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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과 떨림
아멜리 노통브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두려움과 떨림>을 읽게 된 계기는 참 우습게도 작가의 얼굴때문이였다. 표지 뒷면에서 개구장이의 눈으로 웃고 있는 그녀. 미인형이라기보다는 세상에 대한 즐거움으로 가득한 이국의 처녀가 쓴 글은 과연 어떤 글일까 하는 호기심... 그리고 호기심에 만족이라도 시키듯 소설은 쉽고 재치있고 명확하며 깊은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소설을 덮는 순간 한 아이가 떠올랐다. 작가만큼이나 소년같은 눈을 가진 아름다운 후배가.
똑똑하고 누구 못지 않은 일의 열정도 가졌지만 회의 테이블에서 자신의 주장 한번 펴보지 못한 후배. 상사의 부당한 지시에도 항거하지 못한 후배. 그냥 나중에 대충 하자며 남자동료들이 내던져 놓은 일까지 결국 자기 손으로 해결해야했던 후배. 넌 뭐 그런 것 까지 신경 쓰니? 그냥 시키는 것만 하라는 여자동료들의 비아냥 섞인 동정을 들어가며 다음에 닥칠 문제점들을 미리 챙겨놓던 후배.
물론 <두려움과 떨림>은 페미니즘 소설도 아니고, 몸에 베인 군주제의 망령으로 수직적인 상하관계에서만 안심하는 일본의 정서를 비난하는 소설도 아니다. 그저 모든 사람들, 우리들이 가진 모든 인간 캐릭터에 관한 이야기이다.
뛰어난 능력을 가졌지만 화장실 청소부로 전락해 고층빌딩의 유리창으로 몸을 날리는 환상에 잠기는 주인공도, 자신이 수년에 걸려 올라온 자리를 단번에 뛰어넘으려는 주인공을 견제하는 여자상사도, 겉으로는 성질 나쁘고 무능해 보이나 사실은 마음이 여려 어느쪽도 편들고 싶어하지 않는 상사도, 세상에는 자기의 윗사람과 아랫사람 두종류의 사람만이 있다고 생각하는 상사도, 주인공의 능력을 인정하지만 이 조직을 와해시키고 싶지 않은 최고의 상사도... 그저 우리의 모습일 뿐이다.
문제는 아무렇지 않게 잘 굴러가고 있는 이런 인간의 톱니바퀴에서 어떻게 빠져나올것인가? 유리창아래로 추락하지 않고 어떻게 살아남을것인가? 그것이다. 그냥 자신도 톱니바퀴 속 하나의 나사로 머물지 않기 위해 <두려움과 떨림> 의 가면을 쓴 주인공.그래서 이 소설에 <진실과 재치>라는 또 다른 이름을 붙이고 싶다. 다른 사람이 내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면 나도 다른 사람을 괴롭히지 않고 함께 굴러갈 수 있다는 관계의 진실. 그 속에서 자신을 지켜내는 무기는 재기넘치는 유머와 재치라는 것.
내 후배는 아직 모든 상사와 동료의 끝자리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다. 그리고 아마 지금쯤 여의도 사무실 유리창아래 세상을 보며 담배라도 한대 피고 있을지... 그러나 나는 그녀가 <두려움과 떨림>의 주인공처럼 언젠가 그 별볼일 없는 톱니바퀴를 박차고 나와 자기만의 멋진 세상을 만들것이라 믿는다. 그녀의 눈이 아직 호기심과 재치로 가득찬 개구장이의 눈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