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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Q84 2 - 7月-9月 ㅣ 1Q8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9월
평점 :
하루키, 수많은 사람이 공유하면서도 이렇게 은밀히 나만의 것으로 여기는 작가도 드물 것이다. 그것이 스타의 특징인지도 모른다. 저 반짝거림이 마치 나를 위한 것처럼 위안을 주는 것이다. 일독하고, 다시 2, 4, 6, 8. 건너뜀을 하며 ‘덴고의 장’만을 읽고 있다. 이리 읽으니 하루키 특유의 건조함이 느껴진다. 이런 읽기를 다시 하는 이유는 개인적으로 이 책이 하루키의 소설과 덴고의 소설의 이중주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감상문 쓰기를 망설였지만, 내가 이리 읽어도 다른 이들이게는 다른 방식으로 반짝이는 작품이라 여기기에, 무릅쓰고 의견 교환을 기대하며 써내려간다.
작품의 큰 특징은 퍼시버와 리시버로 표현할 수 있는 영감과 표현, 즉 소설 쓰기이다. '총'이 등장하면 발사되는 것처럼, '소설'이라는 것이 주요 소제로 등장한 것은 그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다는 뜻이다. 또 하나 주요 테마는 '유토피가'가 현실에서 '종교'로 변질되는 과정이다. 폐쇄 공간에서의 소수가 어떻게 자신들의 영역을 지켜내는지, 외부의 것들과 어떻게 소통하는지를 '선구'와 '여명'을 통해 대비시켰고, 그것을 다시 소설쓰기와 맞물려서 2중주로 풀어가고 있다.
아오마메의 장은 하루키의 소설이면서도 덴고의 소설-이 부분이 덴고의 소설이라는 것은 순전히 내 개인적인 생각일 뿐이다-로 추리적인 기법이 많이 사용되어 또다른 긴장감으로 작품을 이끌고 있다. 전반부에 수도고속도로에서 빠져나가는 아오마메 부분은 확실히 '넘친다'라는 느낌이 들었다. 하루키는 자신이 만든 세계로 독자를 끌어들일 때 이렇게 묘한 암시들을 거의 채우지 않는 편이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는 ‘힘이 조금 많이 들어간듯, 매끈한 글래머 여성의 자신감 같다’ 라는 이질감이 들었다. 이 때문에 이런 나름대로 ‘덴고의 소설’이라고 규정하는 결과가 나왔을 것이다.
몇 개의 상징 중에 눈에 띄는 '리틀피플'의 시작은 후카에리이다. 폐쇄공간 속에서, 또다시 격리된 상황에서 만들어진 것이 숫자도 크기도 상관없는 '리틀피플'이다. 이것은 어쩌면 어린 아이의 꿈으로 치부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리 넘기기에는 마땅찮은 '공기 번데기'라는 실체를 가지고 있고 이것은 결국 '여명'이라는 종교단체를 낳았다. 하지만 이 실체라는 것이 과연 실체였을까?
아오마메 눈앞에서 움직인 시계와 같은 초자연적 현상은 결국 덴고에게도 두 개의 달로서 현실에서 나타나 리틀피플 역시 '실체'임을 주장하고 있다. 물론 그것은 하루키의 소설인 <<1Q84>> 속에서 가능한 실체이다. 1984년 속에서는 '공기 번데기' 같은 실체 없이도 종교는 무성하다. 그해는 빅브라더 대신 옴진리교가 세상에 나온 시기이다. 현실의 시간을 차용했을 뿐 그 정확한 시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지금 우리의 시간인 200Q로 읽어도 무방하다고 암시하고 있다.
뛰어난 퍼시버인 후카에리는 덴고를 통해서는 소설 '공기 번데기'를 낳았다. 하루키는 이 부분이 꽤 신경 쓰였을 것 같다. 화가의 소재가 그림인 경우가 많듯이, 소설가의 소재 역시 '소설'인 경우가 많다. 과연 쓰기란 무엇인가, '어떻게, 왜, 어떤 방식으로' 에 대해 하루키는 문장을 부풀리고 살을 빼고 하는 모습을 묘사하며 꽤 많은 공을 들여서 설명하고 있다. 쓴다는 것은 그렇게 개인이면서도 복수인 존재가 합작하는 작품이라는 듯이 말이다.
흔히 남성 작가들이게 영감을 주는 팜므파탈적인 여인 이상의 개념인 '퍼시버'라는 상태의 여인을 통해서 소설을 완성한 덴고는 이제 자신의 소설을 쓸 수 있는 자신감을 갖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어릴 적 추억의 대상인 '아오마메'가 주인공인 또 한 편의 소설을 완성시킨다. 하여 소설 속의 아오마메는 스스로 총의 방아쇠를 당겨도 무방하다. 이제 자신의 소설 밖인 1Q84의 시대에서 아오마메를 찾을 테니까 말이다. 그것은 10살에서 멈춘 과거와의 갭을 하나하나 매워나가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어쩌면 종교적 미흡함을 10살 정도로 규정하고 그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겠다는 뜻인지도 모른다. - 쓴다는 과정에서 조금 더 부언하면 후카에리의 최초의 리시버는 '선생의 딸'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날것으로 세상에 나올만한 것이 못 되었다. 우리가 흔히 아이디어라고 하며 던져지는 것들이 결과로 나오기 위해서는 '덴고'가 필요함을 새삼 생각해본다.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2부 후반부의 덴고가 아버지와 만나는 부분이다. 멀리 떨어진 병원 혹은 요양원은 하루키 소설에서 꽤나 등장하는 요소이다. 본류에서 살짝 벋어나서 기대 쉬는 곳, 정리하는 곳, 은둔하는 곳이다. 이야기의 주를 이르는 공간이 되기도 하고, 부수적인 곳으로도 등장한다. 이번에도 역시 그 공간에서 아버지와 아들, 하지만 진짜 아버지도 진짜 아들도 아닌 두 사람이 만난다. 하루키의 작품에서 지금처럼 아버지와 아들의 화해는 없었던 것 같다. 차라리 상징적인 아버지 살해는 태엽감는 새나 해변의 카프카에서 등에서 몇 번 나타났었다. 이제는 아버지와 화해하고 그 공허를 매울 것은 '내'가 된 것인가? 라는 느낌이다. 진짜 아버지와는 영영 화해하지 못하는 것일까?
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가 고베 지진을 축으로 했듯이 이 작품 속에서는 분명 '옴진리교'라는 사건이 배후에 깔려 있다. 하루키는 종교의 실체에 접근하기 보다는 그 현실적 상황에 접근하려는 모습이다. 종교의 탄생이라는 것은 은유로서, 순기능은 그들의 교리로 설명하고, 역기능은 아오마메와 노부인의 분노에서 시작하여 '종교'쪽에서의 변명으로써 슬쩍 훑고 지나갔다. 이 부분에서 그러한 부작용들은 모두 ‘공기번데기’ 속에서 탄생한 ‘분신, 도터’들일 뿐이다 라고 주장한다. 결정적으로는 개개인이 '종교'와 '소설'에 매료되는 부분이 빠져 있기는 한데 그것은 '빠져든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가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하루키 자신이 그것에 대해 명료하게 쓸 자신이 없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두 개의 달은 1Q84 속에서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실체를 아는 인간들만 보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동전의 양면이라기보다는 '그림자'로서, 달을 없애지 않는 이상 계속 위치한다. 그것은 하나의 밝음만이 아니다. 그 옆에서 보일 듯 말듯한 초록의 암울함도 늘 쌍 병립하는 것이다, 라는 의미로서.
장편에서 종종 보이던 우물도 이곳에는 빠져 있다. 우물은 안으로 움츠러들 때 나타나는 상징이라 여기는데, 이 소설에서는 주로 밖으로, 앞으로 진행되다 보니 안으로 반추할 기회는 도통 없었나보다. 전체적으로 꽤나 진지하게 앞으로 전진한 소설이라 느껴진다. 이후로도 경쾌한 단편과 수필을 기대해도 좋을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