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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의 아내
테이아 오브레트 지음, 왕은철 옮김 / 현대문학 / 2011년 9월
평점 :
절판
소설 <호랑이의 아내>는 현실과 비현실, 삶과 죽음, 순수와 추악, 빛과 그늘, 어른과 아이, 과거와 미래 등 모든 대비되는 것들과 상반되는 것들의 경계를 매우 유려하게 몽환적으로, 환상적으로 넘나든다.
이 소설의 화자인 내과의 나탈리아는 할머니로부터 할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전해 듣는다. 손녀인 나탈리아를 만나러 가겠다는 말을 남기고 터무니없는 곳에서 혼자 죽음을 맞이한 할아버지는 손녀 나탈리아와 각별한 사이였다. 동화인지 전설인지 설화인지 아니면 실제인지 알 수 없는 수많은 이야기들을 나탈리아에게 들려주었던 할아버지. 나탈리아는 할아버지의 불가해한 죽음을 이해하고자 할아버지의 삶과 죽음의 행적을 좇아가기 시작하고 이것이 곧 이 소설의 굵은 줄기가 된다.
독일군의 폭격으로 동물원을 빠져나온 호랑이, 마을사람들에게 쫓기는 이 호랑이를 지켜주는 것을 삶의 낙이자 위안으로 삼은 귀머거리 소녀, 악사가 되고 싶었지만 백정이 되어버린 소녀의 남편, 박제를 통해 죽음을 초월하고자 했던 사냥꾼, 치유의 비밀을 터득하고자 했던 약제사, 사랑하는 사람으로 인하여 영원히 죽을 수 없게 된 남자, 2차 세계대전 당시 군복무를 했던 나탈리아의 할아버지, 심지어 전쟁과 무관한 듯 보이는 화자 나탈리아까지도 이 소설 속에서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전쟁’이라는 이 광포한 단어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이들 모두 전쟁으로 인한 상처와 아픔, 전쟁이 남긴 황폐함과 수많은 난제들을 고스란히 짊어져야 했다. 그리고 이 소설의 저자 테이아 오브레트까지도.
소설 <호랑이의 아내>가 크게 이슈가 되었던 이유의 중심에는 저자 테이아 오브레트가 있다. 25살이라는 약관의 나이에 이토록 세련되고 유려한 필력을 지녔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놀랍고-어쩌면 편집자의 능력일지도-소설을 통해 드러나는 그녀의 깊고 농밀한 정신세계를 보며 절로 감탄하게 된다. 하지만 주목해야 할 점은 그녀가 속해 있던 세계일 것이다. 유럽의 화약고라 불리는 발칸반도 태생인 테이아 오브레트는 내전으로 인하여 고향을 등진 채 이집트로 떠나야 했고, 전쟁이 끝난 이후에는 그녀가 가장 의지하고 사랑했던 할아버지와 떨어진 채 미국에 정착해야 했다. 소설 속에서 등장하는 나탈리아는 곧 저자 테이아 오브레트 자신이며 나탈리아의 할아버지의 모습에는 테이아 오브레트의 할아버지가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다. 아마도 그녀의 세계가 그녀로 하여금 글을 쓰도록, 글을 쓸 수밖에 없도록 고무시키고 고취시켰으리라.
소설 <호랑이의 아내>가 담고 있는 가장 큰 가치는 전쟁이라는 비극적 현실을 주제로 한 소설이지만 그 비극의 무게에 함몰되지 않고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시선과 사고를 견지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통찰력 있는 은유를 바탕으로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유려한 구성이 또한 그러하다. 그러기에 이토록 아련하고도 아름다운 이야기가 가능했던 것이 아닐까.
“이건 구슬라입니다.”
(…)
“가엾게도 작은 악기네요. 줄도 하나밖에 없고요.”
“누군가가 내일 내게 더 큰 악기를 줄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아직 외줄을 포기할 생각이 없답니다.”
“이유가 뭐죠? 이걸로 뭘 할 수 있는데요?”
루카는 잠시 얼굴이 타오르는 듯 뜨거워짐을 느꼈다.
“오십 개의 줄은 하나의 노래를 부르지만,
이 외줄은 천 개의 이야기를 품고 있답니다.”
-호랑이의 아내 중 26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