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카페에서 시 읽기
김용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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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카페에서 시 읽기>의 저자 김용규는 전작 <철학카페에서 문학 읽기>에서 카프카의 변신, 샤르트르의 구토,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오웰의 1984년 등 고전 명작들을 통해 철학에로의 접근, 세계를 이해하고자 했다. 이번에는 시詩를 통해 자기 이해, 삶의 이해를 시도하고 세계의 저변을 넓혀 나가며 다시 한 번 철학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전작이 문학을 통해 철학하고 철학을 통해 문학을 이해하는 과정이었다면 이제는 시를 통해 철학하고 동시에 철학을 통해 시를 이해하고 사유해 나가는 과정을 친절하지만 밀도 있게 천착하고 있다.

 

 

인간은 본래적으로 외로운 존재이다. 이 외로움에 관한 고찰은 철학에서도 시에서도 끊임없이 다루어지는 주제이며 소재이고 화두이다. 철학과 시뿐일까. 수많은 문학작품들, 그림들, 영화, 음악 등 모든 예술분야를 막론하고 인간의 외로움에 대한 고찰은 영원히 멈추지 않을 것이다. 비단 예술분야에만 국한되었겠는가. 인간이 본래적으로 외롭지 않았던들 SNS가 지금과 같이 폭발적일 수 있었을까. 저자 김용규는 이러한 인간의 외로움을 김소월, 정호승, 최승자, 나희덕 등의 시를 통해 사유하며 동시에 하이데거, 샤르트르 등을 비롯한 실존주의 철학자들의 철학을 들어 내버려진 인간의 외로움을 응시한다(만약, 저자가 인간의 실존론적인 외로움에 대해 이해하고 사유할 때에 정호승과 최승자의 시가 빠져 있었더라면 무척이나 섭섭했을 것이다).

 

정호승 시인이 읊은 외로움은 누군가가 그리워 생긴 것도 아니고, 자기 자신에 대한 도취와 집착에서 나온 것도 아니며, 오직 이 세상에 혼자 내던져졌다는 ‘실존론적 상황’에서 우러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그것은 우리가 아무 의미도, 목적도 없이 이 세계에 그냥 ‘내던져져 있다’는 것이지요. 마치 인간의 탄생이 모태에서 분리되어 모든 것이 불확실하고 오직 다가올 죽음만이 확실한 세상으로의 축출이듯 말입니다. (159, 161쪽)

 

 

저자는 첫 번째 챕터를 통해 시란 무엇인지 우리가 왜 시를 읽어야 하는지 어째서 시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지 그 당위성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시인이 시를 통해 열어 밝힌 하나의 세계 그리고 그 시를 읽는 이가 맞이하게 되는 또 하나의 세계. 시를 읽는다는 것, 시를 이해하고 사랑한다는 것은 곧 나의 세계가 더 넓어지고 깊어짐을 의미한다. 저자의 말처럼 바람 부는 날, 비 오는 날, 햇살 고운 날 시를 읽지 않으면 무엇을 해야 하나. 시를 분석하고 ‘공부’해야 했던 학창시절의 몹쓸 멍에를 이제 내려놓고 시인들이 영혼을 담아 노래하고 열어준 그 세계로 좀 더 가까이, 좀 더 깊이 다가서고 싶다. 나의 세계가 더 풍요로워지도록.

 

우리는 이처럼 자신의 이해와 해석에 의해 스스로 자신의 세계를 열어 밝히고 그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시인은 대상에 대한 자신의 이해와 해석인 은유 또는 시를 통해 하나의 세계를 열어 밝히는 사람이고, 시를 읽는 독자는 그 시의 텍스트를 ‘은유적으로 봄’으로써 시인이 열어 밝힌 세계를 다시 이해하고 해석하여 또 하나 자기의 세계를 열어 밝히는 사람이라는 거지요. (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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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명품 - 옛사람들의 일상과 예술에서 명품을 만나다
최웅철 지음 / Storyblossom(스토리블라썸)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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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적 영감도, 명품이라는 것도 멀리서 찾지 말고 우리 안에서 찾아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 분청사기에 고유의 전통과 함께 놀라운 현대성이 숨어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반만 년 역사 속에서 무르익은 우리네 지혜와 감성이 듬뿍 담긴 명품이 어딘가에서 우리 눈에 띄길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27쪽)

 

언제부터인가 세상은 아주 빠르게 변화해 가고 있다. 얼마 전에 구입한 휴대폰이 어느 틈엔가 구식이 되어버리고 신곡이라고 기세 좋게 등장했던 노래는 한두 달 후엔 한물 간 노래로 시들해지고, 어마어마한 광고와 함께 출시된 승용차는 어느새 구닥다리가 되어 있다. 즐기고 누릴 새도 없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어느 틈엔가 새로운 것이 등장한다. 이렇게 길들여진 사람들은 점점 더 간이 세고 자극적인 것, 새로운 것을 찾아 헤맨다. 이것은 채워지지 않는, 한계가 없는 욕망이고 욕구이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끝없이 초조하고 불안하다. ‘새로운 것’이 ‘좋은 것’이라는 등식은 결국 새로운 것에 대한 끊임없는 집착과 갈망으로 치닫고 있다.

 

<생활명품>의 저자 최웅철은 이제 잠시 가쁜 호흡을 고르며 새로운 것을 향한 욕망을 내려놓고 ‘옛것’에 대한, ‘우리 것’에 대한 놀라운 가치와 진정한 멋에 대해 이야기한다. 저자는 한국의 전통 공예와 회화, 옛 건축 문화, 우리의 전통 음식 등을 통해 ‘새로운 것’에서는 결코 찾을 수 없고 느낄 수 없는 고아한 아름다움을 전하고 있다. 완전한 원형이 아닌 살짝 찌그러진 달항아리를 통해 불완전의 미학을 이야기하고, 이도다완을 통해 아름다움을 초월한 무심의 경지를 전한다. 현대적인 것보다 더 모던한 사방탁자를 이야기하고, 입체파 화가도 혀를 내두를 책거리 그림의 다양한 시점과 수많은 소실점 등 이미 앞서 있던 우리의 미술에 대해 자랑스럽게 전하고 있다. 또한 고고한 선비정신과 풍류의 멋이 함께 공존하는 현실의 무릉도원 소쇄원을 소개하고, 폐족의 죄인이 되었으되 높고 고결한 정신이 그대로 살아 숨 쉬는 정약용의 다산초당을 전하며, 우리 음식문화의 핵심이자 정수인 장(된장, 고추장, 간장 등)의 독특하고 깊은 풍미 등을 이야기한다.

 

저자 최웅철은 옛것을 멀리하고 잊은 채 살아가는 우리네 모습에 안타까움과 책임감을 느끼며 이 책을 집필했다고 한다. 정작 우리들 자신보다 우리 것에 더 감탄하고 탄복하는 외국인들의 모습과 우리 것은 낡은 것,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치부하는 우리네 모습을 마주하며 저자는 우리 것의 고고한 가치를 알기에 더더욱 빚진 마음이 들었을 터이다. 저자의 마음이 담긴 이 책을 통해 ‘좋은 것’이란 즉 진정한 ‘명품’이란 새로운 것, 값비싼 것이 아니라 다름 아닌 우리 민족의 지혜와 정신 그리고 영혼과 심성이 담긴 ‘우리 것’이라는 진리를 다시 한 번 반추하고 깨닫게 된다.

 

어린 시절 먹었던 음식들은 지금도 내게 맛의 기준이 되고 있다. 그리고 그 맛에 가까운 맛을 나는 ‘맛있다’라고 표현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이제껏 먹어본 음식 가운데 가장 맛있었던 것과 가까운 맛이 날 때 ‘맛있다’라고 한다. ‘아름답다’라는 단어도 마찬가지인데, 어원을 찾아보면 ‘내가 아는 것에 가까운 것이다’라고 되어 있다. ‘맛있다’거나 ‘아름답다’라는 느낌은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나오는 게 아닌가 싶다. 그래서 지금도 나는 어머니의 맛을 그리워하고 또 찾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생활명품』 머리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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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의 아내
테이아 오브레트 지음, 왕은철 옮김 / 현대문학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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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호랑이의 아내>는 현실과 비현실, 삶과 죽음, 순수와 추악, 빛과 그늘, 어른과 아이, 과거와 미래 등 모든 대비되는 것들과 상반되는 것들의 경계를 매우 유려하게 몽환적으로, 환상적으로 넘나든다.  

 이 소설의 화자인 내과의 나탈리아는 할머니로부터 할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전해 듣는다. 손녀인 나탈리아를 만나러 가겠다는 말을 남기고 터무니없는 곳에서 혼자 죽음을 맞이한 할아버지는 손녀 나탈리아와 각별한 사이였다. 동화인지 전설인지 설화인지 아니면 실제인지 알 수 없는 수많은 이야기들을 나탈리아에게 들려주었던 할아버지. 나탈리아는 할아버지의 불가해한 죽음을 이해하고자 할아버지의 삶과 죽음의 행적을 좇아가기 시작하고 이것이 곧 이 소설의 굵은 줄기가 된다.  

 독일군의 폭격으로 동물원을 빠져나온 호랑이, 마을사람들에게 쫓기는 이 호랑이를 지켜주는 것을 삶의 낙이자 위안으로 삼은 귀머거리 소녀, 악사가 되고 싶었지만 백정이 되어버린 소녀의 남편, 박제를 통해 죽음을 초월하고자 했던 사냥꾼, 치유의 비밀을 터득하고자 했던 약제사, 사랑하는 사람으로 인하여 영원히 죽을 수 없게 된 남자, 2차 세계대전 당시 군복무를 했던 나탈리아의 할아버지, 심지어 전쟁과 무관한 듯 보이는 화자 나탈리아까지도 이 소설 속에서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전쟁’이라는 이 광포한 단어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이들 모두 전쟁으로 인한 상처와 아픔, 전쟁이 남긴 황폐함과 수많은 난제들을 고스란히 짊어져야 했다. 그리고 이 소설의 저자 테이아 오브레트까지도.  

 소설 <호랑이의 아내>가 크게 이슈가 되었던 이유의 중심에는 저자 테이아 오브레트가 있다. 25살이라는 약관의 나이에 이토록 세련되고 유려한 필력을 지녔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놀랍고-어쩌면 편집자의 능력일지도-소설을 통해 드러나는 그녀의 깊고 농밀한 정신세계를 보며 절로 감탄하게 된다. 하지만 주목해야 할 점은 그녀가 속해 있던 세계일 것이다. 유럽의 화약고라 불리는 발칸반도 태생인 테이아 오브레트는 내전으로 인하여 고향을 등진 채 이집트로 떠나야 했고, 전쟁이 끝난 이후에는 그녀가 가장 의지하고 사랑했던 할아버지와 떨어진 채 미국에 정착해야 했다. 소설 속에서 등장하는 나탈리아는 곧 저자 테이아 오브레트 자신이며 나탈리아의 할아버지의 모습에는 테이아 오브레트의 할아버지가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다. 아마도 그녀의 세계가 그녀로 하여금 글을 쓰도록, 글을 쓸 수밖에 없도록 고무시키고 고취시켰으리라.  

 소설 <호랑이의 아내>가 담고 있는 가장 큰 가치는 전쟁이라는 비극적 현실을 주제로 한 소설이지만 그 비극의 무게에 함몰되지 않고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시선과 사고를 견지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통찰력 있는 은유를 바탕으로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유려한 구성이 또한 그러하다. 그러기에 이토록 아련하고도 아름다운 이야기가 가능했던 것이 아닐까.

 

“이건 구슬라입니다.”
(…)
“가엾게도 작은 악기네요. 줄도 하나밖에 없고요.”
“누군가가 내일 내게 더 큰 악기를 줄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아직 외줄을 포기할 생각이 없답니다.”
“이유가 뭐죠? 이걸로 뭘 할 수 있는데요?”
루카는 잠시 얼굴이 타오르는 듯 뜨거워짐을 느꼈다.
“오십 개의 줄은 하나의 노래를 부르지만,
이 외줄은 천 개의 이야기를 품고 있답니다.”

-호랑이의 아내 중 2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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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생활의 발견
와타나베 쇼이치 지음, 김욱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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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 책은 곧 나를 말해주는 것이다. 즉, 나만의 고전을 만드는 것은 곧 나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40쪽) 당신의 장서(藏書)를 보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 (44쪽) 서재를 꾸미는 것은 학문을 생활의 일부로 여기며 나를 닦는 길이라고 할 수 있다. (69쪽) 

 <지적생활의 발견>은 평생을 학문에 몰두하고 매진하며 살아온 일본의 영문학자이자 평론가인 ‘와타나베 쇼이치’의 저서이다. 그는 인간이란 본능적으로 지적 삶을 추구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기에 여타의 동물들과 구별된다고 밝히면서 자신이 그간 영위해 온 지적생활의 즐거움과 만족감, 당위성과 필요성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앞서, 와타나베 쇼이치는 인간이란 지적추구를 통해 기쁨과 풍요를 느끼는 존재이지만 오늘날 현대인들은 분주하고 고단한 현실 속에서 지적생활의 기쁨과 행복을 알지 못한 채 혹은 외면한 채 살아가고 있음을 안타까워한다. 그렇다면 지적생활을 누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내용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바로 ‘끊임없이 책을 읽고 지속적으로 글을 써라이다.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읽어도 좋은 나만의 책 즉, 나만의 고전이 있는지 그리고 이러한 고전을 만드는 것이야말로 곧 나를 만들어가고 나를 정립해가는 과정이며, 나만의 서재를 가꾸어 나가는 것이 곧 나를 닦는 과정이라고 이야기한다. 즉 나의 책, 나의 서재, 나의 장서가 곧 내 자신을 설명하고 말해주는 것이며 이것이 곧 지대한 지적욕구에 비하여 지적생활을 누리지 못하는 현대인들이 지적생활을 영위하고 가능케 할 수 있는 길이 되어 줄 것이라는 게 이 노학자의 견해이다. 그 규모가 작고 소소하다 하더라도 나만의 장서, 나만의 책을 가꾸어 나가고, 그 책을 읽고 사색하는 시간이 짧고 간소하다 하더라도 지속적으로 실천하고 수행한다면 풍요롭고 만족스러운 지적생활을 향유할 수 있다는 것. 저자는 오랜 시간 축적된 자신의 경험과 노하우를 바탕으로 지적생활을 위한 여러 방법들과 권고사항들을 제시하면서 정신적으로 내적으로 좀 더 풍요로운 일상을 위해, 삶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이 책을 통해 조언하고 있다.  

 저자의 견해에 대하여 대체적으로 공감하며 특히 ‘땀을 흘리고 있는 동안에 영감도 함께 떠오르는 것이 아닐까 싶다. 겉으로 보기에는 기계적으로 움직이고 있지만, 오히려 마음은 자유로워져 통찰이 깊어지고 새로운 영감과 구상이 떠오르는 것이다. 즉, 영감이 떠오를 때까지 기다리기보다 일단 작업에 착수해 일을 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117쪽)와 같은 저자의 생각에 크게 공감한다. 우리가 기억하는 위대한 작가들 대부분이 뜻밖의 영감을 통해서가 아니라 매일 매일 규칙적, 지속적으로 아주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 훌륭한 작품들을 탄생시켜 왔다. 2006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오르한 파묵은 하루에 9~10시간씩 매일 글을 쓰는 것으로 유명하다. 파묵은 작가의 첫 번째 덕목으로 바늘로 우물을 파는 인내심을 꼽았다. 오죽하면 작가 황석영은 글은 머리로 쓰는 게 아니라 엉덩이로 쓰는 것이라고 했을까. 

 그러나 저자 와타나베 쇼이치의 모든 견해에 동의할 수는 없다. 우선 ‘건전한 책(40-42쪽)’에 관한 그의 생각과 그 생각에 대한 사례는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 저자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작품은 건전하지 못하며 읽으면 기분이 좋지 않고ㅡ그의 작품들이 유쾌하지 않은 건 사실이다ㅡ, 학창 시절 아쿠타가와의 작품을 즐겨 읽던 친구가 있었는데 중학교 때부터 문란을 행동을 했으며 훗날 책을 읽는 지적생활과는 거리가 멀었다고 술회한다. 개인적으로 다섯 손가락 안에 꼽는 매우 좋아하는 작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작품을 거의 다 읽어버린 나로서는 난감하기 그지없었고ㅡ내 자신이 그동안 책이라고는 통 읽지 않고 살아왔는지 또 문란한 인간은 아닌지 잠시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ㅡ설령 좋아하는 작가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이 대목에서는 웃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우리나라 대학의 어떤 교수가 작가 이상의 작품들은 건전하지 못하고 읽으면 기분이 좋지 않고 이상의 작품을 읽으면 문란해지고 나중에 책이라고는 전혀 읽지 않는 사람이 될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것과 뭐가 다르겠는가. 일본인이 그것도 일본 대학에 몸담고 있는 영문학 교수가 아쿠타가와의 작품을 이렇게 평가한 그 용기 하나만큼은 높이 산다. 

 ‘장서의 질을 판단하는 기준(86-88쪽)’ 중 장서의 질은 내용뿐 아니라 아름다운 모로코가죽 장정에 금박을 입힌 책일 때에 그 질이 높아지고, 어차피 남은 생애 동안 그렇게 많은 책을 읽을 수 없다면 값싼 문고판보다는 가격이 비싸더라도 고급 양장본이나 삽화가 좋은 책을 읽어야 하고, 토머스 그레이의 시를 싸구려 복사판으로 읽는다면 어쩐지 인생이 아깝다는 부분에서는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김용택 시인의 ‘시가 내게로 왔다’ 중 몇몇 구절들이 생각난다. 이용악 시인의 시집 ‘낡은 집’의 복사본을 만나던 날의 기쁨과 충격을 김용택 시인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고 이야기하면서 그 ‘낡은 집’은 자신이 만난 시집 가운데 가장 완벽한 시집이었다고 술회한다. 또 김용택 시인이 가장 좋아하는 화가 박수근의 그림을 신문이나 잡지에서 오려 방 여기저기 붙여 놓았는데 언젠가 아내랑 그 그림 앞에 서서 “우리는 참 복도 많아, 이런 그림 앞에 서 있을 수 있다니”라며 행복해했다고 이야기한다. 물론 이용악 시인의 시집이 모로코가죽 장정에 금박이 입혀 있고, 방에 박수근 화가의 진품 그림이 걸려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김용택 시인이 복사본 시집을 보면서, 신문과 잡지에서 오려낸 그림을 보면서 ‘아, 내 인생이 어쩐지 아깝구나’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저자 와타나베 쇼이치가 주장하는 지적생활을 통한 정신적 풍요로움, 내적 만족감을 진정으로 깨닫고 누리는 삶이란 다름 아닌 김용택 시인의 삶의 태도(attitude)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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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타는 왜 사막으로 갔을까 - 살아남은 동물들의 비밀
최형선 지음 / 부키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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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집이 작다고, 다리가 짧다고 신세타령하는 동물은 없다. 그들은 숱한 세월 동안 자신에게 적합한 모습을 찾아 적응했다. 그래서 살아남았다. 동물은 모두 자신의 전략을 구사하면서 진보한다. (19쪽)

저자 최형선은 생물학자이자 생태학자로 저서 <낙타는 왜 사막으로 갔을까>를 통해 매순간 생사를 넘나드는 치열한 생존 경쟁과 극한의 환경을 이겨낸 8종의 동물들-치타, 줄기러기, 낙타, 일본원숭이, 박쥐, 캥거루, 코끼리, 고래-을 소개한다. 동시에 과학적 사고를 바탕으로 생태학적, 진화론적, 환경학적으로 때론 문학적, 철학적으로 여전히 생존해 있는 동물들의 궤적을 좇아간다. 이들이 생존 경쟁 속에서, 극한의 환경 가운데서 어떻게 살아남고 극복해냈는지 또 어떻게 적응하고 진화해왔는지 밝히면서 비단 인간뿐 아니라 생명(生命)을 품고 있는 존재들의 위대함, 생존의 치열함과 장엄함을 이야기한다.
 

치타는 약점이 많지만 허장성세로 자신을 그럴 듯하게 꾸미는 일에는 관심이 없다.(…)치타가 관심을 쏟은 것은 자신이 남과 무엇이 다른지 파악하고, 그 다른 부분을 대폭 강화하는 일이었다. 치타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이 사는 곳, 함께 사는 동물과 경쟁자들, 자신의 위상과 한계점, 그리고 강점 등에 대한 깨달음과 정확한 판단이었다. 그러다 보니 독특한 달리기 법을 터득했고, 그것이 곧 생존 전략이 되었다. (13쪽)

다른 육식 동물들에 비해 힘이 부족하고 턱도, 이빨도 약한 치타는 자신이 사냥한 먹이조차도 제대로 먹지 못할 때가 많다. 지능도 낮은 편이고, 애완용으로 키워질 만큼 그다지 사납지도 않고, 거의 대부분이 무리 생활을 하지 않아 홀로 살며, 남이 사냥한 먹이를 가로채거나 빼앗는 패악도 떨지 않는다는 치타는 고독하고 바보스러울 만큼 정직하다. 먹이사슬의 저 꼭대기에 위치한 포식자이면서도 여타의 육식 동물들과는 사뭇 다른 치타는 마치 육식 동물계의 아웃사이더 같은 쓸쓸함이 느껴진다. 그럼에도 치타는 여전히 정글 가운데 생존해 있으며 포식자로서 맹위를 떨치고 있다. 어째서일까.

치타의 순간 속도는 상상을 뛰어넘는다. 치타는 단 1초에 만에 30미터를 달릴 수 있고 100미터를 달리는데 6초가 걸린다. 지구상에서 가장 빠른 포유류인 치타의 최대 속도는 110~120km/h. 머리부터 발톱까지 치타의 모든 신체 부위는 ‘빨리 달리기’에 적합하도록 진화했다. 포식자 노릇을 하기엔 적합하지 않았던 작은 턱과 이빨은 사실 치타가 빨리 달리는데 있어서 큰 장점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치타는 자신의 약점과 강점을 정확히 파악했고 약점이 더 이상 약점이 아닌 강점을 더욱 강화하는 필수요소로 이용했다. 이것이 바로 치타의 생존 전략이었으며 진화의 근간이 되었고, 여전히 먹이사슬의 정점에서 존립하고 있는 이유가 되어주었다.

낙타는 무아경 속에서 일정 속도로 걷는 것처럼 보인다. 땡볕 내리쬐는 사막에서 자신에게 달리기 능력이 있음을 모른 체하는 것은 낙타의 남다른 지혜다.(…)자연의 이치 속에서 구도의 길을 찾는 순례자처럼 낙타는 마음을 비우고 극한 상황을 덤덤하게 이겨 낸다. 그런 그에게서는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공평한 마음이 느껴진다. 지나치거나 모자라지 않고, 한쪽으로 기울지도 않고, 변함없이 떳떳하다. 중용中庸의 도리가 낙타의 천성일까? (90쪽)

‘낙타는 왜 사막으로 갔을까’라는 질문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낙타는 애초부터 사막에서 살았던 동물이 아니다. 낙타의 원래 고향은 북아메리카 대륙이었지만 300만 년 전 지각판의 이동과 함께 동식물들의 대이동이 있었고, 이 과정에서 낙타는 아무도 가려고 하지 않는 극한의 환경, 사막을 향해 갔다. 이 책의 저자뿐 아니라 그 누구도 낙타가 왜 사막으로 이동했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지만 저자의 추론과 상상력이 상당히 재미있다. 북아메리카에서 거주하고 있던 낙타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동물들이 주전 경쟁에서 밀려나 몰락하는 걸 지켜보면서 떠나야겠다고 마음먹고, 사나운 육식 동물들이 득실대는 초원에서 사느니 차라리 아무도 가지 않는, 포식자가 많지 않은 사막에나 가서 맘 편히 살아야겠다고 생각한 것이 아닐까 하는 과학적 상상력 말이다.

낙타는 치열한 경쟁을 피하는 대신 극한의 환경을 극복하고 인내하는 길을 택했다. 치타가 빨리 달리기에 최적화된 동물이라면 낙타는 ‘사막에서 살기’에 최적화된 동물이다. 땀 한 방울조차 낭비하는 법이 없고, 메마른 가시 달린 가지에서도 양분과 수분을 흡수하여 저장하는 방법을 안다. 낙타는 아무리 힘들어도 숨을 헐떡이지 않는다. 어떤 상황에서도 흥분하지 않고 언제나 시속 5킬로미터의 속도를 유지함으로써 에너지 소모를 최소화한다. 사막의 열기를 피하려고도, 태양 앞에서 숨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낙타는 사막에서 살아남기 위해 지독한 인내와 불가해한 평정심을 익혔던 것이다. 한낱 짐승에 불과한 낙타의 두 눈이 그토록 초연하고 깊고 지긋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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