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력과 마력의 도시 로마 산책 - 정태남의 유럽 문화 기행
정태남 글.사진 / 마로니에북스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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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시절의 교양 과목 하나가 문득 생각난다. 아마도 그 과목의 과목명이 ‘서양음악의 역사’였던 것 같은데 가벼운 마음으로 선택했던 교양 과목 하나가 그 학기 최고의 복병으로 등장하여 학기 내내 나를 괴롭히고 천대하고 멸시했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황당무계한 음악용어들과 중세 이후로는 기보조차 하지 않는 고대의 악보들, 르네상스 이전 작곡가들의 생소한 이름들과 음악의 제목들. 그리고 서양음악이라고 하면 독일이 전부인 줄 알았던 나에게 “천만해, 서양음악이 아닌 서양음악의 ‘역사’를 공부하려면 서양의 문화를 알아야 하고 그러려면 기독교 문화를 이해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선 로마를 알아야 하고 라틴어 정도는 읽을 줄 알아야 합니다.”라는 교수의 청천벽력 같은 발언은 이제 과목 취소조차 할 수 없는 시점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결국 팔자에도 없던 고대 악보 해독(?)하기와 라틴어 읽기, 더불어 로마라는 나라를 배워가면서 한 가지 분명하게 알 수 있었던 것은 로마라는 나라 앞에는 “유구한, 장대한 그러나 과격한, 잔인한 하지만 찬란한 역사를 가진”이라는 수식어를 붙여주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바로 이 로마를 저자는 제3자의 마음과 건축가의 눈으로 캄피돌리오 광장, 콜로세움, 트레비 분수, 포폴로 광장, 판테온, 베드로 대성당 등을 산책하며 글과 카메라에 담아낸다. 매력과 마력의 도시 로마로.



<매력과 마력의 도시 로마 산책>의 저자는 이 책의 첫 번째 챕터에서 과거 로마의 위상을 단 두 음절로 정의한다. 세계의 머리. 물론 저자가 만들어 낸 말은 아니지만 혹자는 이러한 표현을 차용한 것에 대해 굴절된 오리엔탈리즘이라고 비판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로마라는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조금만 살펴보거나 혹은 이 책의 덮을 때쯤이면 세계의 머리는 아닐지언정 과연 과거 유럽의 머리였음에는 분명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지 않을까. 언젠가 로마에 가게 된다면 반드시 가보고 싶은 곳이 바로 트레비 광장이다. 그리고 그 트레비 광장 전면에 세워져 있는 트레비 분수. 교통의 혼잡스러움과 소음을 헤치고 베네치아 광장 근처의 어느 좁은 골목으로 들어서면 어디선가 아련히 물소리가 들여온다고 한다. 마치 도시가 아닌 골 깊은 자연 어딘가로 인도받는 느낌을 받으며 그 물소리를 따라가다 보면 갑자기 확 트인 광장이 눈 앞에 펼쳐지고 어마어마한 크기와 규모의 트레비 분수가 전면에 등장한다.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 낸 이 엄청난 분수는 과거 로마를 중심으로 모여들던 세계 각국의 사람들의 목을 축이는 역할을 했다는데 중요한 것은 로마의 수로가 얼마나 발달했는지를 알 수 있게 해 주는 건축물이자 과히 세계의 머리였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상징물이라는 사실이다. 이 분수에 동전을 한 번 던지면 다시 로마를 찾게 되고, 동전을 두 번 던지면 사랑을 찾게 된다는 전설을 가진 트레비 분수에는 동전이 그득하다. 트레비 광장을 비롯한 콜로세움과, 포폴로 광장, 판테온, 베드로 대성당 모두 규모의 웅장함과 장구한 역사로 그리고 너무나 찬란한 아름다움으로 인간을 압도한다.



하지만 책을 읽으며 내가 정말 로마에 압도당한 것은 규모와 크기 때문이 아니었다. 로마의 심장, 포로 로마노에 가면 로마의 영웅 한 사람을 만나게 된다. 바로 율리우스 카이사르. 줄리어스 시저라는 이름으로 더 익숙한 그의 신전과 동상은 로마의 중심 포로 로마노에 세워져 있다. 카이사르는 영웅이었고 로마 시민들로부터 존경 받았지만 독재자였고 그 만큼 적도 많았다. 결국 그가 신임했던 브루투스에게 암살당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가 화장된 곳에 세워진 그의 신전 또한 오랜 세월의 흐름 속에서 폐허로 변해 그 유적지는 참으로 고적하고 쓸쓸하지만 지금까지도 누군가 찾아와 폐허로 변해 버린 카이사르의 화장터 위에 꽃을 두고 간다. 로마의 그 으리으리하고 엄청난 건물들과 유적지들 가운데 굳이 이런 곳을 손꼽는 이유는 뭘까. 그건 아마도 눈에 보이는 화려함과 웅장함보다는 로마인들의 그 대단한 자긍심에 주목하라는 것이리라. 자신들의 문화를 사랑하고 선조들의 위대함을 되새기면서 로마의 역사와 문화를 살피고 지켜나가는 로마인들의 마음 속에 자리잡은 Rome이라는 단어 그 자체에 대한 무궁한 자긍심. 바로 로마인들의 이러한 자부심과 자긍심이 오늘날의 로마를 계속해서 보전하고 지켜나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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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딜런 평전 역사 인물 찾기 25
마이크 마퀴스 지음, 김백리 옮김 / 실천문학사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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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P판을 모으는 소소한 취미를 가지고 있기에 많지는 않지만 제법 여러 장의 LP판을 소장하고 있고, 그러다보니 내 세대의 음악뿐만 아니라 그 이전의 그러니까 내가 태어나기도 전의 음악들도 즐겨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많았던 것 같다. 아니 원인과 결과 뒤바뀐 건가? 60, 70년대 음악을 좋아하다보니 LP판 앞에만 서면 소장의 욕구를 감추지 못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방 한 구석을 메우고 있는 LP들 중 유난히 손이 많이 가는 앨범 하나를 꼽으라고 한다면 오래 전 친구로부터 선물 받은 잔뜩 낡아버린 ‘Bob Dylan's Greatest Hit’라는 앨범일 것이고, 아마도 이 앨범을 통해서 밥 딜런이라는 사람의 음악을 접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서정적인 기타 소리와 나지막한 음성, 신경 하나하나를 건드리는 하모니카 소리, 유치할 정도로 솔직하고 직선적인 가사들, 그리고 때론 너무나 관념적이고 난해한 시詩 같은 가사들...그의 음악은 들어서 알지만 정작 그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무엇을 위해 노래했는지에 대해서는 그저 대략적으로만 알고 있었기에 구체적으로, 좀 더 심도 있게 ‘밥 딜런’이라는 인물에 관하여 알고 싶어졌다. 마이크 마퀴서의 <밥 딜런 평전>을 길잡이 삼아서.



60년대는 전 세계가 두 가지의 이데올로기를 내세워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고 그 중심에는 미국이라는 나라가 있었다. 2차 세계대전이 종전되고 사람들은 평화를 원했지만 이념의 대립은 다시금 사람들을 광기 속으로 몰아넣었고, 게다가 여러 인종들이 뒤섞여 있던 미국에서는 흑백의 대립으로 혼란과 폭력이 일상다반사가 되어가고 있었다. 반反인종차별을 주장하는 거대한 집회가 열린 어느 날, 병약해 보이는 백인 청년이 기타 하나를 들고 대중들 앞에 그러니까 흑인들 앞에 나와 노래를 부른다. 어떤 이들은 감동했고, 어떤 이들은 조소와 야유를 퍼부었다. 그의 이름은 밥 딜런. 훗날 그는 자유와 평등, 민주화 운동을 상징하는 미국의 아이콘으로, 저항음악의 상징으로, 포크 음악의 거장으로 불리우게 된다. 어째서 <밥 딜런 평전>을 집필한 마이크 마퀴서는 책의 초반부에 이러한 일화들(9.11테러 이후 콘서트에서 노래만 할 뿐 그 어떠한 정치적 언급도 하지 않았다거나, 흑인들에게 찬사와 조소를 동시에 받았다는 일화 등)을 나열했던 것일까. 그 이유는 책을 덮을 때 쯤 알 수 있게 된다. 그게 그의 삶이였으므로. 그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그렇게 찬사와 조소가 혼재된 삶 속에서 살고 있다. 딜런은 사람들로부터 찬사 받는 걸 즐기지도 않았고, 사람들의 비판이나 조소를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그는 단지 한 사람의 개인으로 사람들과 소통하기 위해서 노래를 불렀고, “나는 그네 타는 곡예사”라고 자기 스스로를 이야기 한다.



대중문화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건,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를 주고, 또 그들의 삶과 정신세계에 어떤 역할을 했는가의 여부일 것이다. 이 책의 큰 장점이자 단점은 밥 딜런의 이야기 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로 풍성하게 때론 조금은 너저분하게 이루어져 있다는 점이다. 이 책을 집필한 마퀴서는 바로 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일 게다. 밥 딜런이라는 한 가수가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도전의식을 고취시키고 영감을 주고 영향을 주었는지 말이다. 밥 딜런은 한 나라의 정치수반도 아니고, 목숨을 바친 혁명가도 아니다. 그는 자신의 신념을 노래와 음악과 시를 통해서 표현한 대중가수이자 시인이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영웅이며, 어떤 이들에게는 그가 요절하기를 바라며 하나의 전설로 자리잡기를 바랐던 신적 존재이기도 했고(물론 그는 아직 살아있다), 또 어떤 이들에게는 조소거리였고, 또 어떤 이들에게는 지금의 삶의 모습을 있게 한 생의 길잡이기도 했다. 그 누군가에게 무엇이 되어 준 사람. 그 누군가의 영혼을 끈임 없이 자극하는 사람. 아마도 그러하기에 그의 음악에서 진정성을 발견할 수 있고, 지금까지도 밥 딜런이라는 이름에서 무게와 밀도를 느낄 수 있는 이유가 될 것이다. 나에겐 누가 그러한 존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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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소금사막에 비가 내리면 - 테오에세이
테오 글.사진 / 삼성출판사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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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캠스베이 해변을 걸을 땐 하늘을 너무 똑바로 쳐다보아선 안 된다. 왜냐하면 잘못했다간 그 드넓고 새파란 하늘 어딘가로 시선을 놓쳐버리곤 꽤 오랫동안 현실을 벗어난 채 캠스베이만 걷는 사태가 생기기 때문이라고 테오가 그랬으니까. <당신의 아프리카에 펭귄이 방문했습니다>의 여운과 감동은 지금도 마음 한 구석을 그대로 차지하고 있고, 반드시 아프리카를 여행하리라는 결심을 굳히게 만들었다. 2년 전 이맘때쯤 테오는 아프리카로 날 인도했고, 정확히 2년이 지난 지금 느닷없이 아프리카보다 더 생소한 볼리비아의 소금사막에서 손짓을 한다. 그것도 손님도 없고 샤워도 할 수 없고 화장실도 불편하고 음식도 보잘것없고 밤이 되면 몹시 추운데다가 비싸기까지 한 소금호텔로 말이다.



볼리비아는 남미를 소개하는 책자들 가운데서도 쉬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그저 체 게바라가 혁명을 위해 싸우다 숨을 거둔 나라로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저자 테오의 이야기를 통해 바라본 볼리비아는 아픔과 슬픔이 많은 나라다. 볼리비아는 주변의 다른 남미국가들인 칠레, 페루, 브라질, 아르헨티나에 의해 침략 당하고 영토를 빼앗겨 해안의 전부를 잃고 내륙 국가가 되어버렸지만 그들은 티티카카 호수에 건물을 세우고 군함대신 보트를 띄워가며 해군력을 유지하고 있다. 이것은 볼리비아인들의 강인한 프라이드의 발현이자 바다에 대한 그리움과 희망의 표현이다. 그들은 그 넓고 아름다웠던 볼리비아의 바다를 기억하고자 오늘도 호수 위에 보트를 띄우는 것이다. 볼리비아인들의 아픔은 이것뿐만이 아니다. 코카를 생산한다는 이유만으로 범죄의 근원지로, 마약의 원산지로 낙인찍혀버린 현실이다. 그들에게 코카는 마약이 아니라 차(tea)이며 고산병을 치료해 주는 약이자 그네들의 문화이고 전통이다. 그들의 소중한 자원이자 유산을 헐값에 사다가 몇 십 배로 농축하고 화학물질을 섞어 마약으로 만들어 파는 바로 그곳이 범죄의 근원지이자 마약의 원산지가 아닐까. 약한 나라이기에 서글픈 볼리비아의 현실이 오늘날의 대한민국과 다르지 않기에 더욱 가슴 아프게 느껴진다.



목숨을 걸고 꼬로이꼬로 향하는 길 가운데서 저자 테오는 삶의 본질을 깨닫는다. 어딘가로 이어진 길, 누구에겐가로 향하는 길은 예외 없이 인생을 걸고 삶 전체를 걸어야 한다는 것을. 내가 가지고 있는 가장 소중하고 중요한 가치를 걸지 않고서는 결코 원하는 곳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그 진리를 위험천만한 길 한 복판에서 홀연히 깨닫게 되는 것이다. 오직 여행자만이 깨달을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도로 엘 까미노 델 라 무에르떼 위에서만이 깨달을 수 있는 진리를 말이다. 갈매기의 응아가 들어간 홍합스튜를 먹는 것으로 시작된 당신의 아프리카보다 한층 더 살벌(?)한 경험으로 시작된 당신의 소금사막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문체의 여유로움과 글의 깊이와 밀도가 더 해졌음을 발견하게 된다.

 

절대로 져서는 안 되는 극단의 게임을 하고 있는 도시, 진 사람에게는 너무나 가혹한 도시인 서울을 떠나 저자 테오가 도착한 곳은 볼리비아의 소금사막. 아주 아주 오랜 옛날 바다였다가 호수가 되고 그 호수의 물이 오랜 세월 증발하여 생겼다는 우유니 소금사막에는 우기가 되면 비가 오는 모양이다. 하얀 소금사막 위에 비가 내리면 소금 호수가 아니 하늘이 되어버린다는 그곳에서 테오는 행복을 느낀다. 남들보다 우월해서도 아니고, 남의 몫을 내 것으로 만들어서도 아닌 남들과 다르기 때문에, 다름의 시간을 가졌기에 행복하다고 그렇게 고백한다. 도시 사막에 비가 내리고, 메마른 당신의 소금사막에 비가 내려 호수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저자의 바람대로 그의 아름답고 진실한 글과 사진들을 보며 비록 잠시였지만 내 마음 속 소금 사막에 한 차례 시원한 비가 흩뿌리고 지나간다. 이봐요, 테오. 나 역시 당신의 세 번째 여행 에세이가 기다려집니다, 벌써부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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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종의 라틴화첩기행 문학동네 화첩기행 5
김병종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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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작 가본적도 없으면서 “라틴”이라는 단어는 왜 이토록 나를 설레게 하는 것일까. 가보지 못했기 때문에,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래서 더욱 설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김병종의 라틴화첩기행>의 작가 김병종은 설레는 마음으로 라틴 아메리카 이곳저곳을 여행하다가 돌아와 그 설렘이 기억이 되고 추억이 되었을 때 펜과 붓을 들었다. 아련한 그리움을 화폭에 담고 그 여백을 글로 채워 그의 기억 속 라틴 아메리카를 그림과 글로써 되살려 낸다. 

 

저자 김병종이 여행한 쿠바, 멕시코, 아르헨티나, 브라질, 칠레, 페루 이 여섯 나라는 라틴이라는 단어와 동시에 빛의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연상되는 라틴 아메리카의 가장 대표적인 나라들이다. 그 중에서도 단연 인상적이었던 챕터는 쿠바와 아르헨티나. 쿠바를 이야기 할 때, 재즈가 빠질 수 없고 체 게베라 이름이 거론되지 않는다면 섭섭하겠지만 매번 쿠바에 관한 글을 읽을 때마다 등장하는 소재들이라 식상해 질만도 하련만 저자 김병종은 자기만의 재즈를, 자기만의 체 게바라를, 자기만의 쿠바를 그려낸다. 오랜 연륜과 깊은 영혼을 가진 재즈연주가들의 음악과 그들과의 살가운 만남, 쿠바인에게 게바라는 단순히 인기인이 아니라 사랑의 공기 그 자체라는 말하는 한 중년사내와의 만남, 목에 걸린 볼펜이 신기하다며 자기 아이와 함께 구경하고 돌아서던 어느 가족과의 만남 등 저자는 그들 통해 쿠바를 느끼고 반성하고 사랑하게 된다. 저자가 바라본 쿠바는 여유롭지만 열정적이고, 경제적으로 풍족하지는 않지만 정신적으로는 풍요롭고, 즐길 줄 알지만 검소하고 경건하며, 혁명에 대한 프라이드가 강하지만 공격적이지 않은 순수하고 따뜻한 그들의 삶과 영혼을 예찬한다.  

 

저자의 예술가적 열정이 제대로 폭발하고 표현된 곳은 바로 아르헨티나. 그가 만난 아르헨티나는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나왔던 짤막한 문장을 떠올리게 한다. “인간이 동물과 구별되는 이유는 문화가 있기 때문이다.” 아르헨티나는 인간이 왜 인간일 수밖에 없는가에 대한 그 새삼스러운 질문에 답이 되어준다. 오직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정신세계인 문화와 예술에 대한 사랑과 열정이 아르헨티나에 집약되어 있다. 경제적으로 아무리 어려움을 겪는다 해도 백년, 이 백 년 된 고서점들이 명맥을 이어가고, 사람들은 빵을 사듯 극장 티켓을 사고, 화장품을 사듯 책을 사고, 어딜 가나 책을 읽고 있는 사람들이 보이고, 장소를 불문하고 탱고를 추는 사람들이 있는 곳, 먹고 살만해야 예술도 있다는 통념을 산산이 부수어 버리는 곳, 그곳이 아르헨티나이다. 영화 '에비타'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에비타가 Don't Cry For Me Argentina를 부르던 장면보다 에비타의 죽음을 들은 아르헨티나의 시민들이 서로에게 의지한 채 처연히 스텝을 밟으며 춤을 추는 장면이었다. 우리나라와 시차가 정확히 12시간이라 시계를 다시 맞출 필요가 없다는 아르헨티나는 우리나라와의 시차가 180도 다른 만큼 그들의 삶과 사유도 우리나라 사람들과는 180도 다른 나라이다. 좀 더 큰 차와 좀 더 넓은 평수의 아파트와 좀 더 많은 연봉을 인생의 목표로 삼고 이것으로 삶의 승패를 가르는 우리네 삶과는 너무나 다른 그들의 삶은 불현 듯 지금까지의 내 삶의 자리를 돌아보게 만든다. 도대체 풍요롭다는 것은 무엇이며, 잘 산다는 것은 무엇이고, 행복한 삶이라는 건 무엇인가.  

 

그가 만난 라틴은 이 질문에 분명 다른 답을 하고 있다. 세상에 정답이 어디 있겠는가마는 혹시 지금까지 오답을 부여안고 정답인 줄 알며 살아온 것은 아닌지 책을 읽는 내내 생각을 거듭하게 된다. 저자는 이미 답을 찾지 않았을까. 그래서 그 답을 이렇게 화폭에 담고 글을 써내려간 것이 아닐까.


 

반도네온은 탱고의 영혼, 탱고의 성감대로 불릴 만큼 탱고와는 뗄 수 없는 악기다.(...)들고 다닐 수 있는 오르간 개념으로 만들어진 이 악기 역시 이민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왔다. 어둡고도 우수에 차 있어 듣는 사람의 마음속에 내재된 슬픔과 단숨에 공명해버린다는 악기. 식량과 갖가지 생필품만으로도 벅찬 짐더미 위에 반도네온을 얹어온 사람은 누구였을까. 빵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위로가 필요한 순간이 오리라는 걸 알았던 그 사람은. (p.191-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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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길에서 나를 만나다 - 나의 야고보 길 여행
하페 케르켈링 지음, 박민숙 옮김 / 은행나무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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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만나는 길, 깨달음에 이르는 길

여행의 시작. 충실하게 너무나 맹목적으로 충실하게 일상을 살아가다보면 때때로 일상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고픈 충동에 사로잡히는 순간이 찾아온다. 힘들어서, 지쳐서, 아파서, 슬퍼서, 괴로워서, 외로워서, 무미건조해서, 무의미해서 등의 단어들을 줄줄이 매단채로 일상에서 잠시 물러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방법 하나를 꼽으라고 한다면 바로 여행이 아닐까. <그 길에서 나를 만나다>의 저자 하페 케르켈링은 잘나가는 방송인이라는 일상에서 벗어나 지칠대로 지친 육신과 정신을 치유하고, 몹시도 근본적이고 새삼스러운 질문의 답을 찾아 여행을 떠난다. 신은 존재하는가? 삶은 무엇이며 죽음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아니 그보다는 도대체 이 여행의 끝에는 무엇이 있기에 깔끔하게 재단되어 있는 일상을 뒤로하고 야고보 길-산티아고 길로 더 유명한-이라 불리는 600km의 멀고도 험난한 길을 걸어서 걸어서 순례해야 하는가에 관한 답을 찾아 여행을 떠난다. 의심과 투정, 두려움으로 시작된 케르켈링의 여행은 그가 미처 짐작조차 하지 못한 소중한 만남과 깨달음 그리고 기적이 기다리고 있었다.

만남. 딱히 마음에 맞는 동행자가 보이지 않거나 내 몸 하나 건사하기가 버거울 때 ‘혼자만의 시간’이라는 그럴싸한 타이틀을 걸어두고 고립된 채 여행을 할 때가 있다. 물론 이러한 고적의 시간을 통해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고 성찰의 시간을 만들어 갈 수 있다. 저자 역시 야고보 길에 들어섰을 때는 철저히 혼자였으며 외면하고 때론 모른 척 했던 자신의 어두운 내면과의 만남을 갖게 된다. 그러나 고립된 시간이 길어지면서 조금은 비뚤어진 시선으로 사람들을 바라보았고 ‘내가 왜 이 길에 들어섰는가’에 대한 회의와 의구심으로 가득차게 된다. 하지만 그의 앞에 나타난 에비, 티나, 주둥이 아줌마, 라라, 앤, 쉴라와의 만남을 통해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와 인연이 여행의 과정에서, 인간의 삶 가운데서 얼마나 중요한 요소이며 축복인지 깨달아 간다.

기적. 야고보 길을 순례하고 여행하던 순례자들에게는 때때로 기적이 일어난다. 인적도 없는 산속에서 다리가 부러졌을 때 느닷없이 나타난 간호사들-그것도 간호사 복장을 하고 있는-이 다리를 치료를 해주고, 야고보 길에서 벗어나면 안 보이던 나비가 야고보 길에만 들어서면 날아다니고, 말라버린 우물 앞에서 탈진해 있을 때 소방관들의 갑작스런 등장으로 순식간에 우물 뒤에 묻혀있던 수도관을 고쳐주는 이 기적들은 어쩌면 기적이 아니라 우연한 사건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 진짜 기적은 황량하고 고독한 이 순례의 길을 걸어가면서 사람을 만나고, 인연의 실타래가 이어지고, 쉴 자리를 만나고, 깨달음을 만나고, 신을 만나고 그리고 '나를 만나게 된 것'이 궁극적인 기적의 체험이 아니었을까.

여행의 끝. 이 순례의 끝자락에서 저자는 본연의 ‘나’와 대면하게 된다. 걱정과 근심, 사념들을 떨쳐내고 오직 자신의 내뱉는 호흡만을 느끼며 한발 한발 내딛는 발걸음에만 집중하게 되었을 때, 끈임 없이 스스로를 고무시키고 달래고 이끌고 고정되어 있던 한계를 뛰어넘어 종국에는 내가 비워졌을 때, 내가 자유로워졌을 때 비로소 '나'는 나와 만나준다. 하페 케르켈링이 이 길에서 만난 것은 나 곧 케르켈링 자신이었으며, 만남이 요원했던 신과의 대면이었다. 이 책은 나에게 기적처럼 다가온다. 왜냐하면 이제 한 번쯤 온전히 내 자신과 만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을 무렵 그의 글을 통해서 내가 나와 만날 수 있는 시간을 구체적으로 마련해야겠다는 진지한 결심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혹시 이건 나에게 일어난 기적의 시작이 아닐까. 나를 만나게 되는 그 기적의 시작 말이다.


신은 ‘모든 것’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 스스로를 끝없이 열어놓은 ‘하나의 개체’이다. 신적인 것과 반대되는 것은 내 생각으로는 이 문장을 바꾸기만 하면 된다. ‘하나의 개체’를 억압하는, 그렇게 함으로써 스스로를 파괴시키는 ‘모든 것’. 창조자는 우리를 공중에 던진다. 그리고 결국에는 놀랍게도 우리를 다시 붙잡는다.(...) ‘너를 던지는 사람을 믿어라. 그는 너를 사랑하고 전혀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너를 다시 붙잡아줄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차례차례 돌이켜보면 길 위에서 신은 나를 끊임없이 공중에 다 던졌다가 다시 붙잡아주었다. 그렇게 우리는 날마다 마주쳤다. (362-3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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