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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봇과 함께 살기
폴 뒤무셸.루이자 다미아노 지음, 박찬규 옮김, 원종우 감수 / 희담 / 2019년 2월
평점 :
12살 큰 아이의 꿈은 5살부터 로봇 공학자이다. 꿈이라는 게 쉽게 바뀌는 속성을 지닌 것이라 생각한 나는 어떤 시기가 오면 꿈이 바뀔 거라 예상했다. 하지만 여전히 아이의 꿈은 현재 진행형이다. TV속 만화로만 보던 로봇을 직접 만들어보겠다는 막연한 희열이 아니라, 로봇 디자이너로서의 명확하고도 구체적인 진로를 설정한 아이를 보니 대견하기도 하다.
덕분에 기계에 무지한 나는 우리집 로봇박사를 통해 적잖은 로봇 관련 지식들을 전수 받을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로봇 제 3의 원칙 (제 1원칙: 로봇은 어떠한 경우에도 인간을 헤쳐서는 안 된다. 또한 인간이 위험에 처했을 때는 구조해야 한다. 제 2 원칙 : 제 1 원칙에 위배되지 않는 한, 로봇은 인간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제 3 원칙 :제 원칙과 제 2 원칙에 위배되지 않는 한, 로봇은 로봇 자신을 지켜야 한다)이라던가, 로보틱 챌린지대회에서 카이스트 휴보가 1위를 하다는 소식 그리고 아시모의 은퇴소식에 이르기까지 비교적 자세히 알고 있는 편이다.
이제 로봇은 공상과학 영화에서만 보는 신기한 기계가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많이 접할 수 있다. 비단 과학관에 전시된 휴머노이드 로봇 뿐 아니라, 산업용 로봇과 드론, 주방로봇이 인간을 돕고 대신하고 있다. 로봇들의 모습이나 용도는 제각각이며, 이 로봇들은 원래의 목적과 전혀 다른 용도로도 사용 될 수 있다고 한다.
[로봇과 함께 살기]는 그간 아이의 꿈을 이루는데 도움을 주기 위해 보여주었던 책들과는 사뭇 다르다. 보통 로봇 관련 책에서는 기계적, 기술적 특성이나 로봇의 발전과 종류와 기능을 주로 다루었다면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우리 인간이 로봇이라는 존재와 함께 살아가기 위한 철학적 통찰과 고민거리를 안고 있다.
나는 사실 이 책을 읽기 전에 첨단 과학의 산물인 로봇을 철학적 관점에서 보아내는 일이 가능할지 의구심을 가졌다. 그저 기계에 국한된 로봇이 아니라 우리 인간과 함께 살아나가야 할 위대한 존재로서의 깊은 고민을 한다는 것 자체가 신선하고 놀라웠다.
이 책에서는 “소셜(social) 로봇 공학”을 다루는데, 이들을 단순한 기계가 아닌 인간과 사회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사회적 인공 행위자들’로 본다. 그래서 이 책은 로봇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과 사람의 본성을 탐구하기도 한다. 기계인 로봇과 인간을 구분 짓는 일은 우리 인간의 본질을 잘 알 때만이 가능한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를 닮은 무언가를 창조해 내고픈 욕망이 인간이 로봇을 만들게 한 원동력일 테지만, 인간은 로봇이 인간을 닮을수록 불쾌해진다. 일본 로봇 공학자 모리 마사히로는 이러한 것을 “불쾌한 골짜기 이론”이라 명명한다. 그에 따르면 인간과 매우 닮았으면서도 뭔가 다른 존재는 갑자기 낯설고 불쾌한 것이 되고 만다. 그 이론을 뒷받침하는 여러 이유 중에 가장 나의 눈길을 끈 것은 다음과 같다.
우리가 로봇을 인간과 비슷하게 만들려고 하는 이유는 엄밀히 말해 그것이 우리와는 다른 이유에서이다. 우리는 인간보다 우수한 기계를 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것이 우리보다 우월하지 않기를 바라며, 타인간의 관계에서와 마찬가지로 통제 가능하고 내 뜻을 거스르지 않으며, 예측 가능하기를 바란다.
아이러니 하게도 인간과 로봇이 닮을수록 불쾌한 마음은 극에 달하고, 인간과 로봇이 완전히 같아지거나 그 수준을 뛰어 넘을 때야 다시 로봇에 대한 친밀감은 상승곡선을 그릴 수 있다고 한다. 이 이론을 통해 인간은 우리가 만든 로봇에게 현실너머의 추월적 창조물을 바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어떻게 하면 나를 닮은 로봇이 불쾌한 존재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넘어선 존재로 친밀함을 나누며 살아갈 수 있을까?
소셜 로봇공학에서의 화두는 바로 이것이다. 인간-로봇의 상호작용, 감정 로봇 공학, 인지 로봇공학, 발달 로봇공학, 등 여러 학제간의 융합 연구의 목적은“ 어떻게 소셜 로봇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행위자들을 인간들의 사회망에 편입시킬까 ?”에 쏠려 있다. 소셜 로봇을 엄연히 인간 행위자와 사회적 상호작용을 할 수 있는 인공행위자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과연 사람의 ‘마음’을 로봇에게 불어 넣을 수는 없을까?” 허무맹랑하게 들리는 이 질문이 그들이 이러한 철학적 연구를 하는 근원임을 깨닫는다.
아이들과 몇 년 전 포항 로봇 뮤지엄에 간 적이 있다. 당시 3살이던 둘째 공주는 아기 바다표범인형 로봇을 끌어안고 한동안 쓰다듬고 안아주고 얼굴을 비벼 댔다. 바로 이 책에도 언급된 “파로”라는 로봇이다. 그저 옆에서 살짝 꼬리만 흔들고 몸을 조금씩 움직여 주는 게 다였어도 이미 아이와 파로는 친구가 되었다. 비록 “마음”이 존재 할리 없는 한 낱 로봇이고 아직 인간의 감정을 표현할 수 없는 기계일지라도 로봇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생각보다 크고 무겁다.
사람을 닮은 그 무언가를 꿈꾸고 이제 제법 우리를 닮은 로봇이 상용화 될 시기가 가까워진 것처럼, 언젠가 마음을 가진 로봇이 나타날지도 모를 일이다. 이 책은 그러한 시기를 당기기 위해 고민하고, 또 그때가 되었을 때 우리가 인간으로서 흔들리지 않고 살아가야 할 진짜 인간 속성을 깊이 연구한다.
내가 생각해오던 로봇 공학은 이것과 거리가 멀었다. 화려한 기계적 원리와 세련된 기술적 기법들이 전부였다. 전혀 새로운 시각을 깨닫게 되었다. 새삼 한 분야의 발전이 비단 한 분야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니라는 게 명확해졌다. 인문학적인 진지한 고찰과 과학의 객관성이 적절히 고민되고 조화되어야만 우리는 미래에 수많은 기계들과 슬기롭게 잘 살아 낼 수 있을 것이다. 로봇과의 조화를 위해 철학적 사고로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어 다행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