았으리라고 체념하는 사람과, 다시는 예전처럼 잠들 수 없는 사람과, 왜 저렇게까지 자기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드러내?라는 말을 듣는 사람과, 결국 누구에게도 이해받을 수 없다는 벽을 마주한 사람과, 여럿이 모여 즐겁게 떠드는 술자리에서 미친 사람처럼 울음을 쏟아내 모두를 당황하게 하는 사람이 그 나라에 살고 있을 것이다. - P251

그는 말했다. 세상 사람들은 하느님 아래에 모두 평등하며 어느 누구도 더 존귀하거나 비천하게 태어나지 않았다. 존귀함과 비천함은 사람의 선택에 달렸으며 행동의 결과로 드러날 것이다. 증조모는 채 스물도 되지 않은 그의 그런 뜬구름 잡는 소리가 우스우면서도 듣기 좋다고 생각했다. 오리가 무리를 지어 날아갈 때 내는 소리처럼, 폭우가 호수 위에 쏟아지는 소리처럼, 바람이 길게 불며 나뭇잎을 스치고 지나가는 소리처럼, 멀리서 들려오는 기차 소리처럼 증조부의 목소리는 증조모에게 다가왔다. 그때의 기억으로 증조모는 살아갔다. - P253

그러지 않으려고 했지만 할머니는 희자를 생각하면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배움을 너무 쉽게 포기했다는 것, 아무것도 꿈꿔보지 않았다는 것, 결혼으로 도피하려 했다는 것, 일이든 사람이든 무언가를 위해서 단 한 번도 노력한 적이 없었다는 것, 그 모든 것들이 할머니는 그저 부끄러웠다. 할머니의 모든 선택이 그때로서는 합당하고 이치에 맞는 것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랬다. - P256

"저 징그러운 걸 어떻게 안 무서워해."
"난 좋아해."
엄마는 그것이 정말 중요한 문제라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갯강구는 바닷가 돌 틈이나 방파제에 살면서 해변을 청소해."
엄마는 친구를 소개하는 듯한 말투로 말을 이어나갔다.
"어릴 때, 혼자 바닷가에 앉아 있을 때, 그렇게 부지런히도 움직이는 갯강구가 정답게 느껴졌어. 속으로 불렀지, 갯강구야, 하고. 나쁜 짓 하나 하지 않는데도 사람들은 너희들을 징그럽다고 끔찍하다고 말해." - P269

엄마는 평범하게 사는 것이 제일 좋은 삶이라고 말했었다. 아빠와의 결혼으로 자신도 평범한 가족을 꾸리게 되어서 좋았다고 이야기했었다. 그런 말을 습관적으로 하던 엄마를 예전에는 잘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는 머릿속에 동그라미 하나를 그리고 그 안에 평범이라는 단어를 적었다.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은 삶, 두드러지지 않은 삶, 눈에 띄지 않는 삶, 그래서 어떤 이야깃거리도 되지 않고, 평가나 단죄를 받지 않고 따돌림을 당하지 않아도 되는 삶. 그 동그라미가 아무리 좁고 괴롭더라도 그곳에서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 엄마의 믿음이었는지도 모르겠다고, 나는 잠든 엄마의 숨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 P271

"착하게 살아라, 말 곱게 해라, 울지 마라, 말대답하지 마라, 화내지 마라, 싸우지 마라. 귀에 딱지가 앉도록 그런 얘길 들어서 난 내가 화가 나도 슬퍼도 죄책감이 들어. 감정이 소화가 안 되니까 쓰레기 던지듯이 마음에 던져버리는 거야. 그때그때 못 치워서 마음이 쓰레기통이 됐어. 더럽고 냄새나고 치울 수도 없는 쓰레기가 가득 쌓였어. 더는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아…… 나도 사람이야. 나도 감정이 있어." - P278

되는대로 아무 상호나 대고는 번호를 안내해주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정말 견딜 수 없을 지경이 되었을 때만 114를 눌렀다. 혹시나 엄마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지 않을까. 잠시라도, 아주 잠시만이라도 엄마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소원이 없을 것 같았다. 나는 나와 같은 마음으로 114를 누를 아이들을 상상했다. 실패할 것이 분명한 전화를 거는 아이들의 모습을. 그런 상상을 할 때만큼은 나는 온전한 혼자가 아니었다. - P281

새비 아주머니의 시선은 증조모의 몸을 지나서, 마음을 지나서, 어쩌면 영혼이라고 부를 수 있는 장소에까지 다다랐다. 그곳에서, 아직 다섯 살도 되지 않은 어린 증조모는 햇볕에 따뜻하게 데워진 돌멩이를 안고서 내 동무야, 내 동무야, 말을 걸고 있다. 그런 작은 따뜻함이라도 간절해서, 하지만 사람은 너무 무서워서. 증조모는 마당 구석에 쪼그려앉아서 자기 그림자를 보고 있다.
그때 자신이 누구를 부르는지도 모르고 간절히 부르던 사람이 바로 새비 아주머니였다는 사실을 증조모는 그녀의 시선 속에서 이해했다. 너레 내 목소리를 들어주었더랬지. 내가 한 음식을 먹고 맛이 있다고 이야기해주었어. 너는 내를 삼천이라고 불러주었어. 새비 너는 내를 삼천이라 불러줬었어. - P288

안정을 추구했던 그 시간 동안 나는 성장하지 못했다. 독에 갇힌 나무처럼 가지를 마음껏 뻗어나갈 수가 없었다. 고립되었다.
(...) 나는 누구에게 거짓말을 했나.
나에게, 내 인생에게.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알고 싶지 않아서, 느끼고 싶지 않아서.
어둠은 거기에 있었다. - P299

내 어깨에 기댄 여자는 편안한 얼굴로 잠을 자고 있었다. 청명한 오후였다. 어깨에 느껴지는 무게감이 좋았다. 나는 내게 어깨를 빌려준 이름 모를 여자들을 떠올렸다. 그녀들에게도 어깨를 빌려준 여자들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얼마나 피곤했으면 이렇게 정신을 놓고 자나, 조금이라도 편하게 자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마음. 별것 아닌 듯한 그 마음이 때로는 사람을 살게 한다는 생각을 했다. 어깨에 기대는 사람도, 어깨를 빌려주는 사람도. 구름 사이로 햇빛이 한 자락 내려오듯이 내게도 다시 그런 마음이 내려왔다는 생각을 했고, 안도했다. - P299

‘맞서다 두 대, 세 대 맞을 거, 이기지도 못할 거, 그냥 한 대 맞고 끝내면 되는 거야.’ 나는 그 말을 하던 엄마의 얼굴을 떠올렸다. ‘지는 게 이기는 거다.’ ‘너를 괴롭힌다고 똑같이 굴면 너도 똑같은 사람 되는 거야.’ ‘그냥 너 하나 죽이고 살면 돼.’ 패배감에 젖은 그 말들. 어차피 맞서 싸워봤자 승산도 없을 거라고 미리 접어버리는 마음. 나는 그런 마음을 얼마나 경멸했었나. 그런 마음에 물들지 않기 위해서 얼마나 발버둥쳐야 했었나. 그런 생각을 강요하는 엄마가 나는 미웠다. 그런 식의 굴욕적인 삶을 원하지 않는다고 저항했다. 하지만 왜 분노의 방향은 늘 엄마를 향해 있었을까. 엄마가 그런 굴종을 선택하도록 만든 사람들에게로는 왜 향하지 않았을까. 내가 엄마와 같은 환경에서 자라났다면, 나는 정말 엄마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내 생각처럼 당당할 수 있었을까. 나는 엄마의 자리에 나를 놓아봤고 그 질문에 분명히 답할 수 없었다. - P313

"그래, 똥강아지. 걔가 얼마나 감탄을 잘했는지 몰라. 작은 개구리 하나를 봐도 우와, 커다란 소라 껍데기를 봐도 우와, 늘 우와, 우와, 하는 거야. 그런데 그건 너도 그렇더라. 언니를 보고 커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말이야. 어쩌면 우리 엄마로부터 이어졌는지도 몰라. 대수롭지 않은 일에도 그렇게 감탄을 잘하니 앞으로 벌어질 인생을 얼마나 풍요롭게 받아들일까 싶었어. 좋은 일이 생길 때마다 우와, 하면서 살아가겠구나. 그게 나의 희망이었던 것 같아." - P316

어머니는 자기 신념이 강했고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하는 사람이었어요. 나를 데리고 늦가을에 대구로 피난을 가는데 어머니가 바들바들 떨던 것이 기억나요. 자꾸 농담을 하면서. 나는 어머니가 추워서가 아니라 무서워서 떨고 있다는 걸 알았어요. 어머니는 일평생이 그런 식이었죠. 바들바들 떨면서도 제 손을 잡고 걸어갔어요. 어머니는 내가 살면서 가장 사랑한 사람이었어요. 무서워서 떨면서도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 나는 어머니를 닮고 싶었어요. - P333

그래, 우린 끝이 났어. 마지막으로 영옥이 언니를 보고 오던 길에 했던 그 날카로운 다짐조차도 영옥이 언니와 내가 나눴던 마음을 잘라낼 수 없다는 것을 이제는 알아요. 우리가 서로를 영원히 알아낼 수 없으리라는 사실은 젊은 나를 절망하게 했지만 어찌된 일인지 지금의 내게는 위안이 되네요. - P334

김희자 박사에게 갈 수 있는 한 가장 멀리 가라고 했던 새비 아주머니의 말을 나는 종종 생각했다. 그 말은 단순히 물리적 거리만을 뜻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딸이 다른 차원으로 가기를 바랐던 마음이었겠지. 본인이 느꼈던 현실의 중력이 더는 작용하지 않는 곳에서 자신의 딸이 더 가벼워지고 더 자유로워지기를 바랐던 새비 아주머니의 마음을 나는 오래 생각했다. - P335

처음부터 끝까지 한 사람의 삶의 모든 순간을 오감을 다 동원해 기록할 수 있고 무수한 생각과 감정을 모두 담을 수 있는 레코드가 있다면. 그건 그 사람의 삶의 크기와 같을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비가시권의 우주가 얼마나 큰지, 어떤 모습일지 상상할 수 없는 것처럼 한 사람의 삶 안에도 측량할 수 없는 부분이 존재할 테니까. 나는 할머니를 만나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 사실을 자연스레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지금의 나이면서 세 살의 나이기도 하고, 열일곱 살의 나이기도 하다는 것도. 나는 나를 너무 쉽게 버렸지만 내게서 버려진 나는 사라지지 않고 내 안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는 사실을. 그애는 다른 누구도 아닌 나의 관심을 바라면서, 누구도 아닌 나에게 위로받기를 원하면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 P336

내게는 지난 이 년이 성인이 된 이후 보낸 가장 어려운 시간이었다. 그 시간의 절반 동안은 글을 쓰지 못했고 나머지 시간 동안 『밝은 밤』을 썼다. 그 시기의 나는 사람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누가 툭 치면 쏟아져내릴 물주머니 같은 것이었는데, 이 소설을 쓰는 일은 그런 내가 다시 내 몸을 얻고, 내 마음을 얻어 한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이었다. - P341

삼 년 만에 책을 낸다. 소설이 책이라는 몸을 입을 때 나는 늘 이별하는 기분을 느낀다. 『밝은 밤』이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무사히 도착하기를, 자신만의 생명으로 누군가의 마음에 잠시나마 함께 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 내 역할은 작가의 말을 쓰는 지금 여기까지인 것 같다. 책은 책의 운명을 살 것이다. - P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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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만우절
윤성희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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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명치에 물총을 쏴달라는 여자, 풍선 간판을 칼로 찢으며 그 순간을 좋아했던 스스로에게 환멸을 느끼던 남자, 0부터 9까지 심호흡을 하면서 온 힘을 다해 자신만의 역기를 드는 남자, 나도 모르는 내 영혼을 당신이 어떻게 아는 거냐며 꽃다발로 사람을 때리던 여자, 이상한 놈이 되는 건 버튼 하나로 왔다 갔다 하는 스위치 같은 거라던 삼촌.

 

우리는 그렇게 애를 써서 그냥 어른이 되었다. 어른이 된다는 건 생각보다 슬프고 외롭고 시시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런 우리에게 가끔은 얼음이 되어도 괜찮다고, 아무것도 안 해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이 한 마디는 따뜻한 위로가 된다.



오빠는 따뜻한 신발을 신고 눈길을 걸으면 뭐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자신감이 생긴다고 했다. 나는 따뜻한 신발을 신고 길을 걷다보면 낯선 곳으로 빨려들어갈 것만 같다고 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내 말을 들은 오빠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따뜻한 신발 덕분에 오빠는 자신감이 넘치는 청년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책임감 강한 아버지가 되었다. 따뜻한 신발을 신고 동화 속 주인공을 상상하던 나는 뭐가 되었을까?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적절한 단어를 떠올려보았다. 딱히 생각나지 않았다. - P55

이번이 여섯 번째네. 지금까지 살면서 나는 네 번의 절교와 한 번의 파혼을 당했다. 네 번의 절교와 한 번의 왕따를 당한 뒤 선물처럼 찾아온 단짝 친구의 죽음과 아버지의 죽음을 겪었다. 두 번이나 이직을 했고, 스트레스로 탈모를 겪기도 했다. 그리고 마침내 여섯 번째로 뼈가 부러지는 사고를 당했다. 그렇게 애를 써서 나는 그냥 어른이 되었다. 그 생각을 하자 헛웃음이 나왔다. 구급대원이 내 입에 귀를 가까이 대고 물었다. "뭐라고요? 방금 뭐라 말했나요?" 나는 간신히 대답했다. "추워요." - P59

나는 벤치 뒤에 웅크리고 앉아서 물총을 쏘는 아이에게 말했다. "할머니한테 한 번만 쏴줄래?" 아이가 어리둥절해했다. "더워서 그래. 여기에 맞혀봐." 나는 손가락으로 명치를 가리켰다. 아이가 머뭇거리더니 물총을 들었다. 다른 두 아이가 다가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이 할머니가 물총에 맞고 싶대." 아이가 친구들에게 말했다. 미끄럼틀 뒤에 숨어 있었던 아이가 그럼 그러자, 하고 대답했다. 그러고는 내 가슴을 향해 물총을 쏘았다. 차가웠다. 나머지 아이들도 따라서 물총을 쏘았다. 처음에 머뭇거리던 아이가 가장 신나게 총을 쏘았다. 옷이 흠뻑 젖었다. "이제 시원해요?" 아이들이 물었다. - P86

눈을 감았다 떴다. 똑딱. 빛이 지구를 일곱 바퀴 돌았을 것이다. 또 눈을 감았다 떴다. 똑딱. 그건 딸이 어렸을 때 내게 알려준 거였다. 엄마, 눈 한 번 깜빡일 시간에 빛이 지구를 일곱 바퀴나 돈대. 딸은 일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눈을 감았다 뜨곤 했다. 눈 깜빡할 시간. 그 시간에 빛이 지구를 몇 바퀴나 돈다고 생각하면 자신의 고민은 하찮게 느껴진다고 했다. - P96

사람들한테는 고시 공부중이라고 거짓말을 했지만 사실 아무것도 안 해요. 청년이 말했다. 나는 그래도 된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가만히 있는 것도 힘든 거라고. (...) 내가 사다리에서 떨어져 팔이 부러진 적이 있었거든요. 나는 청년에게 말했다. 그때 딸이 내게 말했다. 엄마, 얼음 하고 외쳐. 그래서 나는 얼음 하고 말했다. 삼십 분이 지나도 한 시간이 지나도 딸은 땡을 외쳐주지 않았다. 딸이 땡을 해주길 기다리면서 나는 종일 소파에 앉아 있었다. 저녁이 되었고 그제야 딸이 내 손을 잡으면서 땡 하고 말했다. 나는 화장실에 가서 시원하게 오줌을 누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아, 가끔 얼음이 되어야겠다고. 나는 청년에게 지금은 술래를 피해 얼음이 된 거라고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곧 누군가 땡 하고 외쳐줄 거라고. 얼음땡 놀이는 그런 거라고. 누군가 땡 하고 말해줘야 집에 갈 수 있는 거라고. 그러자 청년이 웃었다. 흐흐흐, 그렇게 웃었다. - P109

갑자기 화가 나기 시작했다. 화가 났는데 어떻게 화를 내야 할지 몰라 또 화가 났다. 나는 화를 낸 적이 없었다. 엄마는 작년에 담임선생님한테 그렇게 말했다. 화 한 번 낸 적 없는 착한 아들이라고. 엄마와 면담을 마친 선생님이 내게 말했다. 화를 내고 싶으면 내도 된다고. 그 말에 하마터면 나는 화가 나려고 하면 허벅지를 손으로 꼬집는다고 고백할 뻔했다. 손이 움직이지 않으니 허벅지를 꼬집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나는 시간을 거꾸로 돌리는 놀이를 했다. 어릴 때 엄마한테 혼나면 나는 방구석에 쪼그리고 앉아서 그 놀이를 했다. 열여섯 살인 나. 열다섯 살인 나. 열네 살인 나…… 그렇게 나이를 한 살씩 줄이다보니 어느새 갓난아이인 내가 보였다. 그 갓난아이를 다시 엄마의 뱃속으로 넣어보았다. 어둡고 축축한 곳으로. 지금 죽는다면 나는 평생 시시하게 살다 죽는 거겠지. 세상엔 시시한 게 많지만 그중 가장 시시한 건 나였다. 그 생각을 하자 눈물이 났다. - P187

어렸을 때 나는 풍선 간판을 몰래 찢은 적이 있었다. 부모님이 차린 김밥집이 망한 다음이었다. (그해 우리 가족은 지겹게 김밥을 먹었다. 누나는 투덜대며 안 먹었지만 나는 하루 세끼를 먹었다. 묵은지김밥. 그건 정말 맛있었다. 그렇게 맛있는데 왜 장사가 안된 걸까?) 그 자리에 피자집이 생겼다. 오픈 날 사람 모양의 커다란 풍선이 가게 앞에서 춤을 추었다. 두 팔을 흔들면서. 다음날 가보았더니 여전히 풍선이 춤을 추고 있었다. 그래서 그랬다. 우리가 망한 자리에서 풍선이 신나게 춤을 추어서. 풍선을 찢은 날 나는 일부러 비를 맞았다. 감기에 걸리고 싶어서. 풍선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렸을 때 통쾌한 기분이 들었는데 그런 내가 무서웠다. 아이가 찢은 의자에 앉으면 풍선 간판을 찢던 그때가 자꾸 생각났다. 그럴수록 거기에 앉았다. 내가 미워서. - P189

할머니가 왜 내게 숫자를 말해주었는지 알 것만 같았다. 배꼽에 힘을 주고 숫자를 외우라는 말. 그렇게 외우다보면 0부터 9까지 모든 숫자들이 혈관을 따라 내 몸을 돌고 도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발가락을 상상했다. 나는 흉터가 있는 오른쪽 종아리를 상상했다. 튀어나와 친구들의 놀림을 받는 배꼽을 상상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눈 코 입을 상상했다. 누나랑 나는 별명이 똑같았다. 단춧구멍. 아빠 빼고 우리 가족은 눈이 다 작았다. 그렇게 작은 눈인데…… 세상에, 눈꺼풀이 너무나 무거웠다. 이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릴 수만 있다면 앞으로 뭐든지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역도 선수가 되는 상상을 했다. 내 역기는 봉 양쪽에 동그란 눈꺼풀이 달려 있다. 십 킬로그램짜리 눈꺼풀이. 나는 역도 선수다. 나는 국가대표다. 나는 대회 결승전에 진출했다. 결승전 경기에 나선 나는 0부터 9까지 천천히 숫자를 세면서 심호흡을 한다. 그리고 숨을 멈추고 온 힘을 다해 역기를 든다. - P195

외로워서 감기에 걸리는 게 아니라 감기에 걸리니 외롭다는 생각이 드는 거라고. 며칠 후에 그 문장 아래에 누군가 이런 글을 적어놓았다.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었음.’ - P215

지하철역으로 들어가 열차를 기다리는데 젊은 여자 둘이 다가와 언니에게 영혼이 맑아 보인다는 말을 했다. "그 말에 갑자기 화가 났어. 나도 모르게 여자를 밀었지." 두 여자 중 한 여자가 넘어졌다. 언니는 들고 있던 꽃다발로 넘어진 여자의 얼굴을 때렸다. 붉은 장미가 떨어지고, 분홍 장미가 떨어지고, 노란 장미가 떨어지고, 마지막으로 안개꽃이 날렸다. 꽃다발을 휘두르면서 언니는 이렇게 소리쳤다고 한다. "니가 내 영혼을 어떻게 알아. 나도 모르는데." 언니는 미리를 낳을 때까지 매일 그 일을 복기하고 또 복기했다. 그런데도 자신이 왜 그랬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그날 이후…… 뭐랄까, 마음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것 같아. 블랙홀 같은 거. 조금만 잘못해도 그 안으로 빨려들어갈 것만 같았어." 언니는 말했다. - P247

그해, 휴가를 나와 같이 잠을 잤던 사흘 동안 삼촌은 군대에서 만난 이상한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었다. 듣다보면 정말 그렇게 나쁜 사람이 있을까 싶은 이야기투성이였다. 그렇게 이야기를 들려주다가 내가 잠을 자려고 하면 삼촌은 나를 흔들어 깨웠다. 왜? 잠결에 물으면 삼촌은 웃으면서 말했다. 인마, 불 꺼. 나는 졸린 걸 참고 간신히 일어나 스위치를 껐다. 불이 꺼졌다. 그러면 삼촌은 늘 이렇게 말했다. 스위치 같은 거야. 그렇게 이상한 놈이 되는 건. 버튼 하나로 왔다갔다하는 거지. 그러니 스위치를 잘 켜고 있어야 해. 그 말을 할 때 삼촌의 목소리는 비장했다. 마치 내게 그 이야기를 들려주러 온 사람처럼. - P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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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긴밤 - 제21회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대상 수상작 보름달문고 83
루리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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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안전한 코끼리 고아원에서 수많은 코끼리들과 살아온 노든이 훌륭한 코뿔소가 되기 위해 낯선 바깥으로 나아가는 것에는 큰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만나게 된 수많은 동물친구들과 여러 모습의 인간들은 그에게 사랑과 행복, 고난과 시련, 인내와 극복을 겪게 만든다.

 

귀여워서 피식 웃으며 책장을 넘길 때도 있었지만 금세 울컥하는 감정에 책장을 멈추고 심호흡을 해야 할 때가 더 많았다. 노든과 노든의 가족, 앙가부, 치쿠와 윔보, 아기 펭귄은 모두 우리들과 마찬가지이다. 그들의 현재에는 그들 자신의 노력과 그들을 지켜준 주변 이들의 희생이 있었고 그 이면에는 사랑의 힘이 끈끈하게 작용하고 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우리를 계속해서 이어지게 만들고 앞으로 나아가게 만든다.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위기에 절망하다가도 다시금 일어나서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 그렇게 삶을 끝까지 이어나가는 것. 우리가 걸어가는 길과 자연에서 그들이 걷는 길은 그렇게 닮아있다.

 

마지막으로 아기 펭귄이 가족인 노든의 곁을 떠나 새로운 펭귄 친구들과 바다로 들어가는 장면은 아주 인상적이었다. 아기 펭귄의 말처럼 우리는 언젠가 노든을 다시 만날 지도 모른다. 그렇게 서로를 알아보며 코와 부리를 맞대고 다시 인사할 때까지 우리는 각자의 길을 열심히 걸어갈 것이다. 각자의 긴긴밤을 겪으면서.






"눈이 멀어 이곳에 오는 애도 있고, 절뚝거리며 이곳에 오는 애도 있고, 귀 한쪽이 잘린 채 이곳으로 오는 애도 있어. 눈이 보이지 않으면 눈이 보이는 코끼리와 살을 맞대고 걸으면 되고, 다리가 불편하면 다리가 튼튼한 코끼리에게 기대서 걸으면 돼. 같이 있으면 그런 건 큰 문제가 아니야. 코가 자라지 않는 것도 별문제는 아니지. 코가 긴 코끼리는 많으니까. 우리 옆에 있으면 돼. 그게 순리야." - P12

"하지만 너에게는 궁금한 것들이 있잖아. 네 눈을 보면 알아. 지금 가지 않으면 영영 못 가. 직접 가서 그 답을 찾아내지 않으면 영영 모를 거야. 더 넓은 세상으로 가. 네가 떠나는 건 슬픈 일이지만 우리는 괜찮을 거야. 우리가 너를 만나서 다행이었던 것처럼, 바깥세상에 있을 또 다른 누군가도 너를 만나서 다행이라고 여기게 될 거야." - P15

"여기, 우리 앞에 훌륭한 한 마리의 코끼리가 있네. 하지만 그는 코뿔소이기도 하지. 훌륭한 코끼리가 되었으니, 이제 훌륭한 코뿔소가 되는 일만 남았군그래." - P16

"훌륭한 코끼리는 후회를 많이 하지. 덕분에 다음 날은 전날보다 더 나은 코끼리가 될 수 있는 거야. 나도 예전 일들을 수없이 돌이켜 보고는 해. 그러면 후회스러운 일들이 떠오르지. 하지만 말이야, 내가 절대로 후회하지 않는 것들도 있어. 그때 바깥 세상으로 나온 것도 후회하지 않는 몇 안 되는 일들 중 하나야." - P18

혼자서는 코뿔소가 될 수 없었다. 노든이 코끼리로 살 수 있었던 것은 코끼리들이 있었기 때문이고, 코뿔소가 되기 위해서는 다른 코뿔소들이 있어야만 했다. 다른 코뿔소들은 멀리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노든을 코뿔소답게 만들었다. - P22

그날 밤, 노든과 치쿠는 잠들지 못했다.
노든은 악몽을 꿀까 봐 무서워서 잠들지 못하는 날은, 밤이 더 길어진다고 말하곤 했다. 이후로도 그들에게는 긴긴밤이 계속되었다. - P57

나는 물속에서 느낀 것을 노든에게 설명할 수 없는 것이, 그리고 노든과 내가 다르다는 것이 너무 서운했다.
"그치만 나한테는 노든밖에 없단 말이에요."
"나도 그래."
눈을 떨구고 있던 노든이 대답했다.
그때 노든의 대답이 얼마나 기적적인 것이었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것이 다른 우리가 서로밖에 없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그때는 몰랐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모든 것이 기적이었다. 윔보와 치쿠가 버려진 알을 품어 준 것부터, 전쟁 속에서 윔보가 온몸으로 알을 지켜 내 준 것, 치쿠가 노든을 만나 동물원에서 도망 나온 것, 마지막 순간까지 치쿠가 알을 품어 준 것, 그리고 그 마지막 순간에 노든이 있어 주었던 것……. 모든 것이 기적이라는 단어로밖에는 설명할 수 없었다. - P94

"다른 펭귄들도 노든처럼 나를 알아봐 줄까요?"
"누구든 너를 좋아하게 되면, 네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어. 아마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너를 관찰하겠지. 하지만 점점 너를 좋아하게 되어서 너를 눈여겨보게 되고, 네가 가까이 있을 때는 어떤 냄새가 나는지 알게 될 거고, 네가 걸을 때는 어떤 소리가 나는지에도 귀 기울이게 될 거야. 그게 바로 너야." - P99

"너는 이미 훌륭한 코뿔소야. 그러니 이제 훌륭한 펭귄이 되는 일만 남았네." - P115

나는 절벽 위에서 한참 동안 파란 세상을 내려다보았다. 바다는 너무나 거대했지만, 우리는 너무나 작았다. 바다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웠지만, 우리는 엉망진창이었다.
나는 세상에 마지막 하나 남은 흰바위코뿔소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가족을 위해 목숨을 걸고 뛰어나간 노든의 아내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직 죽지 않은 연인을 뒤로하고 알을 데리고 도망쳐 나오던 치쿠의 심정을, 그리고 치쿠와 눈을 마주쳤던 윔보의 마음을, 혼자 탈출하면 무슨 재미가 있겠느냐던 앙가부의 마음을, 코끼리들과 작별을 결심하던 노든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 P124

두려웠다. 하지만 나는 내가 저 바닷물 속으로 곧 들어갈 것을, 모험을 떠나게 될 것을, 홀로 수많은 긴긴밤을 견뎌 내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긴긴밤 하늘에 반짝이는 별처럼 빛나는 무언가를 찾을 것이다.
어쩌면 언젠가, 다시 노든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내 냄새, 말투, 걸음걸이만으로 노든은 나를 알아보고 내게 다가와 줄 것이다. 코뿔소를 한 번도 본적이 없는 다른 펭귄들은 무서워서 도망가겠지만, 나는 노든을 알아볼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코와 부리를 맞대고 다시 인사할 것이다. - P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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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복의 성자
아룬다티 로이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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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복의 성자>는 히즈라인 안줌의 이야기로 시작해서 사담, 비플랍, 나가, 틸로, 무사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결코 행복할 수 없을 거라는 님모의 말에도 불구하고 잔나트 게스트하우스와 장례식장으로 자신의 꿈을 이뤄나가는 안줌과 아버지가 죽던 날을 잊지 못하고 복수심으로 살아왔던 사담, 자신의 현실과 사랑하는 상대 틸로 사이에서 계속해서 방황했던 비플랍과 나가, ‘안식처로만 살아오다 비로소 안식을 느끼게 된 틸로, 수많은 상실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투쟁했던 무사. 이 외에도 여기 나오는 인물들은 잠깐의 등장일지어도 그 존재감이 상당하다. 끔찍한 고문 끝에 사람들이 지켜보는 공중화장실에서 죽어갔던 남자, 자신만의 저항 행위로 고통을 내보이지 않으려 했던 소년과 굴레즈 대장으로 죽어간 굴카크, 자신의 총으로 살고 죽을 수밖에 없었던 아기의 생모 레바티, 심지어 굴카크의 주머니에서 꺼내져 물속으로 던져졌던 새끼 고양이 한 마리까지. 많은 이들이 죽고 많은 이들이 살아가는 이 이야기는 여전히 진행중이라는 점에서 우리의 마음을 섬뜩하게 한다.

 

절망이 동이 나지 않는 세상, 고가도로 위와 밑이 다른 세상, 차별과 폭력이 잔존하는 세상, 아자디(‘자유혹은 독립’)를 위해 싸우는 세상, 그래서 두 번 죽어야 하는 세상, 죽은 자만이 자유로운 세상. 그런 세상에서 사람들은 여전히 살아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꿈을 이룬 안줌과 사랑으로 마음이 평온해진 사담, 비로소 안식을 느끼게 된 틸로처럼 결국엔 모든 게 다 괜찮아지길 바라고 있다. 미스 우다야 제빈이 왔다는 말로 끝맺는 이 소설은 그런 희망을 계속해서 품고 있다. 



독수리들은 디클로페낙 중독으로 죽었다. 소의 통증 완화와 우유 생산량 증가를 위한 근육이완제로 사용되는 소 아스피린 디클로페낙은 흰등독수리들에게 신경가스처럼 작용한다―작용했다. 화학적으로 근육이 이완된 젖소나 물소가 죽으면 유독한 독수리 미끼가 된다. 소들이 더 성능 좋은 낙농 기계가 되고, 도시가 아이스크림과 버터스카치 크런치와 땅콩 크림 초코바와 초콜릿칩을 더 많이 먹고 망고 밀크셰이크를 더 많이 마시는 동안, 독수리들은 피곤해서 깨어 있을 수가 없다는 듯 모가지를 늘어뜨리기 시작했다. 부리에서 침이 은구슬처럼 뚝뚝 떨어졌고, 독수리들은 한 마리씩 죽어서 나뭇가지 아래로 떨어졌다.
그 정다운 옛 새들의 소멸을 알아챈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고대해야 할 다른 것들이 너무 많았으니까. - P11

그녀는 ‘필요’가 상당량의 잔혹함을 수용할 수 있는 창고임을 경험을 통해 배워왔다. - P17

우리의 세계에서 정상성은 삶은 달걀과 약간 비슷하다. 그 단조로운 껍질 속 중심부에 지독한 폭력성을 지닌 노른자가 들어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우리처럼 복잡하고 다양한 사람들이 계속 공존하기 위한―계속 함께 살면서 서로를 참아내고, 그러다 이따금 서로를 살해하기 위한―규칙들을 정하는 건, 우리가 그 폭력성에 대해 늘 느끼는 불안감, 그것이 과거에 행한 일들에 대한 기억, 그것이 미래에 발현할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중심부가 흔들리지 않는 한, 노른자가 흘러나오지 않는 한 우리는 괜찮을 것이다. 위기의 순간에는 장기적인 관점을 취하는 것이 좋다. - P201

그건 카슈미르의 함성이었다. 정치적 요구 이상의 것이었다. 찬가이자 성가였고, 기도였다. 아이러니한 건 카슈미르인 네 명을 한방에 넣어놓고 아자디가 정확히 무슨 뜻인지 명시하라고, 그 이념적, 지리적 윤곽을 정확히 그려보라고 하면 결국 그들이 서로의 목을 따는 상황이―그때든 지금이든―연출되리란 점이다. 그러나 그걸 불명료함이라고 결론 내린다면 잘못이 될 터였다. 그들의 문제는 불명료함이 아니었다. 정말로. 그건 현대 지정학의 언어 바깥에 존재하는 끔찍한 명료함에 가까웠다. 분쟁의 각 진영에 속한 모든 주역들은, 특히 우리는, 이 단층선을 무자비하게 이용했다. 이 단층선은 완벽한 전쟁―결코 승리하거나 패할 수 없는 전쟁, 끝이 없는 전쟁―에 제격이었다. - P241

인도군이 방글라데시를 해방시켰을 때, 선량하신 카슈미르인들은 그걸 ‘다카(방글라데시의 수도)의 함락’이라고 불렀다―여전히 그렇게 부르고 있다. 그들은 타인의 고통은 잘 헤아리지 못한다. 하긴 누군들 안 그렇겠는가? 파키스탄 때문에 고통받는 발루치족은 카슈미르인들에게 마음을 쓰지 않는다. 우리가 해방시켜준 방글라데시인들은 힌두교도를 박해한다. 선량하신 공산주의자들은 스탈린의 강제노동수용소를 ‘혁명의 불가피한 부분’이라고 부른다. 미국인들은 현재 베트남 사람들에게 인권에 대해 설교하고 있다.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는 인간이라는 종 전체의 문제다. 우리 중 누구도 예외가 아니다. 그리고 요즘 아주 크게 부상한 다른 문제도 있다. 사람들―공동체, 계급, 민족, 그리고 심지어 국가까지도―은 자신들의 비극적인 역사와 불행을 트로피처럼, 혹은 시장에서 사고팔 수 있는 상품처럼 지니고 다닌다. - P259

그녀는 사람이 죽은 후에도 머리칼과 손발톱이 계속 자라난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났다. 별들이 죽은 후에도 오랜 시간 우주를 가로질러 날아오는 별빛처럼. 도시들처럼. 도시들은 자신이 약탈한 행성이 주변에서 죽어가는 동안 삶이라는 환상을 가장하며 활기차게 비등한다. - P286

나가는 틸로가 그도, 그녀도 어찌해볼 수 없는 조류를 따라 부유하고 있음을 감지했다. 그는 틸로의 동요가, 그녀가 강박적으로, 그리고 점점 더 위험하게 도시를 배회하는 것이 정신에 이상이 생긴 신호인지 아니면 극히 예민하고 위험천만한 제정신의 발동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면 그 둘은 같은 것일까? - P289

그들이 도착했을 때 어머니는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녀는 들을 수 없는 곳에, 역사, 편견, 사과가 미치지 못하는 곳에 있었다. 틸로는 침대에 웅크리고 앉아 어머니의 발에 얼굴을 댔고 어머니의 발이 차가워질 때까지 그대로 있었다. 부서진 의자가 우울한 천사처럼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틸로는 의자가 무엇을 할지 어머니가 어떻게 알았을까 궁금했다. 그걸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부서진 의자들은 잊어. 그것들은 늘 얼쩡거리지. - P337

그녀는 해방되지 않은 영혼이, 화장용 장작더미 위에 놓인 영혼 모양의 돌이 어떻게 생겼을지 궁금했다. 어쩌면 불가사리를 닮았을지도. 아니면 노래기. 아니면 살아 있는 몸뚱이와 돌로 된 날개를 가진 얼룩무늬 나방―불쌍한 나방―날아가는 데 도움이 되라고 만들어진 부위 때문에 꼼짝을 못하는 배신당한 나방. - P344

어디에서 멈춰야 할지, 어떻게 계속 나아가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멈추지 말아야 할 때 멈춘다. 멈춰야 할 때 나아간다. 나는 지쳤다. 하지만 저항심 또한 있다. 그 두 가지가 함께 요즘의 나를 규정한다. 그 두 가지가 함께 나의 잠을 훔치고, 그 두 가지가 함께 내 영혼을 회복시킨다. 눈에 보이는 해결책이 없는 문제들이 많다. 친구들이 적으로 변한다. 목소리 큰 이들은 안 그럴지라도, 조용하고 과묵한 이들은. 하지만 적이 친구로 변하는 건 아직 보지 못했다. 희망이 없는 듯하다. 그러나 희망에 차 있는 것처럼 가장하는 것이 우리가 가진 유일한 품위…… - P356

"그들이 어떻게 나를 또 죽일 수 있겠어? 넌 이미 내 장례식에 다녀왔어. 이미 내 무덤에 꽃을 갖다놨고. 그들이 나에게 더이상 무슨 짓을 할 수 있겠어? 난 한낮의 그림자야. 난 존재하지 않아."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그가 가볍게, 농담처럼, 하지만 비통한 눈빛으로 한 이야기가 있었다. 그 말에 그녀는 피가 얼어붙었다.
"요즘 카슈미르에서는 생존하기 위해 죽임을 당할 수도 있지."
전쟁터에서 사기를 꺾을 수 있는 건 적이 아니라고, 오직 친구만이 그럴 수 있다고 무사는 틸로에게 말했다. - P357

카슈미르에서 아침에 일어나 "굿 모닝Morning"이라고 인사할 때 그 말의 진짜 뜻은 "굿 모닝Mourning(좋은 애도)"이다. - P371

요즘은 황소가 개인지 아닌지, 옥수수가 사실은 돼지 다리인지 비프스테이크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요. 하지만 어쩌면 그게 진정한 현대성으로 가는 길인지도 모르죠. 하기야 유리가 고슴도치가 되고, 산울타리가 에티켓 안내서가 되어선 안 될 이유가 어디 있겠어요? - P396

그리고 그들은 내 말이 진실임을 알기에 내 말을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 제임스 볼드윈 - P407

우리는 당신들의 내일을 위해 우리의 오늘을 바쳤다. - P410

모든 곳에 죽음이 있었다. 죽음은 모든 것이었다. 경력. 욕망. 꿈. 시. 사랑. 젊음 그 자체. 죽음은 또다른 방식의 삶이 되었다. 묘지들이 공원과 초원에, 개울가와 강가에, 들판과 숲속 빈터에 생겨났다. 무덤들이 아이 이빨처럼 땅에서 솟아났다. 모든 마을, 모든 지역에 묘지가 만들어졌다. (...) 자루에 담겨 옮겨지는 시체들도 있었고, 신체의 일부, 머리칼과 치아가 작은 비닐봉지에 담겨서 오는 경우도 있었다. 시체 보급원들이 그 봉지들에 이런 메모를 붙였다. 1kg, 2.7kg, 500g. (그렇다, 이 또한 루머에 불과했어야 마땅한 진실 가운데 하나였다.) - P415

어떤 나라들에서 어떤 군인들은 두 번 죽는다.
머리 없는 기념상은 마을 입구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비록 이제 그 기념상은 애초에 기리고자 했던 사람의 모습과 닮은 데가 없었지만, 결과적으로 그 시대를 더 진실하게 보여주는 상징물이 되었다. - P420

일부 카슈미르인들도 두 번 죽는다.
총성은 거리가 텅 비고 나서야 멎었다. 그리고 남은 것은 죽거나 다친 몸뚱이들, 그리고 신발들뿐이었다. 수천 개의 신발들. - P427

문제의 폭발음은 옆 도로에서 빈 망고 프루티(인도의 망고 음료 상표) 용기가 승용차에 깔리면서 난 소리임이 후에 밝혀졌다. 누구 탓을 하겠는가? 망고 프루티(신선하고 진한) 용기를 길에 버린 사람? 인도? 카슈미르? 파키스탄? 승용차 운전자? 대학살의 원인을 밝히기 위한 조사 위원회가 설립되었다. 하지만 사실들은 입증되지 못했다. 아무도 책임질 사람이 없었다. 그게 카슈미르였다. 그건 카슈미르 탓이었다.
삶은 계속되었다. 죽음도 계속되었다. 전쟁도 계속되었다. - P428

무사 예스위가 아내와 딸을 묻는 걸 지켜본 사람들은 그날 그가 얼마나 조용했는지 알았다. 그는 슬픔을 내보이지 않았다. 그는 진짜로 그곳에 있지 않은 사람처럼, 정신이 다른 곳에 침잠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게 결국 그의 체포로 이어진 것일지도 몰랐다. 아니면 그의 심장박동이 원인이었을 수도 있었다. 무고한 시민이라기엔 심장박동이 너무 빠르거나 아니면 너무 느려서. 가끔 악명 높은 검문소에서는 군인들이 청년들의 가슴에 귀를 대고 심장박동을 듣기도 했다. 어떤 군인들은 청진기를 들고 다닌다는 소문도 있었다. "이 사람 심장은 자유를 위해 뛰는군." 그들은 그렇게 말했고 그것이 지나치게 빠르거나 느린 심장을 가진 몸을 카슈미르밸리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심문센터인 카르고나 파파 2, 시라즈 영화관으로 보낼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 P428

도시를 빙 둘러싼 높은 산에서 내려다보는 사람에겐 장례 행렬이 여왕개미를 먹여 살리기 위해 열일곱 더하기 한 개의 설탕 알갱이를 들고 개미집으로 가고 있는 갈색 개미들의 행렬처럼 보일 터였다. 어쩌면 역사와 인간 갈등을 공부하는 학생에겐, 상대적 관점에서 볼 때, 그 작은 행렬은 정말로 높은 테이블에서 떨어진 음식 부스러기를 들고 급히 달아나는 개미들의 행렬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건 전쟁으로 치면 작은 것이었다. 아무도 크게 주목하지 않았다. 그래서 계속 이어졌다. 그래서 불안정한 포옹으로 사람들을 그러안으며 수십 년 동안 접혔다 펼쳐졌다 했다. 그러한 잔혹성들은 변화하는 계절처럼 자연스러운 것이 되었다―각각 고유의 독특한 향기와 꽃들, 고유의 죽음과 부활의 주기, 혼란과 정상상태, 폭동과 선거를 지니고 찾아오는. - P429

관들은 바닥에 내려졌고, 뚜껑이 열렸고, 얼어붙은 땅 위에 일렬로 정렬되었다. 조문객들이 기자들에게 정중히 자리를 내주었다. 기자들과 사진들이 없으면 대학살은 지워지고 죽은 이들은 진정으로 죽을 것임을 알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희망과 분노를 품고 기자들에게 시신들을 넘겼다. 죽음의 연회. 뒤로 물러섰던 유족들은 사진에 나오도록 관 가까이로 와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들의 슬픔도 기록되어야 하니까. 몇 년 후 전쟁이 삶의 한 방식이 되었을 때, 카슈미르의 슬픔과 상실을 주제로 한 책과 영화, 사진전 들이 생겨날 터였다. - P430

넌 진짜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했지만, 난 이제 무엇이 진짜인지 모르겠구나. 진짜였던 것이 이젠 유치한 동화처럼 들려―내가 너에게 들려주곤 했고 네가 참을 수 없어하던 그런 이야기들처럼. 내가 확실히 아는 건 이것뿐이야. 우리 카슈미르에서는 죽은 사람들이 영원히 살게 된다는 것, 그리고 살아 있는 사람들은 살아 있는 척하는 죽은 사람들일 뿐이라는 것. - P451

(그날 넌 고양이에게 빵 조각을 줬는데 그 고양이가 너를 믿지 못하고 빵을 거부해서 화가 났지. 바바자나, 우리 모두가 조금은 그 고양이처럼 되어가는 것 같다. 우린 아무도 믿을 수가 없어. 사람들이 우리에게 건네는 빵은 우리를 노예나 아첨하는 종으로 만드는 것이기에 위험하지. 그렇다면 넌 우리 모두에게 화를 내겠구나.) (...) 겨울엔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송이를 생각해야겠구나. 우리가 눈송이를 세던 거 기억하니? 네가 눈송이를 잡으려고 했던 거 기억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십만 명이란다. 네 장례식 때 사람들이 눈처럼 땅을 덮었지. - P453

전설적인 카슈미르밸리의 모든 곳에서 사람들은 무엇을 하든―걷거나, 기도하거나, 목욕하거나, 농담하거나, 호두를 까거나, 섹스를 하거나, 버스를 타고 집에 가거나―군인의 총 조준기 안에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군인의 총 조준기 안에 있었기에 무엇을 하고 있든―걷거나, 기도하거나, 목욕하거나, 농담하거나, 호두를 까거나, 섹스를 하거나, 버스를 타고 집에 가거나―합법적인 표적이었다. - P457

그녀에겐 카슈미르에서 악몽이란 난잡한 것이라고 말해줄 관광 가이드가 없었다. 카슈미르의 악몽은 제 주인에게 불충하고, 제멋대로 옆으로 재주넘기를 하여 다른 사람들 꿈속으로 들어가며, 각자의 구역을 인정하지 않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매복 예술가였다. 그 어떤 요새나 울타리도 그걸 막을 순 없었다. 카슈미르에서 악몽에 대처하는 유일한 방법은 옛친구처럼 껴안고 옛 적처럼 다루는 것이었다. 물론 틸로도 그걸 배우게 될 터였다. 곧. - P462

"카슈미르에서는 거의 모든 모우트들이 죽임을 당했어. 명령에 복종하는 법을 모르기 때문에 제일 먼저 죽임을 당한 거야. 어쩌면 그래서 우리에겐 그들이 필요한지도 몰라. 우리에게 자유로울 수 있는 법을 가르쳐주니까."
"혹은 죽임을 당하는 법이나?"
"여기선 똑같은 의미야. 오직 죽은 자만이 자유로우니까." - P468

"우둔화…… 멍청이화…… 만약 그걸 성취할 수 있다면 그때…… 그건 우리에게 구원이 될 거야. 그것이 우리를 패배할 수 없는 존재로 만들어줄 테니까. 그것은 일단 우리에게 구원이 되고 그다음에…… 우리가 승리한 후에는…… 우리에게 천벌이 될 거야. 먼저 아자디를 얻고, 그다음엔 전멸. 그게 전형적인 패턴이지." - P487

늘 그렇듯, 역사는 과거에 대한 연구인 것만큼이나 미래에 대한 계시가 될 것이었다. - P526

차들이 20차선을 쌩쌩 달리고 양옆으로 강철과 유리로 된 고층 빌딩들이 들어서고 있는, 밀밭만큼 넓고 ‘오줌을 누는 게 불가능한’ 고가도로를 달렸다. 하지만 출구로 빠지자 고가도로 밑은 완전히 딴 세상임을 알 수 있었다―도로포장도 안 되어 있고, 차선도 없고, 가로등도 없고, 통제도 안 되는 거칠고 위험한 세상에서 버스, 트럭, 거세한 황소, 릭샤, 사이클, 손수레, 보행자 들이 생존을 위한 아귀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한 종류의 세상이 굳이 성가시게 멈추어 알은체하지 않고 다른 종류의 세상 위를 날아갔다. - P536

한 눈을 잃은 청년들이 나머지 한 눈마저 잃을 각오로 다시 거리로 나선다. 그런 분노를 무슨 수로 막을 수 있겠는가? - P562

"결국 자네들이 옳을지도 몰라." 내가 부엌에서 그에게 말했다. "자네들이 옳을지도 모르지만, 결코 이길 수는 없을 거야."
"나는 그 반대라고 생각하는데." 그가 근사한 로간 조시 냄새가 올라오는 냄비를 저으며 미소 띤 얼굴로 대꾸했다. "결국 우리가 틀린 것으로 판명될지도 모르지만, 우린 벌써 이겼어."
나는 더 이상 응수하지 않았다. 나는 인도 정부가 그 작은 땅덩어리를 지키기 위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그가 알고 있었으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카슈미르는 1990년대의 상황을 학예회로 보이게 만들 정도의 무시무시한 피바다로 변할지도 모른다. 다른 한편으로는, 어쩌면 카슈미르인들이 얼마만큼 자멸적으로 변할 각오가 되었는지에 대해 내가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 맞든, 위험은 그 어느 때보다 높았다. 어쩌면 우리는 ‘이긴다’는 것의 의미를 서로 다르게 이해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 P564

"언젠가는 카슈미르도 그런 식으로 인도를 자폭하게 만들 거야. 그때쯤 너희는 공기총으로 우리 모두를, 한 사람도 빠짐없이 전부 눈이 멀게 만들어버렸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눈이 성한 너희들은 너희가 우리에게 한 짓을 볼 수 있을 거야. 너희는 우리를 파괴하고 있는 게 아냐. 일으켜세우고 있는 거지. 너희가 파괴하고 있는 건 너희들 자신이야. 쿠다 하피즈, 가슨 씨." - P5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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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 산책 연습
박솔뫼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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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다 읽고 나서 지나온 역사뿐만 아니라 앞으로 내가 꿈꾸는 나의 삶에 대해서도 정해진 미래라는 걸 생각하게 되었다. 여러 번 반복하여 익히고 걸치고 입어버리면 어느 순간 겪어버릴지 모를, 그렇게 익숙해진 미래를 손에 만져본 적 있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 그것을 위안으로 삼고 오늘을 살아가야겠다고 다짐했다.

 

스스로를 마치 다른 사람인 것처럼 생각하며 걷던 수미와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던 윤미 언니 그리고 절대로 모욕당한 게 아니라고 믿으며 버텼던 최명환이 내가 힘들 때마다 기억 저 언저리에서 떠올라 나를 도와줄 것이다. 그렇게 계속해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빗나갈 것을 생각하지 않고 그것이 정해진 미래라고 우리는 미래에 마주앉아 서로의 이야기를 듣게 될 것이라고 그것을 여러 번 반복하여 익히고 걸치고 입어버리면 나는 그 순간을 어느 순간 겪어버릴지 모른다. 미래에 익숙해지고 미래를 손에 만져본 적이 있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고 나서는 문을 열고 나가 하던 일을 가던 길을 이어나갈 것이다. - P17

과거의 사람들이 가져오려 애쓰던 미래는 여전히 미래로 여겨지고 내가 그리는 미래도 미래에는 다시 되살리고 싶은 미래가 될 것이다. 원하는 미래를 그리고 손으로 만져보기 위해 어떤 시간을 반복해야 할까. 나는 그것을 우선 어딘가에 써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 P18

이 부분을 읽다가 현재와 미래를 생각하는 사람들 와야 할 것들을 끊임없이 생각하고 지금에서 그것을 지치지 않고 찾아내는 사람들은 이미 미래를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시간을 끊임없이 바라보고 와야 할 것들에 몰두하고 사람들의 얼굴에서 무언가를 찾아내고자 하는 이들은 와야 할 것이라 믿는 것들을 이미 연습을 통해 살고 있을 것이라고. 어떤 시간들은 뭉쳐지고 합해지고 늘어나고 누워 있고 미래는 꼭 다음에 일어날 것이 아니고 과거는 꼭 지난 시간은 아니에요. - P91

그들이 반복한 것은 그때 그들이 그곳에 있었다면이 아니라 그때 그곳에 누군가 있었다는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의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미국이 자신들의 책임을 인정하는 미래를 연습하였을지는 알 수 없었다. 아마도 그들은 그런 미래를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어땠을지는 알 수 없지만 끝을 내고 매듭을 지어버리는 일, 다음을 생각하지 않는 일이 필요할 때가 있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왜인지 그들이 새로운 세계를 스스로 믿고 살아내어 미래를 현재로 끌어당겨 반복하여왔을 것이라는 짐작은 계속되었다. - P92

그들이 손으로 만지고 반복한 미래는 어떤 것이었을지 다시 생각하다가 그것을 묻고 되묻고 답하고 다시 묻는다면 끌어온 미래도 이미 일어난 과거로 혹은 지금 살아가는 현재로 믿을 수 있는가. - P96

나를 둘러싼 어른들이 올바르고 불의를 외면하지 않는 어른들이기를 바랐다. 이제는 스스로 그러한 어른이 되는 길을 걷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P100

길을 건너면 다가오는 바다는 나를 휘감고 어쩐지 너는 이렇게 걷다가 사라지게 될 거야 사라지는 것은 아니고 다른 방법이 없는 것처럼 잠이 들게 될 거야 말하는 것 같았다. 잠이 들면요? 눈을 뜨면 다음날이 되고 다시 걷고 너는 그 일을 반복하게 된다. 대체 어디서요? 나에게는 그것이 중요했다. - P111

새로운 사람을 만나지 못하더라도 스스로를 마치 다른 사람인 것처럼 생각하며 걸었다. 그렇게 나와 비슷하지만 내가 아닌 사람들을 그리워하면서 곧 사라질 사람들이 된 것처럼 스스로를 여기며 걸었고 나는 그런 식으로 살아왔다는 생각 그러나 나에게는 그것이 늘 때로는 그것만이 생생했다. - P124

내가 알게 될 뻔한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일들을 입안에 머금은 채 가끔 침을 모아 삼켰다. 삼켜지지 않으면 괴로운 표정으로 걷다 물을 마셨다. 그러다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이야기를 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 P124

지금도 나는 누군가 죽어도 좋다는 이야기/ 어떤 사람들은 나라에서 쓸어버려도 좋다는 이야기/ 부족하고 모자라 보이는 사람들은 흐름에서 탈락되어 죽어버려도 좋다는 이야기/ 그런 사람들은 폐를 끼치지 말고 얼른 죽어버려야 한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어쩌면 매일 내가 듣는 것은 보는 것은 얼른 그것을 행하라는 사인일지 모르겠고 우리가 공평하고 공정하게 두 손에 각각 빵 하나씩을 쥐기 위해서는 그러니까 누구도 빵을 세 개 쥐어서는 안 되고 손이 없는 자는 손을 내밀 수 없으므로 그것을 위해 새로운 방법을 만드는 것은 낭비이고 새로운 방법을 만드는 동안 실수가 생길지 모르므로 손이 없는 자가 빵을 가지지 못하는 것은 안타깝지만 당연한 것이고 그래야만 한다고 세상 모든 곳에서 외치고 있는 것 같았다. - P149

티보가의 사람들에게 자크에게 앙투안느에게 의지하고 싶었고 실제로 의지하고 있었다. 나는 오랫동안 자크를 보고 있었고 자크도 나를 믿을 것이다.
내가 부산에서 휴일의 며칠을 보내고 있던 사이 자크는 어느새 제네바로 가 있었고 혁명가의 일원이 되어 있었다. 기사를 쓰며 돈을 버는 자크는 제네바의 여름 한낮을 걷는다. 나는 20세기 초의 내리쬐는 햇빛은 지금과 다를 것인지 분명히 다르겠지만 그럼에도 계절의 묘사는 어느 때고 생생하다는 생각을 했고 그런 생각을 하자 내일 아침 창으로 쏟아져내릴 햇살이 미리 손에 쥐여진 것 같았다. 자크가 걷는 여름의 제네바가 한밤의 내가 있는 곳으로 순간적으로 머물다 가고 시간이 지난 후 어느 날 나는 제네바의 여름 한낮이 예고 없이 다시 또 나를 찾아오리라는 것을 예감했다. 나는 그 순간들과 함께 누워 있었고 생생하게 닥쳐오는 책 속 사람들을 생각했고 그러다보면 그 공기 안에서 잠이 들 수 있었다. - P151

내가 보았던 사쿠라이 다이조의 연극 중에는 ‘미래 기억’이라는 말이 들어가는 연극이 있었다. 일본어로 진행되는 공연이었기 때문에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나는 그 제목을 가끔 떠올렸다. 그러니까 다른 시간을 살 수 있었다. 미래를 살고 와야 할 것을 살아낸다면 미래를 기억이 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보고자 하는 것을 미래를 기억이 되도록 살아가고 있을 때 어느 날 그것이 보인다면 그럼에도 그것은 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은 아니고 새로운 미래로 우리 앞에 벌어지는 일이 될 것이다. - P153

책벌레 멘델이 나오는 츠바이크의 단편을 읽었다. 책벌레 멘델은 보통의 독서가의 수준으로 상상할 수 없는 많은 책을 읽고 알고 있었다. 그는 늘 카페 글루크에 앉아 자신의 세계에서 책을 만나고 그 세계는 정말로 견고하여 테이블을 두드리는 정도로는 타인의 존재를 알릴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에게 얼마나 다정하고 예의를 갖추었던가, 전쟁이 그들에게서 그러한 덕목을 앗아가기 전까지 말이다. 나는 멘델의 마지막을 기억하는 스포르쉴 부인의 손을 내 두 손으로 잡고 거기에 이마를 대고 잠들고 싶었다. 그러면 그 옆에는 앙투안느가 앉아 모두의 인생을 걱정하고 앞으로 모두들 어떻게 살아가면 좋을지 알려줄 것이다. 어쩐지 그 세계는 나를 사랑하던 개 두 마리가 살던 곳과 멀지 않을 것 같다. - P164

그가 해주는 이야기는 한편으로는 그가 감추는 이야기일 것이고 그가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모두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을 때 동시에 그것을 감추고 있을 것이다. - P167

80년 5월 27일 이후 사람들이 거리로 나와 물을 뿌리고 청소를 하던 모습을 담은 사진을 본 적이 있다. 빗자루를 들고 나서면 피가 거리에 흐를 것이다. 그 냄새와 공기와 광경을 모르고 모르고 모른다. 사람들은 청소를 하고 또 하고 거리는 서서히 이전과 같은 모습으로 돌아가지만. 많은 사람들은 학교로 돌아가고 회사로 돌아가지만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간다면 제자리로 돌아갈 수 없는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간다면 80년 6월은 80년 4월과 같은 곳인가 가망 없고 백치 같은 생각을 하고 - P192

81년의 82년의 시간이 광주에서 흐르고 있다는 사실이 80년 5월 이후에도 시간은 흐르고 사람들은 살아 있다는 사실이 동시에 시간은 흐르고 사람들은 이미 죽었다는 사실이 부산 미문화원에 불을 붙인 이들을 참을 수 없게 하였을 것이라고 짐작하면서 동시에 이 역시 착각일 수 있음을 생각하면서 창밖을 보면 열차는 목적지가 없고 열차는 끝없이 달릴 것 같고 끝없이가 과장이라면 열아홉 시간쯤 달릴 것 같다. 시간이 흐르는 것처럼 달릴 것 같다. - P193

나는 이전에 광주 전남 지역의 미술인들이 80년 겨울, ‘2000년을 위한 파티’를 열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2000년은 미래이고 무엇보다 뚜렷한 미래여야 하고 80년 겨울, 2000년의 미래를 스스로 익히고 삼켜내지 않으면 살아갈 힘이 없을지 모른다. 2000년은 광주의 진실이 알려진 미래이며 민주적인 미래이다. 서울의 부산의 대구의 대전의 제주도의 사람들은 80년 광주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다. 누가 그 일을 지시했는지 알고 있고 그들은 법의 심판을 받았다. 2000년은 그러한 미래이며 우리는 파티를 여는 동안 그러한 미래를 살고 있다. - P193

당연히도 지금 옥상에 올라와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강렬하고 선명한 주황색의 하늘이 이건 마치 끝이에요 지구는 이걸로 끝입니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하늘이 어두워지고 모두에게 익숙한 어둠이 찾아오면 우리는 또 이런 식으로 하루를 접었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그러다 어느 날 정말 끝을 보게 되고 그때가 되면 우리는 여러 번 연습한 끝을 익숙하게 맞이하게 될 것이다. - P211

괜찮은 사람이 되려면 한번 죽지 않으면 안 돼요, 누가 그런 소리를 마음속에서 속삭이는 것을 듣다가 한번 죽으면? 다시 태어나는 거야? 아니면? 죽은 사람이어야 하는 거야? 살아 있는 사람은 가망이 없다는 거야? 물으며 계단을 올랐다. - P215

언제나 그렇듯 순간순간 이해했다고 착각한 장면을 무척 좋아하면서 그것을 품은 채 다음 걸음을 향해 나아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 아마 이 책의 끝에는 사이토 마리코 선생님이 쓴 추천사가 들어갈 텐데 82년 부산을 산책하는 또다른 이야기가 소설을 다 읽은 분들에게 새로운 길을 보여줄 것이다. 그런데 걷다보면 이미 가보았던 길일 수도 있고 걸어도 걸어도 처음 가본 길일지도 모른다. 나도 그 산책을 여러 번 그려볼 것이다. 그런 것은 정말로 좋다. - P243

지금이라는 시간이 미래에도 과거에도 통한다는 것이 왜 이렇게 멋지고 동시에 슬픈 걸까. 그러나 "원하는 미래를 그리고 손으로 만져보기 위해 어떤 시간을 반복해야 할까"라고 작가는 묻는다. 그 해답을 찾으려 애쓰는 것쯤은 나도 할 수 있지 않을까?
현재란 단순히 지금이 아니라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누군가가 줄기차게 계속하고 있는 연습의 시간인지도 모른다. 박솔뫼의 상상력이 그것을 가시화한다. - P245

이제 열심히 늙어갈 수밖에 없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주 조금밖에 없다. 하지만 "옆으로 뛰는 어린 사람을 응원하고 어딘가로 잘 도착할 수 있을 거야 분명 제대로 도착할 거야 확실하게 말하고"라는 문장을 읽었을 때, 내가 누군가에게 걸고 싶은 말이 여기에 있다고 느꼈다. 그렇게 말하고 싶은 힘이 나에게 아직 남아있다는 사실에 놀랐고 그렇게 생각하게 해준 ‘이야기의 힘’에 진심으로 감사했다.
소설 속의 작가가 『티보가의 사람들』의 자크나 앙투안느를 친구처럼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물고기 뱃속으로 들어가서 도망갈 거야’라고 생각했던 수미나 ‘많은 것을 배우는 어른이 되게 도와달라’라고 기도했던 윤미 언니, 그리고 절대로 모욕당한 게 아니라고 믿으면서 달렸던 최명환을 아끼고 살아갈 것이다.
(...) 한 시대를 절실하게 살았던 사람들, 특히 여성들의 기억은 어느 시대의 어디에서든 누군가의 연습에 반드시 도움이 될 것이다. - P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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