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과 타자
엠마누엘 레비나스 지음, 강영안 옮김 / 문예출판사 / 199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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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누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는 1906년 동유럽의 리투아니아에서 출생한 유대인계 프랑스 철학자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레비나스는 목숨을 건졌지만 동구에 있던 자신의 모든 가족, 친척들이 나치에 의해 살해된다. 인류에게 저지른 나치의 잔혹성과 그에 따른 공포의 기억이 평생토록 자신을 지배했다고 고백하면서 이것은 곧 그의 철학의 전반적인 부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고 그의 철학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다. 레비나스는 전체성의 철학에 대항해서 어떤 무엇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개인의 인격적 가치와 타자에 대한 책임을 보여 주는 평화의 철학을 구축하고자 한다. 그에게 있어 철학함은 사상적 유희가 아닌 종교적인 숭고함을 내포한 소명이기도 하다. 나치의 범죄 속에서 살아남은 그는 평생을 인간에게 있어서 윤리란 무엇이며 나와 타자의 윤리적 관계가 어떻게 맺어질 수 있는지, 그동안의 우리들의 사고와 실천에 무슨 문제가 있었기에 20세기에 인류의 비극을 인간 자신이 만들어 낼 수밖에 없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우리들의 근본적 사고의 방향을 다시 윤리적으로 바꿀 수 있는지에 대해서 고민하고 바로 이것이 ‘시간과 타자’의 주제가 된다.  

 

레비나스의 철학은 윤리를 본질적인 존재의 질문에서 벗어난 비본질적인 것으로 경시했던 하이데거의 존재철학과의 충돌에서 시작된다. 서양을 지배해온 존재철학이 타자에 대한 폭력으로 사용되어 졌고 존재론을 중요시한 하이데거의 철학은 동일자가 타자를 지배하는 서구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갔으며 이로 인하여 타자를 죽이는 철학이 되었다고 비판한다. “존재론은 근본적인가?”에서 레비나스는 존재론이 타자의 타자성을 억누르고, 제거하고, 결국 죽이는 역할을 했다는 것으로 결론을 내린다. 그리고 타자의 타자성은 제거하는 작업의 시작은 타자와의 관계를 하나의 이해로 환원하는 데서 시작된다고 본다. 이해 속에서 타자는 더 이상 타자가 아니라 내가 이해한 하나의 대상물로 혹은 자기실현을 위한 목적물로 전락한다는 것이 레비나스가 바라본 하이데거의 사상이자 동시에 서양철학에 대한 비판이다. ‘나’와 동일화 되지 않는 타자 즉 이해할 수 없는 혹은 이해되지 않는 타자는 하나의 대상물로 전락하여 나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레비나스가 말하는 타자(l'Autre)란 과연 어떤 존재인가? 타자는 나와 너라는 관계 속에서 용해되거나 융합될 수 있는 자가 아니다. 타자는 나와 거리를 두고 있으며 나에게는 낯선 이로 나의 삶에 완전히 포섭될 수 없는 자이며 내가 완전히 파악 할 수 없는 ‘신비의 존재’이다.  

 

레비나스는 타자에 대해 그만의 독특한 철학을 펼친다. 나와 타자와의 진정한 윤리적 평등과 형제애는 인간 사이의 대칭적 관계를 통해 구축되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내 자신에서 벗어나 고통당하는 타자를 받으들일 때 비로소 그때 타자와 동등할 수 있다고 이야기 하는 것이다. 나와 타자와의 비대칭성, 불균등성이 인간들 사이의 진정한 평등을 이룰 수 있는 기초이고 이런 의미의 평등만이 약자를 착취하는 강자의 법을 폐기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타자란 나의 존재를 위협하는 침입자가 아닌 내면의 닫힌 세계에서 밖으로의 초월을 가능하게 해 주는 존재이다. 타자는 나의 자유를 위협하는 존재로 바라 볼 수도 있지만 동시에 타자가 오히려 나로 인하여 상처받거나 죽임을 당할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타자는 살기 위해 나의 관심과 보살핌이 필요한 존재이기도 한 것이다. 레비나스에 의하면 타자는 ‘얼굴’로 다가온다. 사물은 나를 바라보지도 않고 호소하지도 않고 표현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얼굴은 바라보고 호소하며 스스로 표현한다. 이러한 타자의 얼굴이 바로 내면성의 닫힌 세계에서 밖으로의 초월을 가능케 해주는 접촉점이 된다. 타자의 얼굴은 ‘그리움’의 원천이 되며 타자의 얼굴을 향한 강렬한 에로스는 초월을 향한 나의 숭고한 지향이 된다. 타자는 얼굴을 통하여 내가 정의로워야 한다는 것을 요구하면 이것은 타자의 명령이며 이것을 받아들임으로써 나는 ‘책임적 주체’이자 ‘진정한 주체’가 된다. 

 

단 한명의 타자라도 그 한 명의 타자에게 귀 기울이고 타자의 얼굴을 통해 현현되는 타자의 고통에 응답하는 것이 윤리 부재의 시대, 폭력과 전쟁이 난무한 이 시대에 필요한 해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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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추픽추 정상에서 라틴아메리카를 보다 - 손호철의 세계를 가다 1
손호철 지음 / 이매진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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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추픽추'는 남미 최고의 문화유적이자 라틴 아메리카의 옛 영광의 상징 즉 Symbol로 축약된다. 저자 손호철씨가 라틴 아메리카를 여행하면서 보고 듣고 느낀점들을 학자답게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풀어쓴 정치 기행서 '마추픽추 정상에서 라틴아메리카를 보다'는 저자의 사상적 잣대와 신랄함으로 꽉 찬 책이다. 한 마디로 일반 여행 에세이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날카로움이 있는 책이다.



쿠바를 시작으로 베네수엘라, 브라질, 아르헨티나, 칠레, 페루, 멕시코, 과테말라에 이르기까지 라틴 아메리카를 대표하는 나라들을 차례로 여행하는데, 참으로 흥미로운 것은 라틴 아메리카는 70년대의 한국과 정치, 경제, 사회면에서 비슷한 점이 많다라는 사실이고 또 하나는 여러 남미 국가들이 각각의 독특한 특성와 다른 문화, 다른 인종, 다른 국민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라틴 아메리카'라는 공통된 동질성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선 한국과 비슷한 점은 오랜 세월동안 외세의 침략과 식민지 시절을 경혐했다는 것과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 그리고 군사독재를 경험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각각의 특성과 문화를 소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미 국가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은 바로 풍부한 지하자원과 아름다운 경관(즉 관광을 통한 외화벌이가 가능하다는 것인데)을 가지고 있음에도 지독한 가난과 빈곤, 경제적 파탄, 독재, 인권유린, 양극화 현상이 되풀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 손호철씨는 바로 이러한 라틴 아메리카의 비극에 대해서 비판하고 이유를 찾아내어 분노를 담아 친절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그 이유란, 오랜 식민지 통치로 인한 자원의 수탈과 독립 이후에 발생한 사회적 불안정 뒤이어 찾아오는 독재정치, 공포정치 그리고 쿠테타의 반복, 민주주의 정권의 교체 그러나 무능함과 부정부패로 인한 국민들의 분노, 치안의 불안정, 자원수출에 지나치게 의존해서 발생하는 부작용, 신자유주의의 무분별한 흡수 등이다.



마야문명, 잉카문명, 아즈텍문명 등 뛰어난 문화와 과학기술, 건축기술, 예술 등이 이미 고대부터 존재해왔던 라틴 아메리카는 스페인과 포루투칼과 같은 서구 제국주의 침략을 시작으로 현재는 미국이 주도하는 얻는자와 뺏기는 자가 너무나 분명한 주종관계의 경제구조의 틀 속에서 허덕이고 있다. 하지만 저자는 남미의 어두운 면만을, 신자유주의에 대한 거센 비판만을 휘갈긴 것이 아니라 남미의 희망과 빛, 민주화를 향한 열망 등을 발견하고자 했다. 또한 라틴 아메리카가 밟아온 경제적 폐해를 우리나라 역시 밟아가고 있다는 등골 오싹한 경고와 중국의 어마어마한 경제적 힘을 남미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음을 밝히고 있다. 우리나라가 어떻게 해야 방향을 상실하지 않고 올바르게 나아갈 수 있을까? 바로 이것이 저자가 독자들에게 던지는 화두인 것이다.



마추픽추는 '늙은 봉우리'라는 뜻이란다. 라틴 아메리카는 이제 더 이상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늙고 병들어버린 것일까. 아니면 고대의 그 강하고 화려하고 풍요롭고 아름다웠던 마추픽추의 모습으로 다시 회귀할 수 있는 것일까.



과테말라시티를 떠나는 비행기에서 슬픈 마야의 땅을 내려다보며, 착취당하고 싶어도 착취당하지 못하는 독백의 고통, 이런 고통이 무서워 더 낮은 임금으로 많이 착취해 달라고 서로 경쟁해야 하는 세계화의 비극을 곰곰이 되씹어 보았다. (p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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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취해 놀다
김화성 지음 / 생각의나무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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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책’이라는 무기물(無機物)을 살아 움직이고 역동하는 유기체(有機體)로 환원하여 책을 통해서 이 세상과 대화하고 소통한다.  

 

이 책을 읽으면 두 번 놀라게 된다. 첫 번째 놀라움은 저자의 방대한 책 읽기이다. 저자의 무궁무진한 책 세계를 잠시 들여다보자면, 이인문의 강산무진도, 김병모의 고고학 여행, 오쿠다 히데오의 남쪽으로 튀어, 지승호의 7인 7색, 시바 료타로의 미야모토 무사시, 위쉐빈의 삼국지 인간을 말하다, 이영만의 김응용의 힘, 나카무라 도시오의 오프사이드는 왜 반칙인가, 조너선 닐의 셰르파 히말라야의 전설, 에드 더글라스의 텐징 노르가이, 김홍성의 히말라야 40일간의 낮과 밤, 김훈의 자건거 여행, 박찬욱의 몽타주, 안정효의 글쓰기 만보, 정민의 미쳐야 미친다를 비롯한 수 십 여권의 소설, 인문 사회 과학서, 에세이, 실용서, 시와 고전 심지어 만화책에 이르기까지 책 좀 읽었다고 자부해 왔던 나도 생전 처음 듣는 책들이 숱하게 늘어서 있다. 대체 이 무시무시한 대식성과 잡식성은 무엇이란 말인가.  

 

두 번째 놀라움은 책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소통하는 그의 독특하고 깊이 있는 사유세계와 직관력이다. ‘전신 조훈현-나는 바둑을 상상한다’와 ‘나의 형, 이창호’같은 바둑천재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을 통해서 세상에 대해, 세상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사유한다. 장기와 바둑은 패러다임부터 다르다. 장기는 각 말마다 맡은 바 역할과 직책이 있고 다른 말과의 생사와는 상관없이 왕이 죽으면 지고 왕이 살면 이기는 매우 수직적인 구조라면, 바둑은 모든 알들이 평등하고 그 바둑알 하나하나가 독립적으로 강해야 한다는 수평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 개별적인 바둑알들이 서로 끊어지지 않도록 연대해야 이길 수 있다는 것이고, 싸움터가 어디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바둑알이 놓이는 그 곳이 싸움터라는 것이다. 장기가 철저하게 코드화 되어 있고 명확한 목적지가 있는 게임이라면 바둑은 출발점도 도착점도 명확하지 않으며 단지 매 순간 다른 공간, 다른 영토가 생성되는 것이고 도달해야 하는 목적지도 분명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둑은 자유롭지만 외롭다. 이것이 바로 세상이고 삶이라는 것이다.  

 

‘책에 취해 놀다’를 읽고 있으면 과거에서 현재로, 동양에서 서양으로, 산에서 바다로, 하늘에서 땅으로 저자를 좇아 숨 가쁘게 뛰어야 한다. 질질 끌려 다니는 것이 아니라 시간도 공간도 초월한 채 책에 취해 한바탕 거하게 놀아보자는 것이다. 술에 취하면 술 냄새가 진동하듯이 이렇게 흠뻑 책에 취하면 책 냄새가 진동하게 되겠지. 쌀쌀한 가을날 뜨끈한 정종 한 잔 걸치듯 오래된 쿰쿰한 책 한 잔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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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터 키튼 1 - 사막의 카리만
우라사와 나오키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199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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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가슴과 진실한 눈으로

학창시절 때야 놀거리가 한정되어 있다보니 만화책에 손이 간다지만 성인이 되어서도 여지 것 만화책을 좋아한다고 하면 의아해 하는 사람들이 있다. 또한 만화책을 즐겨보는 사람들 역시 만화책은 심심파적 삼아 그저 한 번 읽고 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그렇지만 만화에 대한 이러한 고정관념을 살뜰히 깨줄 수 있는 만화책을 열거하자면 너무나도 많다는 사실. 황미나의 불새의 늪, 박희정의 호텔 아프리카, 형민우의 프리스트, 타무라 유미의 바사라, 이노우에 다케히코의 슬램덩크, 모치즈키 미네타로의 드래곤 헤드, 아트 슈피겔만의 쥐 등등 끝없이 나열된다. 그리고 마스터 키튼, 몬스터, 20세기 소년의 작가 우라사와 나오키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중에서도 ‘마스터 키튼’에 대해 이야기 하고자 함은 내가 처음으로 읽은 나오키의 작품이자 서른 줄에 들어서도 여전히 만화책 소장(所藏)에 대한 집착과 만화를 열렬히 사랑하게 된 계기를 제공한 주범이기 때문이다. 

 
만화 ‘마스터 키튼’의 주인공 키튼은 프리랜서 보험조사원이자 고고학 시간 강사이며 과거에는 영국 특수 부대 SAS의 서바이벌 교관이었다. 한 마디로 말해서 특별히 정해진 직업이 없다. 본인 스스로가 원해서라기보다는 어쩔 수 없는 그의 천성과 주변 상황 때문에 변변한 직업을 갖지 못한다. 이러한 키튼을 한 마디로 표현한 것이 바로 ‘마스터 키튼’이라는 명칭이다. master라는 단어는 ‘석사’라는 뜻이다. 키튼은 professor 즉 박사, 정교수가 되지는 못했음을 의미한다. master는 무언가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데, 주인공 키튼은 어는 한 분야에만 국한되고 한정되어 있는 인물이 아니라 어떤 분야든지 자유롭고 창조적으로 사고하는 사람이며, 아무리 복잡한 난제라도 해박한 지식과 많은 경험을 바탕으로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풀어나간다. 자, 여기까지만 살펴보면 그는 상당히 냉철하고 이성적인 사람으로, 아니면 흔히 천재적 캐릭터에서 발견되는 괴팍함이나 기이함을 상상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우라사와 나오키가 그려낸 키튼은 무척이나 평범한 인물이다. 아내에게 이혼 당하고, 조숙한 딸에게 핀잔을 듣고, 산에서 길을 잃고 흙투성이가 된 채 “지름길로 오려다 길을 잃었습니다.”라고 멋쩍게 머리를 긁적이고, 대학에서 강사 자리를 얻지 못해 돈벌이로 보험조사원을 하는 어쩌면 ‘평범’에도 약간 미치지 못하는 캐릭터이다. 하지만 키튼은 따뜻한 가슴과 진실한 눈을 가진 사람이다. 단편적인 사건들을 해결해 나가는 것이 이 책의 큰 줄기인데 사건들을 해결해 나가는 과정에서 보여 지는 키튼의 모습을 통해서 가족애, 인간애, 인류애를 담아낸다. 바로 이러한 점이 여타의 추리 만화들과 확연히 구분되는 이유가 될 것이다. 

 
‘마스터 키튼’은 일본, 영국, 아일랜드, 독일, 러시아, 이라크, 체코, 이탈리아, 그리스, 아르헨티나 등 세계 각국, 숱한 도시들을 배경으로 130여개에 달하는 사건들을 통해서 가족에 대한 소중함과 사랑, 인종차별의 문제, 국가 간 이해의 문제, 전쟁에 관한 문제, 이념에 대한 문제, 추억의 소중함, 인간의 꿈과 사랑 등을 그리고 있다. 작가 우라사와 나오키는 키튼이라는 인물을 통해서 자신의 관념과 메시지를 진지하게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키튼이 속해 있는 세상은 인간의 이기심, 욕망, 악(惡)함으로 얼룩져 있지만 키튼의 눈을 통해 바라 본 세상은 그래도 아직까지는 아름다움과 순수성, 휴머니즘을 발견할 수 있는 희망이 있는 세상이다. 우라사와 나오키와 카츠시카 호크세이는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키튼과 같은 깊고 따뜻한 가슴으로, 진실하고 순수한 눈으로 세상과 이웃 그리고 자기 자신과 소통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만화를 그려나갔던 것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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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의미
허버트 리드 지음, 박용숙 옮김 / 문예출판사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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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사랑이란 무엇이냐,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처럼 하염없이 추상적이고 방대하며 난해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한 번쯤은 골똘히 생각해 보게 된다. 하버트 리드의 ‘예술의 의미’는 예술이란 무엇인지, 인간에게 있어서 예술은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에 관한 질문에 차분히 답을 해나간다. 이 책은 리드의 방대하고 해박한 예술적 지식을 바탕으로 적절하고 흥미로운 자료들을 배치하여 이해를 돕고 있으며 “예술의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그의 궁극적인 질문과 예술의 가치를 고찰하도록 인도하고 있다. 저자는 ‘예술이란 즐거운 형식을 만드는 시도다’라는 일반적이고 단순한 정의를 시작으로 예술과 미(美)의 구별에 대해서 설명한다. 아마도 이 책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부분은 ‘예술은 미와 아무런 필연적인 관계도 없다.’ 또는 ‘예술은 반드시 미가 아니다.’라는 저자의 주장일 것이다.

 

멕시코의 화가 프리다 칼로는 어린 시절 소아마비에 걸려 다리가 불편했고, 십대 후반 교통사고로 척추와 다리, 자궁을 크게 다쳐 평생 동안 삼십 번이 넘는 수술을 받아야 했으며 번번이 유산되어 아이도 가질 수 없었다. 또한 여성 화가이기에 겪어야 했던 한계와 그녀의 남편이자 라틴 아메리카를 대표하는 화가인 디에고 리베라의 외도로 인한 배신감 등이 그녀에게 고통을 주었다. 그녀의 대표작인 ‘나의 탄생’이나 ‘다친 사슴’을 보면 그녀가 정신적, 육체적으로 얼마나 고통스러운 삶을 보냈는지 짐작이 된다. ‘나의 탄생’은 시신으로 보이는 여성의 피 흘리는 다리 사이에서 프리다 칼로 자신이 처절하고 힘겹게 태어나는 장면을 그렸다. ‘다친 사슴’이라는 작품에서는 몸과 다리는 사슴이지만 머리는 그녀 자신을 그려 넣었고 이 사슴은 아홉 개의 화살을 맞은 채 피를 흘리고 있는 모습을 표현했다. 일곱 살 이후로 단 한 순간도 몸도 마음도 고통스럽지 않았던 날들이 없었던 그녀의 삶과 고뇌를 표현한 이 그림들은 결코 ‘예쁘지’ 않다. 하지만 고통 앞에서도 당당하게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주장하고 아픔과 고난 앞에 주저앉거나 포기하지 않고 죽는 날까지 그림을 통해서 자신의 고뇌와 슬픔을 그림으로 표현했다. 단지 보기에 편치 않고 예쁘지 않고 암울하고 슬픈 것이라 하여도 ‘예술’이라는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작품들은 무수히 많으며 리드가 거듭 주장하는 대로 예술이 반드시 미와 필연적 관계를 맺을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예술의 의미를 한 마디로 규정할 수도, 도식화 할 수도 없지만 예술이란 완전성과 조화, 균형과 균제와 같은 요소들을 포함하는 아름다움(흔히 우리가 이야기 하는)과 동시에 진심어린 진리와의 완전한 관계를 이루고 있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예술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또한 예쁘고 보기 좋다는 의미의 미가 아닌 진정한 의미로서의 미(美)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선(善)과 진(眞)과 함께 존재하는 것이며, 물질적 세계뿐만 아니라 비물질적이고 영적이며 비가시적인 세계로의 지향성을 추구하는 것이 바로 진정한 의미로써의 예술이자 미(美)이다. 예술가들의 예술 덕택에 인간의 영혼과 정신세계는 더욱 풍요롭고 윤택해지는 것이며 이러한 예술 작품들의 감상을 통해 해방감과 자유를 느낄 수 있도록 인도한다. 예술을 창조하는 것은 예술가들의 몫이지만 그 예술들 즉 글과 그림, 음악과 조각, 건축물들을 즐기고 경탄하고 긴장하고 해방감과 자유를 느끼고 경이로운 감동을 느끼는 것은 감상자의 몫이며 이것이 바로 예술이 가지고 있는 궁극의 가치이자 예술이 지니고 있는 진정한 의미가 아닐까. 

 

이 세상에서 훌륭한 행동을 하려면 모든 이기적인 목적을 단념해야 한다...그저 정직하게 살기 위해 이곳에 왔을 뿐, 따라서 인간은 인류를 위해 위대한 일들을 실현하고 고결한 일을 하고, 거의 모든 사람들의 저속한 삶을 끌고 가는 속악(俗惡)함을 초월하기 위해 살아 있는 것이다. (2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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