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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피를 입은 비너스 ㅣ 펭귄클래식 61
레오폴트 폰 자허마조흐 지음, 김재혁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9년 12월
평점 :
품절
[책속한줄]
“사랑에 있어서 평등은 있을 수 없습니다.” 나는 진지하고도 엄숙한 투로 대답했다. “상대를 지배할 것인지, 아니면 상대에게 지배를 받을 것인지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나 같은 경우에는 아름다운 여인의 노예가 되는 편이 훨씬 더 매력적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사사건건 바가지나 긁어대며 괴롭히려 드는 여자가 아닌, 차분하고도 자의식에 찬 엄격함으로 상대를 다스릴 줄 아는 여자를 어디서 만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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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궁금했던 것은 연극 '비너스 인 퍼' 때문이었다. 공연을 직접 보진 못했지만, '모피'가 주는 의미와 여성과 남성의 위치, 권력을 묘하게 비틀어내는 공연이라고 해서 늘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이야기가 나오게 된 원작이야기가 더 궁금해졌다. 피학적 성적 취향을 뜻하는 마조히즘이라는 단어를 처음 만들었다는 레오폴트 폰 자허마조흐의 자전적 소설로 알려진 이 소설은 자신을 반증하는 주인공 제베린과 아름다운 미망인 반다의 욕망을 다뤘다. 솔직히 말하면 시작부터 이해할 수 없는 사랑의 형태인데, 사랑에 상처를 받는 사람도 주는 사람도 있다지만, 이렇게 물리적인 가학적 그리고 피가학적 사랑은 불편함이 더 컸다.
실제로 자신의 이야기를 반추해 썻다는 자허마조흐는 1836년 렘베르크에서 경찰국장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한다. 그에 대해 찾아보니 마조흐는 하나의 틀을 가지고 사랑, 재산, 국가, 전쟁, 죽음을 테마로 하여 여섯 권의 책을 쓰는데 그 연작 중 첫 작품이 바로 ‘사랑’을 테마로 한 '모피를 입은 비너스'로 이 작품은 마조흐의 극단적인 감각주의를 그려낸 일종의 자전적 소설로, 그의 삶과 문학 전반을 지배한 피학적인 성적 취향을 전형적으로 보여 주는 소설이다. 이 소설이 1870년에 발매되었다고 하니 200년 전이 오히려 더 깨인 시대였던걸까 싶기도 하다.
에로시티즘 소설로 묶이는 이 소설은 19세기 독일을 배경으로 쓰여진다. 더구나 젊은 청년과 남편을 잃은 여성 사이의 사랑이야기라는 것도 재미있는 요소다. 지금도 고가의 옷으로 인식되는 모피인데, 그 당시 모피에 대한 인식은 지금보다 높았지 않았을까 싶으면서 왜 벤다에게 모피를 입히고 스스로에게 채찍질과 구속을 원했던 것일까 모피에 들어간 의미가 궁금해졌다.
최근 펭귄클래식에서 에로시티즘 시리즈로 묶여서 재출판 된 책 중 하나인 이 소설은 읽는 내내 영화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가 떠오른다. 사랑에 대한 고통과 육체적 고통의 동일시인가, 아니 그 전에 사랑 앞에 권력이 자리잡으면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분명 이 관계의 속엔 가학자와 피가학자라는 권력의 순서가 자리잡았을테니. 어렵고, 어렵다.
다시 '비너스 인 퍼'가 공연으로 올라온다면 꼭 보고싶다. 과연 책 속의 벤다와 무대 위의 벤다는 어떻게 다를지 궁금하다. 하지만, 그들의 사랑도 사랑이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