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의 바다》를 읽는 동안 오래된 일기장을 몰래 들여다보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의 이해인 수녀는 따뜻하고 맑은 시를 쓰는 시인으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이 책 속에는 아직 젊고 서툴고 흔들리는 수도자의 모습이 담겨 있다. 그래서 더 인간적이고 더 가까이 다가왔다.이 책은 1976년 종신서원 전후에 기록한 일기와 묵상들을 모은 산문집이다. 부산 광안리 바다를 바라보며 기도하고 사색했던 시간들이 담겨 있다. 거창한 사건이 있는 책은 아니다. 하지만 한 사람의 진솔한 마음이 담겨 있어 오히려 더 깊은 울림을 준다.가장 먼저 마음에 남은 것은 민들레에 대한 기도였다.“당신 외엔 가진 것이 없는 아주 작은 민들레가 되게 해 주십시오.”이 문장을 읽으며 나는 문득 무엇을 그렇게 많이 가지려고 애쓰며 살아왔는지 생각하게 되었다. 민들레는 화려하지 않다. 하지만 어디서든 피어나고 바람을 타고 멀리까지 씨앗을 보낸다. 이해인 수녀는 그런 민들레처럼 살아가고 싶어 했다. 나 역시 더 높아지고 더 커지는 삶보다 내 자리에서 조용히 피어나는 삶을 꿈꾸게 되었다.여행에 대한 이야기도 인상 깊었다.수녀는 어디론가 끝없이 떠나고 싶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여행은 단순히 먼 곳으로 가는 여행이 아니다. 산과 들, 이웃의 얼굴 속에서 하느님의 흔적을 발견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었다. 읽으면서 나도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가 떠올랐다. 새로운 풍경을 보는 것도 좋지만, 결국 여행은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는 일이기 때문이다.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이해인 수녀의 솔직함이었다. 어느 수녀가 자신을 느리고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상처받기보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모습이 나온다. 사실 누구나 비판을 들으면 마음이 불편해진다. 그런데 그는 그것을 성장의 기회로 받아들인다. 그 겸손함이 참 아름답게 느껴졌다.옥상에 올라가 바라본 풍경을 적어 놓은 부분도 오래 기억에 남는다. 하얀 도라지꽃, 멀리 보이는 바다, 뛰노는 아이들, 수박을 흥정하는 사람들, 오래된 간판들.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이지만 그의 시선이 닿는 순간 하나의 시가 된다.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책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포도 이야기는 이 책 전체를 설명하는 문장처럼 느껴졌다.“저도 당신 안에서 익어 가는 영혼이 되게 하소서.”포도는 하루아침에 익지 않는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조급하게 서두른다고 성장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하고 기다리고 기도하며 천천히 익어 가는 것이다. 이해인 수녀의 글을 읽으며 나 역시 지금 이 순간에도 조금씩 익어 가고 있는 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해인의 바다》는 조용한 책이다. 하지만 그 고요함 속에는 깊은 힘이 있다. 책을 덮고 나면 마음 한구석이 맑아지는 느낌이 든다. 바쁘게 살아가느라 놓치고 있던 순수함과 감사함을 다시 떠올리게 해 주는 책이었다.가끔 삶이 복잡하게 느껴질 때, 마음이 시끄러울 때 다시 펼쳐 보고 싶은 책이다. 민들레처럼 소박하게, 포도처럼 천천히 익어 가며 살아가고 싶다는 마음을 남겨 준 아름다운 산문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