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소한의 최선
문진영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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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한의 최선> 문진영

<277p><별점 : 4>

단편집을 좋아하지 않는 내가 이 책이 좋다고 느끼는 이유를 읽으며 궁금했다. 몇 개의 작품을 제외하고 이 책에 수록된 단편들은 어느 사건 또는 짧은 시간의 이야기들로 구성되지 않고, 장편에서 볼 법한 제법 긴 시간의 서사를 갖고 있다.

🔖 미노리와 테츠
어디서나 빛나는 존재인 친구 수민과 희주는 대학 졸업 후 마땅한 직업에 안착하지 못하던 시기에 일본 여행을 떠났다. 우연히 들른 부부가 함께 운영하는 식당에서 그들과 친분을 맺고 여행의 마지막 날을 함께 보내게 된다. 희주의 눈에 완벽한 부부의 모습이던 그들. 그 후로도 수민은 종종 일본에 가서 미노리와 만나곤 했고, 사진을 보내곤 했다. 묘한 질투심을 느끼곤 했는데 수민은 그 부부가 이혼했다는 사실을 말한다. 무려 지난해에… 그리곤 미노리가 한국에 왔다고 연락을 하는데..

시간이 흐른 뒤 나는 종종 웃긴 이야기라면 사람들에게 이 얘기를 들려주기도 했다. 말하다 보면 제법 웃기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에 내가 느꼈던 것은 분명 모멸감이었다. (중략) 그렇게 한번 자라난 것은 되돌릴 수 없었고, 나는 그것을 마음속 어두운 구석에 숨겨두고 문을 잠갔다.

🔖 변산에서
민주, 승민과 나의 대학 졸업 기념으로 떠난 여행을 승민이와 승민 딸인 수온이와 함께 떠났다. 이제 막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이는 병아리에서 중닭이 되어가는 중이라고 승민의 시어머니의 표현이었다. 아이가 태어나서 조금 큰 집으로 한 집안의 가장으로 역할을 다하고 싶어 시골로 내려간 이들 부부에게 닥친 시련은 이른 나이에 과로사로 가장을 잃는 슬픔이었다. 지난한 싸움 끝에 승소했지만, 회사는 항소를 했다. 우리가 착한 쪽이냐? 묻는 아이의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했지만, 늘 착한 쪽이 승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말하진 못했다.

🔖 오! 상그리아
주색잡기에 능한 할아버지와 쌀집을 하며 알뜰하게 사는 할머니 사이엔 3남이 있었다. 어느 날 딸을 데리고 귀가한 할아버지. 그런 딸을 미워할래야 미워할 수 없었던 할머니. 그런 막내딸에게 할아버지는 역마살을 물물려줬고 그 덕에 나는 할머니 손에 키워졌다. 엄마는 나름 잘나가는 여행 작가로 지냈던 시절이 있었던 것 같은데 나 때문이었을까? 엄마가 말하는 나의 아빠는 스페인 사람인데 나는 아무리 봐도 토종이다. 할머니가 말하는 아빠는 동네 철물 점집 아들이라는데 나의 아빠는 과연 누구일까? 지독한 숙취의 계보

🔖 내 할머니의 모든 것
나의 외할머니 47년생 배정심 여사. 자식을 버리고 40년간 연락이 없다가 나타난 사람. 단정하고 깔끔하고 지적인 이미지의 여인. 갑자기 나타나서도 덥석 와락이 아닌 적당한 선을 유지하는 묘한 느낌을 풍기는 사람. 갑작스러운 서프라이즈 생일 파티 후 다시 살아진 할머니. 할머니가 삶의 방식은 최소한의 최선이 아니었을까?

🔖너무 늦지 않은 어떤 때
29살의 인도 여행에서 낯선 나이 든 남자에게 편안함을 느끼는 사람.

🔖 고래사냥
어릴 때의 보물 상자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는 순간.

🔖 네버랜드에서
뒷일은 생각하지 않고 저지르는 행동파인 언니가 결혼 후 아이를 낳고 물에 들어가기 싫어하는 사람이 됐다. 늘 뭔가 바꾸기 힘들어하는 정 반대의 나. 23살 때부터 만난 희욱과 결혼은 해야겠지?

🔖 지나가는 바람
누군가의 gap year는 눈부신 발전을 이루는 시간인데 나의 갭 이어는 엄청난 무게가 자꾸 나를 누르는 시간이 되고 있다. 진짜 쉰다는 게 뭘까?

🔖 한낮의 빛
30명 남짓한 아르바이트생 중 눈에 띈 아이 주명이 나를 언니라 불러도 되냐고 묻는다. 나는 언니라고 부르는 사람이 딱 한 명이다. 엄마와 아빠가 소개한 부부의 사이에서 태어난 유영 언니. 굉장한 부자로 살다가 IMF에 회사가 힘들어지자 잠시 우리 집에 맡겨진 언니. 언니한테 일어난 일이 무언가 잘못된 일이라는 정도만 알았던 나는 부모에게도 다음날 학교에서 친구에게도 그 일을 이야기했다.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할 때를 놓친 나는 언니와 이별하게 되고 이후로 함구증을 앓는다.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선 어둠 속에 자신을 내버려 둘 용기가 필요한 게 아닐까. 너무 어두워서 도무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다가도, 시간을 견디면 결국에는 아주 느린 속도로 시야가 밝아지듯이. 캄캄한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일. - P61

다만 그 순간 나는 알았다. 영원히 살 수 있는 꿈같은 건 없다는 것을. 이 순간은 오직 지금뿐이라는 것을. 어떤 오늘도 내게 너무 늦지는 않았다는 것을. - P150

사는 게 아주 그냥 너무, 피곤해요. 이런 말 하면 형이고 친구고 다 뭐라고 하는지 알아요?
응, 알아.
너만 그런 거 아니라고 하잖아. 다 그렇게 산다고.
그러니까요. 그 말이 제일 싫어.
좋아하는 일 하면서 돈도 많이 벌고,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되겠냐고.
그러니까요.
근데 그런 사람 되게 많은 거 같잖아.
그러니까요 - P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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