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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타는 왜 사막으로 갔을까 - 살아남은 동물들의 비밀
최형선 지음 / 부키 / 2011년 3월
평점 :
몸집이 작다고, 다리가 짧다고 신세타령하는 동물은 없다. 그들은 숱한 세월 동안 자신에게 적합한 모습을 찾아 적응했다. 그래서 살아남았다. 동물은 모두 자신의 전략을 구사하면서 진보한다. (19쪽)
저자 최형선은 생물학자이자 생태학자로 저서 <낙타는 왜 사막으로 갔을까>를 통해 매순간 생사를 넘나드는 치열한 생존 경쟁과 극한의 환경을 이겨낸 8종의 동물들-치타, 줄기러기, 낙타, 일본원숭이, 박쥐, 캥거루, 코끼리, 고래-을 소개한다. 동시에 과학적 사고를 바탕으로 생태학적, 진화론적, 환경학적으로 때론 문학적, 철학적으로 여전히 생존해 있는 동물들의 궤적을 좇아간다. 이들이 생존 경쟁 속에서, 극한의 환경 가운데서 어떻게 살아남고 극복해냈는지 또 어떻게 적응하고 진화해왔는지 밝히면서 비단 인간뿐 아니라 생명(生命)을 품고 있는 존재들의 위대함, 생존의 치열함과 장엄함을 이야기한다.
치타는 약점이 많지만 허장성세로 자신을 그럴 듯하게 꾸미는 일에는 관심이 없다.(…)치타가 관심을 쏟은 것은 자신이 남과 무엇이 다른지 파악하고, 그 다른 부분을 대폭 강화하는 일이었다. 치타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이 사는 곳, 함께 사는 동물과 경쟁자들, 자신의 위상과 한계점, 그리고 강점 등에 대한 깨달음과 정확한 판단이었다. 그러다 보니 독특한 달리기 법을 터득했고, 그것이 곧 생존 전략이 되었다. (13쪽)
다른 육식 동물들에 비해 힘이 부족하고 턱도, 이빨도 약한 치타는 자신이 사냥한 먹이조차도 제대로 먹지 못할 때가 많다. 지능도 낮은 편이고, 애완용으로 키워질 만큼 그다지 사납지도 않고, 거의 대부분이 무리 생활을 하지 않아 홀로 살며, 남이 사냥한 먹이를 가로채거나 빼앗는 패악도 떨지 않는다는 치타는 고독하고 바보스러울 만큼 정직하다. 먹이사슬의 저 꼭대기에 위치한 포식자이면서도 여타의 육식 동물들과는 사뭇 다른 치타는 마치 육식 동물계의 아웃사이더 같은 쓸쓸함이 느껴진다. 그럼에도 치타는 여전히 정글 가운데 생존해 있으며 포식자로서 맹위를 떨치고 있다. 어째서일까.
치타의 순간 속도는 상상을 뛰어넘는다. 치타는 단 1초에 만에 30미터를 달릴 수 있고 100미터를 달리는데 6초가 걸린다. 지구상에서 가장 빠른 포유류인 치타의 최대 속도는 110~120km/h. 머리부터 발톱까지 치타의 모든 신체 부위는 ‘빨리 달리기’에 적합하도록 진화했다. 포식자 노릇을 하기엔 적합하지 않았던 작은 턱과 이빨은 사실 치타가 빨리 달리는데 있어서 큰 장점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치타는 자신의 약점과 강점을 정확히 파악했고 약점이 더 이상 약점이 아닌 강점을 더욱 강화하는 필수요소로 이용했다. 이것이 바로 치타의 생존 전략이었으며 진화의 근간이 되었고, 여전히 먹이사슬의 정점에서 존립하고 있는 이유가 되어주었다.
낙타는 무아경 속에서 일정 속도로 걷는 것처럼 보인다. 땡볕 내리쬐는 사막에서 자신에게 달리기 능력이 있음을 모른 체하는 것은 낙타의 남다른 지혜다.(…)자연의 이치 속에서 구도의 길을 찾는 순례자처럼 낙타는 마음을 비우고 극한 상황을 덤덤하게 이겨 낸다. 그런 그에게서는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공평한 마음이 느껴진다. 지나치거나 모자라지 않고, 한쪽으로 기울지도 않고, 변함없이 떳떳하다. 중용中庸의 도리가 낙타의 천성일까? (90쪽)
‘낙타는 왜 사막으로 갔을까’라는 질문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낙타는 애초부터 사막에서 살았던 동물이 아니다. 낙타의 원래 고향은 북아메리카 대륙이었지만 300만 년 전 지각판의 이동과 함께 동식물들의 대이동이 있었고, 이 과정에서 낙타는 아무도 가려고 하지 않는 극한의 환경, 사막을 향해 갔다. 이 책의 저자뿐 아니라 그 누구도 낙타가 왜 사막으로 이동했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지만 저자의 추론과 상상력이 상당히 재미있다. 북아메리카에서 거주하고 있던 낙타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동물들이 주전 경쟁에서 밀려나 몰락하는 걸 지켜보면서 떠나야겠다고 마음먹고, 사나운 육식 동물들이 득실대는 초원에서 사느니 차라리 아무도 가지 않는, 포식자가 많지 않은 사막에나 가서 맘 편히 살아야겠다고 생각한 것이 아닐까 하는 과학적 상상력 말이다.
낙타는 치열한 경쟁을 피하는 대신 극한의 환경을 극복하고 인내하는 길을 택했다. 치타가 빨리 달리기에 최적화된 동물이라면 낙타는 ‘사막에서 살기’에 최적화된 동물이다. 땀 한 방울조차 낭비하는 법이 없고, 메마른 가시 달린 가지에서도 양분과 수분을 흡수하여 저장하는 방법을 안다. 낙타는 아무리 힘들어도 숨을 헐떡이지 않는다. 어떤 상황에서도 흥분하지 않고 언제나 시속 5킬로미터의 속도를 유지함으로써 에너지 소모를 최소화한다. 사막의 열기를 피하려고도, 태양 앞에서 숨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낙타는 사막에서 살아남기 위해 지독한 인내와 불가해한 평정심을 익혔던 것이다. 한낱 짐승에 불과한 낙타의 두 눈이 그토록 초연하고 깊고 지긋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던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