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
이주혜 지음 / 창비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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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 이주혜
<347p><별점 : 4>

씨발새끼가 사과도 않고 죽어버렸어.

잘못했다고 한마디 하는 게 뭐 그렇게 어렵나요? 입도 있는 새끼가!


대학생 선후배로 만나 가정을 이룬 석구와 나. 가정 경제의 책임을 지고 흔히 말하는 가장의 역할을 감당하고 살았다. 혜준의 곁에서 친구로 다정한 부모의 역할을 석구가 맡았다. 석구와 나는 학원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석구가 성추행범이자 스토커로 고소당하자 학원을 그만두고 쌩하니 집을 나갔다. 나에겐 사과 한마디 없이 자신은 사랑이었다는 말만 남겼다. 그 일의 여파로 학원 문을 닫고, 집을 팔아 빚을 청산하고 작은 오피스텔을 얻었다. 딸은 이미 성인이 되어 독립한 상황이라 혼자만 수습하면 되는 문제였다. 공항 증상이 찾아오고 정신과 치료와 걷기 우연히 눈에 띈 일기 쓰기 교실에 참석한다.

우산이란 주제어가 정해졌다. 나는 어쩐지 넘어지지 않고 걸어가는 사람처럼 생긴 ‘시옷’을 주인공 이름으로 선택했다.

순정만화 주인공처럼 꾸민 이름처럼 예쁜 애나의 옆집인 온양집에서 살던 시절이 있었다. 아빠는 늘 나를 품었고, 엄마도 웃음을 띤 얼굴을 하던 곳. 나는 남자애인지 여자애인지 구분되지 않게 생겼지만, 합창단 지휘자의 마음을 쏙 빼앗는 목소리의 소유자였다. 비록 그가 나를 ‘소년’으로 인식했고, 소년이 갖기엔 맑고 고운 목소리기에 좋아한 것이지만,
거리에 군인들이 깔리던 시절. 나라뿐 아니라 우리집도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그 어수선 끝에 아버지가 사라지고, 엄마는 폭폭 하다를 남발하고, 제비 다방의 아들이 우리 집에 들어와 아빠의 공간을 차지했다. 다행스러운 건지 합창단 연습을 계속 나갈 수 있게 되었지만, 5천 원이란 단복의 구입이 문제였다. 옆집 애니와 함께 하게 된 합창단 연습 후 데모하는 무리에 섞여 애니가 다치는 일이 발생하고, 시옷은 솔로로 지명되는데 ..

나에게 잠깐의 휴식이 되던 제비 다방의 아들이 사라지고 아빠가 돌아왔다. 엄마의 배는 터지기 직전이다. 철둑 너머 보다 더 먼 응달 집으로 이사를 간다. 그 동네엔 교탁 위에 올려져 옷이 들춰지는 치욕을 겪은 눈이 예쁜 아이 윤수가 살고 있다. 파전과 막걸리를 파느라 늘 술에 절어있는 모와 향긋한 향기를 품고 꼼꼼하게 세수를 하는, 일을 마친 후 미용을 배우러 다니는 누나 윤심과 함께 사는 윤수. 챙겨줄 사람이 없어 늘 꾸중의 중심에 있고, 집에서도 많은 시간 혼자인 아이 윤수와 시옷은 친하게 지내게 된다. 서로에게 사춘기가 오기 전까지. 윤수는 수호에게 약했다. 이제 막 태어난 수호의 존재는 미치도록 하기 싫은 공부를 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스토리가 흥미진진해서일까? 사람들은 ‘일기’인가? ‘소설’인가? 의심한다. 거칠다 표현이 적절한 시대의 배경에 남자아이처럼 생긴 여자아이가 삶을 관통하는 이야기의 일기를 딸도 남편도 직장도 잃은 한 50대 여성이 기록하고 있다. 공항의 증상은 여전히 계속되고, 딸은 곁을 떠난 것으로도 모자라 이제 독일에 가 있다. 그런 딸은 선거 전에 갑자기 단톡방을 만들어 의견을 묻고
아빠가 연락되지 않는다며 아빠의 죽음을 예견하는 두려움에 연락한다.

상처가 가득하지만,
사과하는 자는 한 명도 없고
자신의 삶을 잃고 헤매는 여성은
혐오와 차별을 관통한 과거의 삶도
가족이 다 떠난 현재의 삶도
하지만 걷고 상담하고 일기를 쓰며
나아지려 노력하는 그녀의 미래는
조금은 편안할 것이라고

그녀의 일기는 일기인가 소설인가
그 경계가 모호하더라도
우린 시옷의 엄마, 할머니, 애니, 윤심, 윤수, 그의 엄마 등의 삶에 빨려 들어가는 것은 분명하다.

여러분 말을 종합하면 성찰이란 자신의 삶을 돌이켜보고 평가하고 반성하는 일이네요. 일단 보는 행위가 먼저겠고요. 보고 이리저리 생각해보는 것이죠. 보고 생각해보고 그걸 글로 쓰면 일기입니다. 20p

그렇고 그런 이야기다. 결혼을 시키고 손주를 얻어야 자식이 성장의 마침표를 찍는다고 믿는 어른들의 이야기. 그런 기대에서 벗어난 자식은 부끄러워 한사코 감추려 들고 그런 기대에 못 미친 남의 자식은 열심히 욕하고 비꼬아야 직성이 풀리는, 그렇고 그런 이야기. 듣고 있으면 화가 나는 이야기. 그게 내 이야기가 되면 한없이 슬퍼지는 이야기 - P316

할머니는 끝내 의연했다. 집안 대대로 살아왔던 집을 팔아야 할 정도로 빚을 진 아빠의 실패를 한 번도 나무라지 않았다. 그저 관세음보살을 찾으며 자신 앞에 떨어진 불행을 묵묵히 헤쳐나갔다. 그때는 할머니가 큰 사람이라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어른이니까 그럴 수 있다고. 할머니는 처음부터 큰 어른이었던 것처럼. 하지만 내가 그때의 엄마보다 더 나이가 들어보니 알겠다. 처음부터 완성된 사람은 없다고. 할머니도 엄마도 아빠도 갈팡질팡 우왕좌왕하다가 그 순간 자신이 할 수 있는 선택을 했을 뿐이라고. 겉보기와 달리 속은 무척 시끄러웠을 거라고. 여러 번 무너지고 또 무너졌을 거라고. 그래도 매 순간 끊임없이 선택하면서 그렇게 한발 한발 앞으로 걸어갔을 거라고. 사는 게 원래 그렇다고. 이제야 겨우 알겠다. - P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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