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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다정한 하루
서늘한여름밤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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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우리가 가장 열심히 따른 말은 아마 '출제자의 의도를 파악하라'가 아닐까. 학교 시험과 수학 능력 시험을 출제하는 사람들의 의도를 파악했고, 자격증 시험과 대학 중간고사, 기말고사를 출제하는 사람들의 의도를 파악했다. 시험이 끝나면, 더 이상 출제자의 의도는 파악하지 않아도 되는 줄 알았지만, 생각보다 사회 속 출제자들은 많았다. 직장 상사의 짧은 지시어 속에 어떤 의도가 있는지 파악하기란 여전히 내겐 쉽지 않다. 친하지도 그렇다고 생판 남인 것도 아닌, 애매한 관계의 사람이 늘어놓는 자기 자랑과 예의상 내게 건네는 듯한 칭찬에 무슨 의도가 있는지 골치가 다 아프다. 자신 있게 내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친구가 무심결에 툭 던진 말이 내 가슴을 후벼 파면, '얘가 무슨 의도로 이런 말을 한 거지?'라는 생각에 마음이 혼란스럽다. 

이런 내 모습을 드론으로 멋있게 상공 촬영해 보면, 아마 사막 속 미어캣과 같을 것 같다. 늘 두리번두리번거리면서, 무슨 일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를 눈치 보는 나. 저 사람의 기분이 어떻게 변하고 있나를 신경 쓰고 있는 나. 끊임없이 두리번거리다 보면, 어느새 목은 뻐근해지고, 눈은 빨개지고, 머릿속은 복잡하다. 나의 육체가 겪은 피로만을 살펴볼 때, 서늘한여름밤 작가는 말한다. '지금 당신의 마음은 안녕하신가요?' 대번에 말이 나오지 않는다. '그러니까, 출제자의 의도가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생각이 아니라, 내 마음, 말하는 것 맞나요?'

서늘한여름밤 작가의 『나에게 다정한 하루』는 내 마음은 내가 일구고, 가꿔야 한다는, 자급자족 생활방식을 보여준다. 정말 보여준다. 작가가 3년 동안 쓴 그림일기가 이 책의 주요 토대이니까. 이 말을 읽고 내가 마지막으로 그림일기를 쓴 게 언제인지 생각해봤다. 초등학교 들어가고 나서는 쓴 기억이 없으니, 못해도 어린이집 시절일 거다. 그때도 일기 쓰는 건 싫어했던 것 같다. 읽기와 쓰기를 억지로 시킬 때, 나타나는 악영향은 멀리 갈 것도 없이 내 삶만 봐도 알 수 있다. 그토록 싫었던 책과 글쓰기를 아무도 억지로 시키지 않는 지금, 내 돈으로 사고, 내 시간을 들여서 쓰고 있으니.

상대적으로 글이 부족한 책인데도 불구하고, 나는 참 많은 밑줄을 그었다. 어떤 페이지에는 글마다 밑줄이 다 처져 있다. 글을 읽다가 나와 생각이 통하는 부분에 밑줄을 긋기도 했고, 단순하지만 확 마음에 와닿게 표현한 부분이 마음에 들어 밑줄을 긋기도 했고, 이건 나도 쓸 수 있겠는걸 하며 되지도 않는 자신감을 가진 채 밑줄을 긋기도 했다. 밑줄과 페이지를 표시한 포스트잇과 손때만큼이 책을 지나온 나의 여정 같다. 

누군가 여정을 거치면서, 책을 읽으면서, 어떤 것을 얻었냐고 물어보면 나는 뭐라 답할 수 있을까? 그 경험에 이름이나 숫자를 붙일 수 있을까? 그 느낌에 어떤 형용사와 부사를 섞어 표현할 수 있을까? 아직은 잘 모르겠다. 어떤 경험이, 느낌이 내 마음속에서 꿈틀거리는 것이 감지되지만, 입 밖으로 내뱉기에는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하다. 그렇지만 조급해하지는 않을 거다. 이름 모를 이 느낌을 간직하고 있는 것도 나라는 사람이니까. 그게 세상 속 출제자의 의도와 같건, 다르건 중요하지 않다. 적어도 『나에게 다정한 하루』를 읽고 있는 동안만큼은 그들의 의도에 눈을 감은 채, 내 마음만을 비추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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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 가기 전에 해야 하는 말
아이라 바이오크 지음, 김고명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2월
평점 :
절판


사랑은 우리에게 흔하다사랑은 멜론에서 듣고유튜브에서 보고페이스북에서 읽으며인스타그램에 찍어 올린다이처럼 우리 주변에 널려 있는 것이 사랑이다그러나 사랑의 발화즉 사랑해라는 말은 흔하지 않다좀처럼 듣기 힘들다내 옆의 부모님이연인이친구가 사랑해라는 말을 한다면그 상황은 일상의 한 순간이 아닌매우 특별한 상징을 가지게 된다말을 한 화자 역시 특별한 상황임을 염두에 두었을 가능성이 크다특별한 상황에서 발화된 사랑은 특별한 힘을 가지게 된다.
 
 물론 사랑해라는 말을 밥 먹었니?”나 다녀올게요.”와 같이 흔하게 사용하는 사람도 있다이들은 사랑이 입에서 입으로 발화의 전이가 일어날 때에야 그 힘을 온전히 쓸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다사랑을 흔하게 말하면서 일상 속에서 사랑의 힘을 발휘하고자 한다사람마다 그 발화의 빈도에 차이가 있을 뿐사랑에 특별한 힘이 있다는 믿음은 보편적이다특별한 상황에만 사랑해라는 말을 하는 사람과 일상에서 사랑해라는 말을 하는 사람 모두 발화된 사랑만이 특별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40년 넘게 호스피스 활동을 하고 있는 의료 전문가 아이라 바이오크의 <오늘이 가기 전에 해야 하는 말>에 나오는 인물들은, 전자에 해당되기도 하고, 후자에 해당되기도 한다. 그들은 때로는 스스로 깨닫기도 하고,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받기도 하고, 저자의 도움을 받기도 한다. 이내 그들은 저자가 강조한 네 마디를 발화하기 시작한다. 흔하디흔한 용서, 감사, 사랑은 발화되며 힘을 발휘한다.

 지금 이렇게 사랑에 대해서 말하면으레 사람들은 오글거린다든지새벽 감성이라든지누구나 아는 뻔한 말을 늘어놓는다고 조소를 하곤 한다그 말이 맞다사랑은 도처에 널려 있지만사랑은 중요하지만사랑은 필요하지만사랑은 강한 힘이 있지만사랑에 대한 말을 하면(그것이 직접적인 발화가 됐든글로 쓰는 행위가 됐든 간에), 오글거리고새벽 감성이고뻔한 말처럼 들린다사랑은 꽁꽁 숨어 있어야 빛이 난다.
 
 앞서 흔하게 사랑을 말하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보통의 나 같은 사람들에게 사랑해라는 말은 특별한 상황일 때만 용납된다낯선 상황 속에서만 허락된다그 순간에 특별한 사랑의 힘이 우리를 이끌어 가게 내버려 둔다사랑의 힘은 특별할 때만 발휘되어야 한다사랑의 힘을 만끽하기 위해서는 사랑해라는 말을 절제할 필요가 있다가급적이면 사랑해라는 말 대신 다른 표현을 사용해야 있어 보이기도 한다마치 해리 포터의 친구들이 볼드모트를 이름을 말해서는 안 되는 그 사람이라고 표현하는 것처럼. “사랑해라는 말을 함부로 쓰는 사람에게 우리는 오글거린다고 비난하고새벽 감성은 일기장에 쓰라고 꾸짖는다. 비난하고 꾸짖는 사람은 “사랑해라는 말을 남용하면정작 필요할 때 오용하기 쉽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사랑해라는 말은 조심스럽게 다뤄야 하는 유리 공이다품 안에 소중히 안고 있어야 한다그래서 꽁꽁 숨어 있을 때빛이 난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문학이나 영화와 같은 예술에도 그러하다문학이나 영화에서 사랑을 드러내놓고 말하면 클리셰가 된다사랑이 온갖 메타포로 둘러 싸져 있어야 문학이나 영화는 명작이 된다사랑이 온갖 상징의 겹을 덮고 있어야 평론가들은 해설을 할 수 있다그제서야 독자와 관객은 무릎을 치며, “이게 사랑을 의미하는 거였다니!” 한다사랑을 숨기지 않은 문학이나 영화는 통속적이고 신파적이라고 독자와 관객에게 비난을 받는다사랑을 숨기지 않은 문학이나 영화의 창작자는 깊은 고민을 하지 않았다고 평론가에게 비판을 받는다.

<오늘이 가기 전에 해야 하는 말>의 저자, 아이라 바이오크는 위와 같이 생각하는, 보통의 나 같은 사람들에게 조용히 일침을 놓는다. 바이오크가 믿는 것은 흔한 사랑이 아니라, 발화된 사랑이다. 바이오크는 낙관적인 행동주의자의 거대한 잠재력을 믿는다. 바이오크는 우리 주변에 흔하게 놓여 있는 용서, 감사, 사랑을 쓰다듬고, 쌓여있는 말의 먼지들을 털어낸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책을 읽고 해야 할 행동이란, 비교적 간단할지도 모른다. 쑥스러움을 털어 내고, 네 마디의 말을 가족, 친구, 연인, 동료에게 툭 터놓는 것이다. 부끄러움은 우리의 몫일 테고, 이름 모를 벅차오름도 우리의 몫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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