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날마다 만우절
윤성희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7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명치에 물총을 쏴달라는 여자, 풍선 간판을 칼로 찢으며 그 순간을 좋아했던 스스로에게 환멸을 느끼던 남자, 0부터 9까지 심호흡을 하면서 온 힘을 다해 자신만의 역기를 드는 남자, 나도 모르는 내 영혼을 당신이 어떻게 아는 거냐며 꽃다발로 사람을 때리던 여자, 이상한 놈이 되는 건 버튼 하나로 왔다 갔다 하는 스위치 같은 거라던 삼촌.
우리는 그렇게 애를 써서 그냥 어른이 되었다. 어른이 된다는 건 생각보다 슬프고 외롭고 시시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런 우리에게 가끔은 얼음이 되어도 괜찮다고, 아무것도 안 해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이 한 마디는 따뜻한 위로가 된다.
오빠는 따뜻한 신발을 신고 눈길을 걸으면 뭐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자신감이 생긴다고 했다. 나는 따뜻한 신발을 신고 길을 걷다보면 낯선 곳으로 빨려들어갈 것만 같다고 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내 말을 들은 오빠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따뜻한 신발 덕분에 오빠는 자신감이 넘치는 청년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책임감 강한 아버지가 되었다. 따뜻한 신발을 신고 동화 속 주인공을 상상하던 나는 뭐가 되었을까?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적절한 단어를 떠올려보았다. 딱히 생각나지 않았다. - P55
이번이 여섯 번째네. 지금까지 살면서 나는 네 번의 절교와 한 번의 파혼을 당했다. 네 번의 절교와 한 번의 왕따를 당한 뒤 선물처럼 찾아온 단짝 친구의 죽음과 아버지의 죽음을 겪었다. 두 번이나 이직을 했고, 스트레스로 탈모를 겪기도 했다. 그리고 마침내 여섯 번째로 뼈가 부러지는 사고를 당했다. 그렇게 애를 써서 나는 그냥 어른이 되었다. 그 생각을 하자 헛웃음이 나왔다. 구급대원이 내 입에 귀를 가까이 대고 물었다. "뭐라고요? 방금 뭐라 말했나요?" 나는 간신히 대답했다. "추워요." - P59
나는 벤치 뒤에 웅크리고 앉아서 물총을 쏘는 아이에게 말했다. "할머니한테 한 번만 쏴줄래?" 아이가 어리둥절해했다. "더워서 그래. 여기에 맞혀봐." 나는 손가락으로 명치를 가리켰다. 아이가 머뭇거리더니 물총을 들었다. 다른 두 아이가 다가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이 할머니가 물총에 맞고 싶대." 아이가 친구들에게 말했다. 미끄럼틀 뒤에 숨어 있었던 아이가 그럼 그러자, 하고 대답했다. 그러고는 내 가슴을 향해 물총을 쏘았다. 차가웠다. 나머지 아이들도 따라서 물총을 쏘았다. 처음에 머뭇거리던 아이가 가장 신나게 총을 쏘았다. 옷이 흠뻑 젖었다. "이제 시원해요?" 아이들이 물었다. - P86
눈을 감았다 떴다. 똑딱. 빛이 지구를 일곱 바퀴 돌았을 것이다. 또 눈을 감았다 떴다. 똑딱. 그건 딸이 어렸을 때 내게 알려준 거였다. 엄마, 눈 한 번 깜빡일 시간에 빛이 지구를 일곱 바퀴나 돈대. 딸은 일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눈을 감았다 뜨곤 했다. 눈 깜빡할 시간. 그 시간에 빛이 지구를 몇 바퀴나 돈다고 생각하면 자신의 고민은 하찮게 느껴진다고 했다. - P96
사람들한테는 고시 공부중이라고 거짓말을 했지만 사실 아무것도 안 해요. 청년이 말했다. 나는 그래도 된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가만히 있는 것도 힘든 거라고. (...) 내가 사다리에서 떨어져 팔이 부러진 적이 있었거든요. 나는 청년에게 말했다. 그때 딸이 내게 말했다. 엄마, 얼음 하고 외쳐. 그래서 나는 얼음 하고 말했다. 삼십 분이 지나도 한 시간이 지나도 딸은 땡을 외쳐주지 않았다. 딸이 땡을 해주길 기다리면서 나는 종일 소파에 앉아 있었다. 저녁이 되었고 그제야 딸이 내 손을 잡으면서 땡 하고 말했다. 나는 화장실에 가서 시원하게 오줌을 누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아, 가끔 얼음이 되어야겠다고. 나는 청년에게 지금은 술래를 피해 얼음이 된 거라고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곧 누군가 땡 하고 외쳐줄 거라고. 얼음땡 놀이는 그런 거라고. 누군가 땡 하고 말해줘야 집에 갈 수 있는 거라고. 그러자 청년이 웃었다. 흐흐흐, 그렇게 웃었다. - P109
갑자기 화가 나기 시작했다. 화가 났는데 어떻게 화를 내야 할지 몰라 또 화가 났다. 나는 화를 낸 적이 없었다. 엄마는 작년에 담임선생님한테 그렇게 말했다. 화 한 번 낸 적 없는 착한 아들이라고. 엄마와 면담을 마친 선생님이 내게 말했다. 화를 내고 싶으면 내도 된다고. 그 말에 하마터면 나는 화가 나려고 하면 허벅지를 손으로 꼬집는다고 고백할 뻔했다. 손이 움직이지 않으니 허벅지를 꼬집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나는 시간을 거꾸로 돌리는 놀이를 했다. 어릴 때 엄마한테 혼나면 나는 방구석에 쪼그리고 앉아서 그 놀이를 했다. 열여섯 살인 나. 열다섯 살인 나. 열네 살인 나…… 그렇게 나이를 한 살씩 줄이다보니 어느새 갓난아이인 내가 보였다. 그 갓난아이를 다시 엄마의 뱃속으로 넣어보았다. 어둡고 축축한 곳으로. 지금 죽는다면 나는 평생 시시하게 살다 죽는 거겠지. 세상엔 시시한 게 많지만 그중 가장 시시한 건 나였다. 그 생각을 하자 눈물이 났다. - P187
어렸을 때 나는 풍선 간판을 몰래 찢은 적이 있었다. 부모님이 차린 김밥집이 망한 다음이었다. (그해 우리 가족은 지겹게 김밥을 먹었다. 누나는 투덜대며 안 먹었지만 나는 하루 세끼를 먹었다. 묵은지김밥. 그건 정말 맛있었다. 그렇게 맛있는데 왜 장사가 안된 걸까?) 그 자리에 피자집이 생겼다. 오픈 날 사람 모양의 커다란 풍선이 가게 앞에서 춤을 추었다. 두 팔을 흔들면서. 다음날 가보았더니 여전히 풍선이 춤을 추고 있었다. 그래서 그랬다. 우리가 망한 자리에서 풍선이 신나게 춤을 추어서. 풍선을 찢은 날 나는 일부러 비를 맞았다. 감기에 걸리고 싶어서. 풍선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렸을 때 통쾌한 기분이 들었는데 그런 내가 무서웠다. 아이가 찢은 의자에 앉으면 풍선 간판을 찢던 그때가 자꾸 생각났다. 그럴수록 거기에 앉았다. 내가 미워서. - P189
할머니가 왜 내게 숫자를 말해주었는지 알 것만 같았다. 배꼽에 힘을 주고 숫자를 외우라는 말. 그렇게 외우다보면 0부터 9까지 모든 숫자들이 혈관을 따라 내 몸을 돌고 도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발가락을 상상했다. 나는 흉터가 있는 오른쪽 종아리를 상상했다. 튀어나와 친구들의 놀림을 받는 배꼽을 상상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눈 코 입을 상상했다. 누나랑 나는 별명이 똑같았다. 단춧구멍. 아빠 빼고 우리 가족은 눈이 다 작았다. 그렇게 작은 눈인데…… 세상에, 눈꺼풀이 너무나 무거웠다. 이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릴 수만 있다면 앞으로 뭐든지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역도 선수가 되는 상상을 했다. 내 역기는 봉 양쪽에 동그란 눈꺼풀이 달려 있다. 십 킬로그램짜리 눈꺼풀이. 나는 역도 선수다. 나는 국가대표다. 나는 대회 결승전에 진출했다. 결승전 경기에 나선 나는 0부터 9까지 천천히 숫자를 세면서 심호흡을 한다. 그리고 숨을 멈추고 온 힘을 다해 역기를 든다. - P195
외로워서 감기에 걸리는 게 아니라 감기에 걸리니 외롭다는 생각이 드는 거라고. 며칠 후에 그 문장 아래에 누군가 이런 글을 적어놓았다.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었음.’ - P215
지하철역으로 들어가 열차를 기다리는데 젊은 여자 둘이 다가와 언니에게 영혼이 맑아 보인다는 말을 했다. "그 말에 갑자기 화가 났어. 나도 모르게 여자를 밀었지." 두 여자 중 한 여자가 넘어졌다. 언니는 들고 있던 꽃다발로 넘어진 여자의 얼굴을 때렸다. 붉은 장미가 떨어지고, 분홍 장미가 떨어지고, 노란 장미가 떨어지고, 마지막으로 안개꽃이 날렸다. 꽃다발을 휘두르면서 언니는 이렇게 소리쳤다고 한다. "니가 내 영혼을 어떻게 알아. 나도 모르는데." 언니는 미리를 낳을 때까지 매일 그 일을 복기하고 또 복기했다. 그런데도 자신이 왜 그랬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그날 이후…… 뭐랄까, 마음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것 같아. 블랙홀 같은 거. 조금만 잘못해도 그 안으로 빨려들어갈 것만 같았어." 언니는 말했다. - P247
그해, 휴가를 나와 같이 잠을 잤던 사흘 동안 삼촌은 군대에서 만난 이상한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었다. 듣다보면 정말 그렇게 나쁜 사람이 있을까 싶은 이야기투성이였다. 그렇게 이야기를 들려주다가 내가 잠을 자려고 하면 삼촌은 나를 흔들어 깨웠다. 왜? 잠결에 물으면 삼촌은 웃으면서 말했다. 인마, 불 꺼. 나는 졸린 걸 참고 간신히 일어나 스위치를 껐다. 불이 꺼졌다. 그러면 삼촌은 늘 이렇게 말했다. 스위치 같은 거야. 그렇게 이상한 놈이 되는 건. 버튼 하나로 왔다갔다하는 거지. 그러니 스위치를 잘 켜고 있어야 해. 그 말을 할 때 삼촌의 목소리는 비장했다. 마치 내게 그 이야기를 들려주러 온 사람처럼. - P27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